설종, 최치원, 이규보, 박지원, 정약용, 허균, 김시습 등 우리 문단을 빛낸 선인들의 한문수필 64편을 골라엮었다. 전체 7장이며 주제별로 묶었는데 한문 문체의 특성도 고려했다. 說類에 해당하는 작품은 1장, '記類'에 속하는 작품은 2장에, 3장은 祭文, 4장은 書類, 5장은 생활 주변의 일화, 6장은 疏와 論, 7장은 각종 獻詞를 모은 것이다.
원문의 얼개와 향기를 살리되 딱딱한 의고체를 피해 요즘 독자들에게 잘 맞는 문장으로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최근작 :<조선의 양심, 연암 박지원 소설집> ,<[큰글자책] 연암 척독> ,<연암 척독> … 총 222종 (모두보기) 소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737년 2월 5일(1세)에 반남(潘南) 박씨 아버지 사유(師愈)와 어머니 함평(咸平) 이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한양 서쪽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미(仲美)ㆍ미중(美仲), 호는 연암(燕巖)ㆍ연상(煙湘)이다. 어려서부터 글 솜씨가 뛰어났으나 17세 무렵부터 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학문에 매진했으나 과거에는 뜻을 보이지 않았다.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등과 깊은 교우를 맺었고 박제가, 이서구 등을 제자로 삼아 북학론을 주장했다. 1780년 삼종형인 박명원을 따라 북경에 다녀와서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지었다. 1786년, 50세의 나이에 친구 유언호의 천거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안의현감(安義縣監) 등을 역임했다. 1793년 정조에게 문체반정의 주동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1805년 가회방(嘉會坊) 재동(齋洞) 집의 사랑에서 사망했고 1900년 김택영(金澤榮)이 편찬한 《연암집》이 간행되었으며, 1901년에는 김택영이 편찬한 《연암속집》이 간행되었다.
최근작 :<사가 서거정 시선> ,<고금소총> ,<필원잡기> … 총 21종 (모두보기) 소개 :세종 2년에 태어나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조선조 최고의 문장가요 학자였다. 자는 강중(剛中) 또는 자원(子元)이며,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으로 불렸다. 목사를 지낸 달성 서씨 미성(彌性)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세종 20년에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세종 2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의 학문은 폭이 넓어 천문·지리·의약·점성술·풍수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수양대군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으로 다녀왔고, 세조가 즉위하자 세자 사부로 보임될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사은사로 중국에 갔을 때 그의 문장을 대륙에까지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성종 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조선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에 깊이 관여하였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문선(東文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도 그의 손을 거쳤다.
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지사를 오래도록 겸하면서 문형(文衡)을 맡았는데, 45년간의 관직생활 동안 절반이나 문형을 관장할 정도였다. 아울러 전후 23 차례에 걸친 과거 시험을 관장하여 수많은 인재를 그의 손으로 뽑았다. 학풍과 사상은 조선 초기 관학의 분위기를 대변하였고, 정치적으로는 훈구대신 입장을 견지하기도 했지만, 여러 전적들을 편찬할 때는 신진 사림계의 인물들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그가 주축이 되어 편찬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이 너무 많아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문집 ≪사가집(四佳集)≫이 세상에 전한다. 대구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최근작 :<율곡 이이의 정치 필독서 만언봉사> ,<경연일기> ,<동호문답> … 총 78종 (모두보기) 소개 :1536년, 중종 31년 강릉 오죽헌에서 이원수와 사임당 신씨의 아들로 태어나다.
1551년, 모친 신 부인의 상을 당하다.
1554년,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교제하다. 이 해 3월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가의 선학(禪學)을 탐구하다.
1555년, 속가(俗家)로 돌아오다.
1556년, 책문(策文) 시험을 보았는데 한성시(漢城試)에서 장원으로 뽑히다.
1557년,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결혼하다.
1558년, 예안으로 퇴계 선생을 찾아가다. 퇴계 선생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고 율시(律詩) 1편을 지어 드리다.
1561년, 부친 찬성공(贊成公)의 상을 당하자, 사임당 묘소에 합장하다.
1564년, 생원 진사과에 합격하고, 다시 명경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을 제수받았다. 이때부터 관직 생활에 접어들었다.
1569년,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선조에게 바치다.
1571년, 해주에서 파주 율곡으로 돌아오다. 이조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 해에 향약을 짓다.
1572년, 우계 성혼과 더불어 이기(理氣), 사단칠정(四端七情),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논하다.
1574년, 우부승지로 승진되고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리다.
1575년,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지어 바치다.
1576년, 파주 율곡으로 돌아오다. 관직에서 은퇴할 것을 결심하다.
1577년, 『격몽요결(擊蒙要訣)』이 이루어지다. 초학자들의 학습을 위하여 저술한 책이었다.
1578년,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다. 주자(朱子)의 무이정사(武夷精舍)에 견주어 지은 것이었다. 이때부터 원근의 학자들이 더욱 많이 찾아왔다. 이 해에 다시 「만언소(萬言疏)」를 올리다.
1579년, 『소학집주(小學集註)』가 완성되다.
1580년, 『기자실기(箕子實記)』를 편찬하다. 이 해 대사간으로 부름을 받고 나갔으나 사은(謝恩)하고 곧 돌아오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 해 7월에 「인심도심설」을 지어 바치다. 또 『김시습전』을 짓다. 8월에는 형조판서가 되고, 9월에는 의정부 우참찬이 되다.
1583년, 조정에 나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하다.
1584년, 정월 16일에 병환으로 한성 대사동에서 작고하다.
1610년, 선생과 퇴계 선생을 문묘에 배향하자고 주청하다.
1611년, 문집이 간행되다.
1624년, 문성(文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지다.
최근작 :<역주 파한집> ,<중학생이 보는 파한집>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 총 9종 (모두보기) 소개 :1152년, 고려 왕조 500년 동안 내우외환이 가장 많던 시기에 태어난 관료이자 시인. 처음으로 시평을 써서《파한집》이라는 시평집을 내놓은 사람이다.《파한집》은 이인로의 설화 문학집으로, 저자가 죽기 직전에 지은 작품을 사후 40년이 지난 뒤, 그의 아들인 이세황이 간행한 것이다. 시대적인 불운으로 인해 18세 때 무신 반란인 정중부의 난을 맞고, 이 계기로 이인로는 중이 된다. 하지만 그 후 몇 년 뒤, 정중부 일당이 숙청되자 그는 환속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예부원외랑·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 관직에 재임하던 중 고종 7년(1220), 향년 69세로 개경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저서로 《파한집》3권, 《은대집》20권, 《후집》4권, 《쌍명재집》3권이 있으나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것은《파한집》3권뿐이다.
최근작 :<성학십도> ,<성학십도> ,<아들에게 쓴 퇴계의 편지 3 분수를 넘지 마라> … 총 70종 (모두보기) 소개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1501년 11월 25일 안동 예안현 온계리에서 진사 이식(李埴)과 박씨 부인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세에 이웃 노인에게서 ≪천자문(千字文)≫과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소학(小學)≫ 등을 배웠고 12세에는 숙부 송재공(松齋公) 이우(李?)에게 ≪논어(論語)≫를 배웠다. 15세에 게[蟹]를 보고 <부석천사자유가(負石穿沙自由家)> 등의 시를 지었고 20세에는 ≪주역(周易)≫을 탐독했다.
21세에 서울로 올라와 성균관에 유학한다. 27세에 경상도 향시에 2위로 합격하고 28세에 진사회시에 2등으로 합격, 32세에 문과 초시 2등으로 합격하고 다음 해인 33세(1533)에 반궁(泮宮)에 유학하며 경상도 향시에 합격한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36세에 선무랑과 성균관전적을 거쳐 9월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37세에 선교랑, 승훈랑, 승의랑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박씨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난다.
39세에 3년 상을 마치고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수찬지제교로 승진해 40세에는 사간원정언, 승문원교검,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교리에 임명되었고 42세에는 홍문관부교리, 충청도·강원도어사로 순찰했으나, 43세에 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했다. 이후 종친부전첨, 세자시강원필선, 사간원사간, 성균관사성 등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4세 10월에 상경한 후 중종이 승하하자 부고와 시장을 집필했다. 47세 7월에 안동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했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어 상경해 사퇴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48세에 외직을 자청해 단양군수로 취임했다. 10월에 풍기군수로 전임했다. 49세에 소수 서원을 개칭해 사액 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9월에 신병으로 사임해 귀향했다. 그러나 신병을 이유로 세 번이나 사직원을 제출한 후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퇴계로 돌아와 임소를 이탈했다는 죄목으로 직첩을 박탈당했다. 50세에 예안 하명동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한다. 53세 4월에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한다.
54세에 형조·병조참의,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썼으나 이듬해 병으로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한다. 56세에 도산에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 완성하고 다음 해인 57세에 도산 서당을 지을 터를 마련하고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저술했다. 58세에 대사성에 임명되자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59세에 휴가를 얻어 귀향한 후 관직을 사임하고 ≪송계원명리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저술했다.
60세에 고봉 기대승(奇大升)과 편지로 사단칠정론(四端七情)을 변론했다. 도산서당(陶山書院)이 완공된다. 61세에 <도산기(陶山記)>를 저술했다. 64세 2월에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의 발문을 썼으며 65세에 ≪경현록(景賢錄)≫, ≪역학계몽(易學啓蒙)≫, ≪명당실어(名堂室語)≫ 등을 저술했다. 66세에 공조판서와 홍문관·예문관대제학에 제수되었고, 다음 해인 67세에 다시 예조판서, 경연춘추관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8월에 귀향, 역동 서원(易東書院)을 새로 건축했다.
68세에 선조 원년 의정부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자 6월에 소명을 어기지 못해 상경해 양관의 대제학을 겸임했다. 재임 중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했다. 69세(1569)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귀향했다. 70세 7월 역동 서원에 가서 ≪심경(心經)≫을 강의하고, 8월 역동 서원의 낙성식에 참여했다. 11월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개정하다 병이 심상치 않자 12월 봉화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큰아들을 사직, 귀가하게 해 장례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명문(銘文)과 자명(自銘)을 몸소 짓고, 임종 직적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과 함께 한서암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영의정에 추서되었다.
최근작 :<악서고존> ,<누구나 한번쯤 읽어야 할 목민심서> ,<아버지의 편지> … 총 257종 (모두보기) 소개 :조선 말기의 실학자. 정조 때의 문신이며, 정치가이자 철학자, 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탁옹·태수·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이며, 천주교 교명은 요안,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76년 정조 즉위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 보고 그 학문에 감동받았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었고,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를 거쳐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 조선 말기의 실학자. 정조 때의 문신이며, 정치가이자 철학자, 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탁옹·태수·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이며, 천주교 교명은 요안,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76년 정조 즉위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 보고 그 학문에 감동받았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었고,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를 거쳐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고, 1799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 신유교난 때 장기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다산 기슭에 있는 윤박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저서로 『목민심서』 『경세유표』 『정다산전서』 『아방강역고』 『마과회통』 『자찬묘지명』 『맹자요의』 『논어고금주』 『춘추고징』 『역학제언』 『상서지원록』 『주역심전』 『사례가식』 『상례사전』 『악서고존』 『상서고훈』 『매씨서평』 『모시강의』 『삼미자집』 등이 있다.
최근작 :<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 소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과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한문교육과를 졸업했다. 태동고전연구소 및 민족문화추진회 부설 국역연수원 연구부를 수료하고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시민대학 경서 강사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 <김려 연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