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산책하기 좋은 날
산책을 다룬 동서고금의 수많은 책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을 담고 있는 책. 유년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살던 문정동 훼밀리아파트까지 산책하던 화자는 [테넷] 제작이 무산되어 빈둥거리다 자산관리인의 조언에 따라 서울 아파트에 투자하기 위해 내한한 크리스토퍼 놀런을 만나고 그에게 캐스팅되기에 이른다. '작가의 말'에 힌트가 주어진 한 블로그에 찾아가보는 것으로 완성되는 작품. 묘하게도 좀 먼 거리를 걸을 때면 그 블로그에서 읽은 이상한 일기가 떠오르곤 한다.
#02
면세 미술 : 지구 내전 시대의 미술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 [테넷]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는 공항에 있는 미술품 수장고인데, 이 공간은 그러니까... 면세 구역이다. 고가의 미술품을 사들인 사람이 이를 자기가 사는 나라로 들여오려면 엄청난 세금을 내야 하는데, 이 사람은 사실 예술품의 예술적 성취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미술품이 더 높은 가격이 되길 기다릴 뿐이므로 아직 세금을 부과되지 않은 '항구적 환승 구역'인 공항의 면세 구역에 맡겨두는 것이다. 한편 이 국가의 바깥에서 통제 받지 않는 자산들과 동거하는 이들이 있는데, 바로 난민들이다.
#03
커먼즈의 도전
나치 독일의 유산이었던 템펠호프 공항은 2008년 문을 닫은 후 여러 가지 개발 계획이 세워졌지만 시민 단체가 공항 부지 100%를 공원으로 만들자는 운동을 벌여 2014년 베를린 시민들의 주민투표를 통해 공터로 남게 되었고, 2015년부터는 시리아 난민들의 수용 시설로 사용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공덕역 근처에 있던 경의선공유지가 떠오른다. 고층 빌딩과 아파트 사이에 낮게 자리한 불법적이고 자유로운 공유지의 풍경은 아름다웠는데, 지금도 텅 빈 공간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펜스로 둘러싸여 있어 아무도 들어갈 수 없고 아무도 내부를 볼 수 없다.
#04
Graphic 그래픽 48호
워크룸프레스의 15주년을 기념하는 이슈.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로 다양한 일을 하지만 나로서는 출판사로 더 익숙한데 워크룸프레스, 작업실유령, 스펙터프레스가 출간한 책 중에 절반 이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 읽었느냐와는 당연히 무관한 문제지만 지난 10년간 이렇게 열심히 읽기를 시도한 출판사도 없는 것 같다. '워크룸이 가장 사랑하는 후가공은 박(foil blocking)이다. 박은 거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궁금해서 다음 문장을 읽을 수 없지 않나... 워크룸프레스가 아니었다면 볼 수 없었을 책들에 대해 떠올린다.
#05
노란 책
타이 미치코라는 소녀가 <티보 가의 사람들>이라는 책과 사랑에 빠진 한 시절을 그린 작품. 아름다운 컷과 앵글, 아무 이득도 없이 누구에게 해도 끼치지 않으면서 무언가에 미쳐있는 이야기라 좋다. 타카노 후미코와 이 책은 박솔뫼의 소설 '우리의 사람들'에 등장하는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 가의 사람들>에 대해 검색하다 발견했다.
#06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
떠돌이, 달품팔이, 주정뱅이...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영화 [퍼스트 카우]에서 주인공들 근처에 있었을 것 같기도 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좋지만 '아나콘다', '아나콘다의 귀환' 같은 단편들이 좀 더 좋았다. 인간에게 몰살 당할 위기에 처한 용맹한 뱀들의 혈투. 고생 끝에 삶을 얻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 모든 것이 착각이었고 눈앞에 다가온 죽음. 좀 뜨거운 것 같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개로 읽게 됨.
#07
필립 K. 딕
필립 K. 딕과 엠마뉘엘 카레르를 좋아했던가? <작년을 기다리며>나 <화성의 타임슬립> 같은 책은 좋다. <리모노프>나 <나 아닌 다른 삶> 같은 책들도 좋다. 이들은 분명 가장 훌륭한 책을 쓰는 작가에 속하고 나는 그들의 작품을 좋아하며, 특히 그 미치광이 같은 부분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남자들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고 싶지는 않은데, 아주 높은 확률로 참아주기 힘든 사람일 것 같기 때문이다... '나'를 손에 쥐고 작품 속으로 들어가서 실명으로 난동을 피우는 엠마뉘엘 카레르가 향정신성 의약품 같은 '나'를 작품 전체에 묻혀놓은 필립 K. 딕의 평전을 썼다니까 안 읽을 수는 없지만... 당연히 너무 재미있지만...
#08
이것은 물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다 읽은 날 두 개의 리뷰를 보았는데 하나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이것은 물이다>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는 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물고기...>의 원서에 달려있던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좀 신랄한 비판이었다. 앞의 리뷰에 집중해 본다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잘 모르는 길이 아니라 너무나 잘 아는 길을 걷다가 길을 잃고 말았을 때, 좌절과 함께 시작되는 질문이라는 점에서 이 둘은 좀 닮은 것 같다.
#09
Ways of Curating
어쨌거나 혼자서 좀 오래 걷게 되면, 그렇게 걷기로 한 것이 무언가에 상심한 마음 때문이었다면, 그 길이 좀 아득해서 세상을 잃어버린 것 같아지면 자주 로베르트 발저에 대해 떠올리게 되는 것 같다. 평생 가진 것 없이 고독하게 살다가 요양소를 옮겨 다니게 되었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고 끝없는 산책을 한 사람. <전원에 머문 날들>에도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만 주로 떠올리는 건 이 책의 한 챕터에 실려있는 버전이다.
#10
릿터 Littor 2022.4.5
사실 요즘 제일 즐겁게 읽고 있는 건 아직 세상에 없는 책. <릿터>에 연재되고 있는 박솔뫼, 안은별, 이상우의 '0시 0시 + 7시'이다. 서울에서 도쿄에서 베를린에서 각자가 쓰는 일기는 서로 관심은 두지만 꼭 이어지지는 않는 이야기들, 본 것과 들은 것, 해먹은 것, 이동한 것, 잘 모르던 과거의 누군가가 매진했던 어떤 일 같은 것들에 각자 집중하는 내용이다. 언젠가 이게 책이 되겠지. 그럼 나는 이 책을 꼭 사서 처음부터 다시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