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종로점] 서가 단면도
![]() |
산과 들판에서 자유로이 살아가는 ‘판’은 그리스 신화 속 자연의 신이다. 목동과 가축의 신으로 불리는 판은 상반신은 사람의 모습을, 하반신은 양과 염소를 떠올리게 하는 반인반수이다. 사람과 짐승의 특징을 함께 가진 판의 모습은 예사롭지 않다. 변덕스럽고 화를 잘 내는 성격까지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을 닮아 있다.
나뭇잎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시냇물이 흘러가는 소리, 자연에서 들리는 모든 것은 판의 노래다. 판은 자연 속에서 노래와 함께 살아간다. 아이들과 손을 잡고 춤추기도 하고, 사람들이 웃는 소리를 즐겁게 듣기도 한다. 자연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던 판. 그러나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하게 되면서 그들은 점점 자연의 소리를 잊어버린다. 더 이상 자연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 없어지자, 자연의 신인 판은 피리의 선율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고, 마침내 세상의 혼돈을 일으키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워렌이 처음 판을 봤을 때도, 판은 피리를 불려고 노력하나 피리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기억해 주는 이가 없어져 신으로서의 힘이 사라진 ‘판’의 모습은 자연을 떠올리게 한다. 함께 살아가려 하지 않는다면, 자연 역시도 혼자만의 힘으로 지켜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을 찾는 이가 없어진 순간부터 판은 더 이상 사람들과 함께 사는 신이 아닌 신화 속 괴물의 모습으로 변화한다. 판이 다시 자연의 노래를 기억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판판판 포피포피 판판판』은 모든 걸 품어 줄 듯 다정하지만, 한편으로는 변화무쌍한 자연을 신화적인 존재 ‘판’을 통해 다시금 되새기고 생각해 보게 하는 그림책이다. : 장난감 로켓을 찾으러 숲에 간 작은 아이 워렌이 피리 부는 동물과 마주치는 첫 장면은 심상치 않다. 최후의 존재와 최초의 존재가 맞닥뜨리는 국면이라니! 제레미 모로가 이번엔 종말을 얘기하려는 걸까. 심상찮은 기후 위기를 거듭 겪어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대체로 워렌의 부모들처럼 무기력한 관망자, 딴전을 피우며 섬뜩한 상상에서 멀어지고 싶은데 말이다.
그날 워렌이 판과 마주친 사건은 자연에 무심한 인류에 도래한 강력한 경고이다. 워렌은 인류의 대리자답게 밤마다 예지몽을 꾸고, 어느 날 아침부터 자연계와 소통하게 된다. 자연의 신 판이 자신의 연주를 듣는 이가 없어 피리를 불 수 없게 되고 어느 날 화가 치밀어 피리를 삼켜버렸다는 여왕개미의 해석과 재앙에 대처하자는 제안을 파악한 다음 ‘더 생각할 것’ 없이 행동한다. 피난처를 구하는 동물들을 정성껏 보살피고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동물들은 워렌과 함께 방어벽을 쌓고, 두려움 쫓는 법을 나누고, 그토록 길고 복잡한 판의 노래를 함께 부른다. 그 합창이 마침내 판의 가슴을 울리면서 세상의 평화에 이르는 장면 장면은 더없이 진실하고 진지하다. 낱낱이 그린 동물과 사람 합창단원은 세계의 재앙을 가라앉히고자 두 손 모은 낱낱의 염원이다. 숭고한 주제를 구현하기 위해 만화 기반의 아티스트가 그림책다운 서사와 형식을 연구하고 고민한 이 결과물은 오래된 신화를 펼치고 판을 불러내어 현실의 어린이와 마주치게 한 작가의 영민한 화법의 성공과 함께 꾸준히 호명될 것이다. : 그래픽노블 『표범이 말했다』에서 생명의 철학을 장대하게 선보인 제레미 모로가 이번에는 그림책에서 어린이 독자의 눈높이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누구나 말하고 어린이 또한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조금 먼 미래의 일로 여겨진다면 이 책을 건네고 싶다. 부드럽게 번지는 수채화 사이로 톡톡 빛을 내던 형광 주황색이 무시무시한 화염과 바람으로 변하는 장면을 본다면 기후 위기 상황이 얼마나 시급한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의 생존이 얼마나 위협받는지 단번에 느낄 듯하다.
다가올 재앙을 알고 몰려든 숲속 동물을 구하려고 어린이는 자기 방을 피난처로 만들기 시작한다. 안전한 피난처로 동물들이 옹기종기 숨어들지만 숲과 자연의 신인 판의 분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판이 마구 쏟아내는 불과 우박과 홍수와 폭풍우는 그칠 기미가 없다. 한번 손상되면 회복되기 어려운 자연이 그러하듯이. 동물들 옆에서 인간도 그저 그중 하나의 존재로 겸손히 앉아 잃어버린 자연의 노래를 되찾아 불러야 한다. 모두 함께 해야 할 일이다. 숲속 동물을 구하려고 피난처를 만든 사람은 어린이지만 숲이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할머니였듯 어린이와 어른이, 모든 세대와 인종이, 온 인류가 함께. :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교향곡들이 더 이상 작곡되지 않는 이유는 소음 때문이라고 한다. 그 시대 작곡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던 자연의 소리를 이제 더는 누구도 온전히 들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근대 이후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 중에는 자연에 대한 경탄과 경외가 있다. 오래전 그 각각에는 신들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판판판 포피포피 판판판』은 제레미 모로가 신화와 성서적 상징을 엮어 쓴 공생의 우화다. 그는 목신 판이 지닌 전원, 자연, 전 우주의 의미 위에 생태주의적 철학을 투영해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돌봄의 인식을 새로 빚어냈다. 터전을 잃은 모든 존재를 정중히 두 팔 벌려 맞이하고, 자신의 작은 방을 구원의 방주로 삼고, 기억을 모아 잃어버린 노래를 복원하고, 공생의 낙원을 짓는 워렌의 이야기는 신위의 상실이 곧 이 시대의 위기와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그 과정에서 모든 페이지가 각각의 방식으로 놀랍지만, 특히 개미의 노래에서 시작해 모두의 합창으로 이어지는 클라이맥스의 두 장면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동시에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주제와 형식을 떠올리게 한다. 이야기와 사실의 근대주의적 분열 이후에도 여전히 누군가는 교향악적 전일의 시대를 노래한다. 잃어버린 신화를 새로 쓰듯이. 잊혀진 노래를 다시 부르듯이. : 숲의 노래를 기억하며
공감하는 아이의 모험은 언제나 세상 모든 생명을 향해 손을 내밀며 시작된다. 『판판판 포피포피 판판판』의 주인공 워렌 역시 숲에서 본 '피리를 불지 못하는 판'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으로 모험을 시작한다. 워렌의 모험은 조금 특별하다. 보통 문을 열고 밖으로 향하는 모험과 달리 자신의 방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카펫을 들춰 개미들의 숨을 공간을 만들거나 자신의 옷장을 박쥐에게 내어 주는 것을 시작으로 모험은 흥미를 더해 간다. 아이의 상상을 긍정하는 어른들의 모습도 이야기를 더욱 특별하고 견고하게 만든다. 아이의 상상을 '그저 그런 거짓말'로 치부하지 않고 신화 속 거대한 노아의 방주로 여겨 주는 익살스러운 너그러움이 부럽다. 이야기의 힘을 믿는 어른과 그 어른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아이들이 어쩌면 진짜 예술가인지도 모르겠다. 책장을 덮고 나도 모르게 워렌이 되어 판의 노래를 불러 본다. 잊었던 숲의 모험이 나에게도 있었으니. : 숲과 자연의 신을 깨우는 판판판 포피포피 판판판
함께 외쳐 볼까요! 판판판 포피포피 판판판 『표범이 말했다』로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제레미 모로의 이번 신작은 모두의 그림책으로 우리에게 왔습니다. “할머니, 왜 우세요?” “왜냐하면...... 이제 더는 숲이 노래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 날 이후 아이 워렌에게 찾아오는 이상한 일들은 읽는 내내 우리를 워렌과 함께 동물들을 만나고 판의 이야기를 전해 듣게 합니다. 자연과 숲의 위기 상황에 멜로디를 잃어버린 판에게 워렌과 동물들은 어떻게 대처해 갈까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판판판 포피포피 판판판』 책의 겉표지에는 어딘가를 가리키는 워렌의 손짓과 동물들의 움직임 그리고 뒷표지에 워렌과 함께 고요히 잠자는 동물들의 모습은 어린이가 간직해야만 하는 소중한 것입니다. 본문 속에서 붉은 달밤에 모두가 춤추는 의식, 여러 목소리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노래에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푸르른 숲의 모습은 이 그림책의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고 싶습니다. 광택이 없는 그림책 전체의 구성도 이 그림책의 주제 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숲과 자연의 신 판에게 우리 모두 아름다운 노래를 다시 돌려주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지구에서 우리가 자연과 더불어 오래오래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담고 있는 소중한 책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