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훌륭한 기호학자였다. 『장미의 이름』은 수많은 인용과 기호학적 요소들을 정교하게 담아낸 소설로, 새로운 표지 역시 유의미한 기호들과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으로 채우고 싶었다. 소설의 주요 무대인 수도원과 장서관 건물의 형태, 사건의 실마리가 되는 부호와 인용된 성경 구절, 윌리엄 수도사가 즐겨 사용한 안경 등 작품 안팎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미지들을 표지 곳곳에 숨겨 두어 독자가 소설을 읽기 전과 읽는 중, 읽은 후에 그 의미를 각각 다르게 느낄 수 있길 바랐다.
그렇게 조합하여 그린 이미지를 검은 가죽 질감의 견장정 위에 반짝이는 녹색 박으로 입혔다. 또한 내지가 드러나는 책머리와 책입, 책발의 세 면에도 녹색을 사용했다. <장미>에서 자연스럽게 연상할 수 있는 붉은색이 아닌 녹색을 택한 이유는, 과거에는 녹색 안료를 만들기 위해 많은 양의 독(비소)을 사용해야 했고 그 사실이 이 이야기의 미스터리함을 매력적으로 드러내기에 적절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와 『장미의 이름』을 사랑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즐거운 마음으로 새로운 옷을 입혔다. 이 책이 독자 여러분께도 선물 같이 느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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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훌륭한 기호학자였다. 『장미의 이름』은 수많은 인용과 기호학적 요소들을 정교하게 담아낸 소설로, 새로운 표지 역시 유의미한 기호들과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으로 채우고 싶었다. 소설의 주요 무대인 수도원과 장서관 건물의 형태, 사건의 실마리가 되는 부호와 인용된 성경 구절, 윌리엄 수도사가 즐겨 사용한 안경 등 작품 안팎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미지들을 표지 곳곳에 숨겨 두어 독자가 소설을 읽기 전과 읽는 중, 읽은 후에 그 의미를 각각 다르게 느낄 수 있길 바랐다.
그렇게 조합하여 그린 이미지를 검은 가죽 질감의 견장정 위에 반짝이는 녹색 박으로 입혔다. 또한 내지가 드러나는 책머리와 책입, 책발의 세 면에도 녹색을 사용했다. <장미>에서 자연스럽게 연상할 수 있는 붉은색이 아닌 녹색을 택한 이유는, 과거에는 녹색 안료를 만들기 위해 많은 양의 독(비소)을 사용해야 했고 그 사실이 이 이야기의 미스터리함을 매력적으로 드러내기에 적절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와 『장미의 이름』을 사랑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즐거운 마음으로 새로운 옷을 입혔다. 이 책이 독자 여러분께도 선물 같이 느껴지기를 바란다.
* 디자인에 참조한 텍스트
장미의 상징적 의미는, 그 정확히 의미하는 바가 잘 헤아려지지 않을 정도로 풍부하다.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 12면
그러니까 장서관 사서는 머릿속으로 기억해 둔 통로를 따라 사각형으로 배치된 네 개의 방 중 어느 한 방에서 바로 그 서책을 찾아내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 571면
내가 베낀 것을 내밀자 사부님은 눈을 멀찍이 뗀 채 그걸 들여다보았다. 「무슨 암호 같은데……. 어떻게든 해독해 보아야겠구나. 쓴 솜씨가 시원찮았는지, 네가 베낀 솜씨가 단정치 못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게 무엇이냐…… 12궁도(宮圖)에 쓰이는 부호인 것만은 틀림없을 듯한데. 보이지 이 첫 줄?」
―『장미의 이름』, 300면
「요한의 묵시록」 8:7에 나오는 글귀. 관련 구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우박과 불덩어리가 피범벅이 되어서 땅에 던져져 땅의 3분의 1이 타고 나무의 3분의 1이 탔으며 푸른 풀이 모두 타버렸습니다…….〉
―『장미의 이름』, 309면
윌리엄 수도사는 글을 읽을 때마다 이 물건을 눈앞에다 대기를 좋아했는데, 까닭인즉, 햇빛이 기가 꺾일 때는 특히 이 물건을 이용해야 자연이 그 연세에 허락한 이상으로 밝게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장미의 이름』, 145면
「(……)그러나 우리는, 죽은 자의 손가락 끝에 이런 흔적을 남게 할 만한 여러 물질 중에 특정 물질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면서도 그게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죽은 자들이 왜 여기에 손을 대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뿐이냐, 우리는 그들이 만진 물질과 그들의 죽음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 여부도 아직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
―『장미의 이름』, 464면
「독극물의 세계란, 자연의 신비가 그렇듯이 참으로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전날 말씀드렸다시피,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독초는, 찧어서 적당량을 복용케 하면 이독치독(以毒治毒)의 명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게 환약이나 고약으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기 저 독말풀이나 벨라도나나 독미나리는 수면제 효과를 내기도 하고, 사람의 신경을 자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적량이면 특효약이 될 수 있으나 과하면 치명적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장미의 이름』, 464~46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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