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만 해도 서울 사람들은 냉면을 몰랐다. 불고기도 192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등장한다.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였던 음식점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1920년대 들면서였다. 우후죽순 음식점과 선술집이 생겨났다. 오늘의 총알 배송을 연상시키는 음식 배달부도 등장한다. 문화혁명과도 같았을 이 격랑의 양상은 어떠했을까?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 보수와 개혁이 충돌하고 일합을 겨루던 그 다채롭고 생동감 넘치던 현장을 요리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문학이 있다. 백석, 이효석, 채만식, 방정환, 김랑운, 현진건… 눈 밝은 문인, 문사 들이 이 드라마틱한 장면을 소설로, 산문으로, 르포르타주로 담아냈다. 우리 문학이 이 시기 음식 문화의 혁명적 변화를 얼마나 생생하게 포착해 냈는지 이 책은 보여준다. 더불어 수록된 구본웅, 안석영, 나혜석 등의 귀한 그림은 백 마디 말보다 더 사실적으로 당시의 음식 문화를 보여준다. 100년 전 격랑의 현장으로 음식 문학 기행을 떠나보자.
최근작 :<필사의 힘 : 백석처럼 사슴 따라쓰기> ,<백석과 모네> ,<[큰글씨] 마음의 위로가 되는 한국의 명시 43> … 총 201종 (모두보기) 소개 :(白石, 1912~1996)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로 평가받는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과를 졸업했다. 1934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했고,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8월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여성』지 편집 주간,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직원, 만주 안둥 세관 직원 등으로 일하면서 시를 썼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 정주로 돌아왔고, 1947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분과 위원이 되어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이 외에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 편집위원,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1957년 발표한 일련의 동시로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최근작 :<낙엽을 태우면서> ,<메밀꽃 필 무렵> ,<중고등생 필독서 한국 소설 수필 시 국어교과서 수록 작품 읽기 4> … 총 1612종 (모두보기) 소개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에서 출생, 평창공립보통학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현재의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프로문학의 동반자 작가에서 순수문학의 길로 나아간 이효석은, 예술주의를 추구한 구인회의 동인이었다. 함경북도 경성농업학교 영어 교사,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 등으로 재직하며, 단편소설 「메밀꽃필 무렵」 「산」 「풀잎」 「하얼빈 장편소설 『화분」 『벽공무한『황제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 「고요한 '동'의 밤」 「화초 1,2, 3 등의 문제적 작품들을 발표했다.
이효석은 1942년 5월 초 결핵성 뇌막염으로 진단을 받고 평양 도립병원에 입원 가료, 언어불능과 의식불명의 절망적인 상태로 병원에서 퇴원 후, 5월 25일 오전 7시경 자택에서 35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현재 장남 이우현 선생이 이효석 작가의 전집을 간행하는 등 이효석 문학을 새롭게 기리고자 애쓰고 있다.
최근작 :<레디메이드 인생> ,<채만식 소설어 사전> ,<노벨라33 세트 - 전33권 (활판인쇄 양장 1천 세트 한정판)> … 총 1533종 (모두보기) 소개 :호는 백릉이며, 1902년 전라북도 옥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으며 1914년 임피보통학교(臨陂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18년 경성에 있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재학중에 집안 어른들의 권고로 결혼했으나 행복하지 못했다. 1922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부속 제1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공부를 중단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했다가 1년여 만에 그만둔다.
1924년 단편 〈세 길로〉가 ‘조선문단’에 추천되면서 문단에 등단한다. 그 뒤 〈산적〉을 비롯해 다수의 소설과 희곡 작품을 발표하지만 별반 주목을 끌지 못했다. 1932년 〈부촌〉, 〈농민의회계〉, 〈화물자동차〉 등 동반자적인 경향의 작품을, 1933년 〈인형의 집을 나와서〉, 1934년 〈레디메이드 인생〉 등 풍자적인 작품을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기반을 굳힌다. 1936년에는 〈명일〉과 〈쑥국새〉, 〈순공있는 일요일〉, 〈사호일단〉 등을, 1938년에는 〈탁류〉와 〈금의 열정〉 등의 일제강점기 세태를 풍자한 작품을 발표한다. 특히 장편 소설 〈태평천하〉와 〈탁류〉는 사회의식과 세태 풍자를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한 1940년에 〈치안속의 풍속〉, 〈냉동어〉 등의 단편 소설을 발표한 그는 1945년 고향으로 내려가 광복 후에 〈민족의 죄인〉 등을 발표하지만 1950년에 생을 마감한다.
요즘 텔레비전을 켜면 온통 요리 프로그램이다. 한동안 ‘먹방’이 유행하더니 어느 틈에 요섹남 셰프테이너들이 나와 요리 솜씨를 뽐내는 ‘쿡방’으로 진화했다. 그만큼 요리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었다는 말이겠다.
100년 전만 해도 서울 사람들은 냉면을 몰랐다
오늘의 음식 문화의 뿌리는 언제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일까? 냉정하게 말하면 그것은 채 백 년이 되지 않는다. 그 전에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사는 마을을 벗어날 일이 없었다. 식사는 으레 집에서 하는 것이었으며, 여행자도 외식문화도 없으니 음식점이 존재할 턱이 없었다.
근대적인 의미의 음식문화가 태동한 것은 20세기 들어서였다. 최초의 요릿집이 문을 연 것은 우리가 국권을 상실하기 직전이었지만, 그로부터 십여 년이 흐른 뒤에도 큰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1920년대가 되자 상황이 일변하였다. 음식 문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때를 기점으로 전통 음식 문화와 근대 음식 문화의 경계선이 확연히 아로새겨진다.
우후죽순 음식점과 선술집이 생겨났다. 때를 같이하여 냉면, 설렁탕, 추어탕, 군고기, 떡국, 만두… 민초들의 사랑을 받은 대중요리가 등장하였다. 관북지방에서나 즐기던 냉면은 191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평양에 냉면집이 생기고, 1920년대가 다 되어서야 경성에 상륙했다. 100년 전만 해도 서울 사람들은 냉면을 몰랐다는 이야기다. 고기를 음식점에서 구워 먹는 문화도 1920년대 중반 서울 전동의 대구탕집에서 시작된 것이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퍼졌다. 음식 배달부도 등장한다.
100년 전으로 떠나는 음식 문학 기행
문화혁명과도 같았을 이 격랑의 양상은 어땠을까?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 보수와 개혁이 충돌하고 일합을 겨루던 그 다채롭고 생동감 넘치던 현장은 요리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문학이 있다. 이때는 마찬가지로 근대문학이 여명기에서 중흥기로 들어서는 참이었다. 숱한 문인, 문사 들이 이 드라마틱한 장면을 소설로, 산문으로, 르포르타주로, 기사로 담아냈다. 우리 문학이 이 시기 음식 문화의 혁명적 변화를 얼마나 생생하게 포착해 냈는지 이 책은 보여준다.
명태 창난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비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北關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 속에 나는 가느슥히 여진女眞의 살내음새를 맡는다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까마득히 신라 백성의 향수도 맛본다
백석의 시 <북관>北關 전문이다. 이 짧은 시는 음식이 우리에게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허기를 면하기 위해, 사지육신을 움직일 힘을 얻기 위해 섭취하는 음식 속에는 그 음식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정신과 영혼을 이어주는 내밀한 또다른 무엇이 있는 법이다.
창난젓 하나에서 수백 년 또는 천여 년을 거슬러올라 이 땅을 살아간 사람들의 체취를 맡기도 할진대, 오늘의 음식문화의 맹아萌芽가 돋아난 백여 년 전의 우리 삶을 돌아보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고도 충분하다. 한 마디로 이 책은 문학으로 말하는 우리 음식사라고 할 수 있다.
총알 배송을 연상케 하는 음식 배달부
오늘의 총알 배송을 연상케 하는 음식 배달부의 모습, 1920년대 선술집 풍경, 사람이 거꾸로 매달려 국수를 뽑는 그림, 닭과 돼지를 키우던 소설가 현진건의 캐리커처 … 이 책에 더불어 수록된 이미지 자료들이다. 구본웅, 안석영, 나혜석 등의 귀한 그림은 역사적 가치도 높거니와 백 마디 말보다 더 사실적으로 당시의 음식 문화를 보여준다.
본문 일부
가재미, 나귀
백석
백석 : 시인. 북방의 토속 방언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시집 《사슴》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음식을 소재로 한 시가 많다.
동해 가까운 거리로 와서 나는 가재미와 가장 친하다. 광어, 문어, 고등어, 평메, 횃대…. 생선이 많지만 모두 한두 끼에 나를 물리게 하고 만다. 그저 한없이 착하고 정다운 가재미만이 흰밥과 빨간 고추장과 함께 가난하고 쓸쓸한 내 상에 한 끼도 빠지지 않고 오른다.
나는 이 가재미를 십 전 하나에 뼘 가웃씩 되는 것 여섯 마리를 받아들고 왔다. 다음부터는 할머니가 두 두름 마흔 개에 이십오 전씩 사오시는데, 큰 가재미보다도 잔 것을 내가 좋아해서 모두 손길만큼한 것들이다.
그 동안 나는 한 달포 이 고을을 떠났다 와서 오랜만에 내 가재미를 찾아 생선장으로 갔더니 섭섭하게도 이 물선은 보이지 않았다. 음력 8월 초승이 되어서야 이 내 친한 것이 온다고 한다.
나는 어서 그 때가 와서 우리들 흰밥과 고추장과 다 만나서 아침, 저녁 기뻐하게 되기만 기다린다. 그때엔 또 이십오 전에 두어 두름씩 해서 나와 같이 이 물선을 좋아하는 H한테도 보내야겠다.
묘지와 뇌옥牢獄과 교회당과의 사이에서 생명과 죄와 신神을 생각하기 좋은 운흥리를 떠나서 오백 년 오래된 이 고을에서도 다 못한 곳, 옛날이 헐리지 않은 중리로 왔다.
예서는 물보다 구름이 더 많이 흐르는 성천강이 가깝고 또 백모관봉의 시허연 눈도 바라보인다. 이곳의 좌우로 긴 회灰담들이 맞물고 늘어선 좁은 골목이 나는 좋다. 이 골목의 공기는 하이야니 밤꽃의 내음새가 난다.
이 골목을 나는 나귀를 타고 일없이 왔다갔다 하고 싶다. 또 여기서 한 오 리 되는 학교까지 나귀를 타고 다니고 싶다. 나귀를 한 마리 사기로 했다.
그래 소장, 마장을 가보나 나귀는 나지 않는다. 촌에서 다니는 아이들이 있어서 수소문해도 나귀를 팔겠다는 데는 없다.
얼마 전엔 어느 아이가 재래종의 조선말 한 필을 사면 어떠냐고 한다. 값을 물었더니 한 오 원 주면 된다고 한다. 이 좀말로 할까고 머리를 기울여도 보았으나, 그래도 나는 그 처량한 당나귀가 좋아서 좀 더 이놈을 구해 보고 있다.
-《조선일보》 1936. 9. 3
유경식보柳京食譜*
이효석
이효석 : 소설가. 〈메밀꽃 필 무렵〉〈노령근해〉등의 작품이 있다. 1934년부터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유경柳京은 평양의 다른 이름이며, 식보食譜는 음식의 족보, 갈래를 뜻함.
평양에 온 지 사년이 되나 자별스럽게 기억에 남는 음식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생활의 전반 규모에 그 무슨 전통의 아름다움이 있으려니 해서 몹시 눈은 살피나, 종시 그런 것이 찾아지지 않습니다.
거처하는 집의 격식이나 옷맵시나 음식 범절에 도시 그윽한 맛이 적은 듯합니다. 이것은 평양 사람 자신도 인정하는 바로, 언제인가 평양의 자랑을 말하는 좌담회에 출석했을 때 들어 보아도, 그들 자신으로도 이렇다 하는 음식을 못 들었습니다. 가령 서울과 비교하면 - 감히 비교할 바 못되겠지만 - 진진하고 아기자기한 맛이 적고 대체로 거칠고 담하고 뻣뻣스럽습니다. 잔칫집 음식도 먹어 보고, 요정에도 올라 보았으나, 어디나가 다 일반입니다.
요정에 올라서 평양의 진미를 구하려 함은 당초에 그른 일이어서, 평양의 진미는커녕 식탁에 오르는 것은 조선 음식이 아니고 정체 모를 내외 범벅의 당치 않은 것들뿐입니다. 그리고 음식상이라기보다는 대개가 술상의 격식입니다. 술을 먹으러 갈 데지, 음식을 가지가지 맛보러 갈 데는 아닙니다. 차라리 요정보다는 거리의 국수집이 그래도 평양의 음식을 자랑하고 있는 성싶습니다.
평양 냉면은 유명한 것으로 치는 듯하나 서울 냉면만큼 색깔이 희지 못합니다. 하기는 냉면의 맛은 반드시 색깔로 가는 것은 아니어서, 관북 지방에서 먹은 것은 빛은 가장 검고 칙칙했으나, 맛은 서울이나 평양 그 어느 곳 것보다도 나았습니다. 그러나 평양 온 후로는 까딱 냉면을 끊어버린 까닭에 평양 냉면의 진미를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시작해 볼 욕심도 욕기도 나지는 않습니다. 냉면보다는 되려 온면을 즐겨 해서 이것은 꽤 맛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장국보다는 맛이 윗길이면서도 어복장국보다는 한결 떨어집니다. 잔잔하고 고소한 맛이 없고 그저 담담합니다. 이것이 평양 음식 전반의 특징입니다만, 육수 그릇을 대하면 그 멀겋고 멋없는 꼴에 처음에는 구역이 납니다. 익숙해지면 차차 나아는 가나 설렁탕이 이보다 윗길일 것은 사실입니다.
친한 벗이 있어 추석이 되면 노티를 가져다줍니다. 일종의 전병으로 수수나 쌀로 달게 지진 것입니다. 너무 단 까닭에 과식을 할 수 없는 것이 노티의 덕이라면 덕일 듯합니다. 나는 이 노티보다도 차라리 같은 벗의 집에서 먹은 만두를 훨씬 훌륭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중국식 만두보다도 그 어떤 만두보다도 나았습니다. 평양의 자랑은 국수가 아니고 만두여야 할 것 같습니다.
동무라면 또 한 동무는 이른 봄에 여러 차례나 손수 간장 병과 떡 주발과 김치 그릇을 날라다 주었는데, 이 김치의 맛이 일미여서 어느 때나 구미가 돌지 않을 때에는 번번이 생각납니다. 봄이언만 까딱 변하지 않는 김치의 맛 - 시원한 그 맛은 재찬삼미再讚三味해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대체로 평양의 김치는 두 가지 격식이 있는 듯해서, 고추양념을 진하게 하는 것과 엷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거의 소금만으로 절여서 동치미같이 희고 깨끗하고 시원한 것, 이것이 그 일미의 김치인데, 한 해 겨울 그 동무와 몇 사람의 친구와 함께 휩쓸려 늦도록 타령을 하다가, 곤드레만드레 취한 김에 밤늦게 그 동무의 집으로 습격을 가서 처음 맛본 것이 바로 그 김치였던 것입니다. 단 두 칸밖에 안되는 방에 각각 부인과 일가 아이들이 누워 있었던 까닭에 동무는 방으로는 인도하지 못하고, 대문 옆 노대露臺에 벌벌 떠는 우리들을 앉히고, 부인을 깨워 일으키더니 대접한다는 것이 찬 김치에 만 밥, 소위 짠지밥(김치와 짠지는 다른 것임을, 평양에서는 일률로 짠지라고 일컫습니다)이었습니다. 겨울에 되려 아이스크림을 먹는다더니, 찬 하늘 아래에서 벌벌 떨면서 먹은 김치의 맛은 취중의 행사였다고는 해도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북쪽일수록 음식에 고추를 덜 쓰는 모양인데, 이곳에서 김치를 이렇게 싱겁게 담그는 격식은 관북
지방의 풍습과도 일맥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요새 의학박사 양반이 고춧가루의 해독을 자꾸만 일러주는 판인데 앞으로의 김치는 그 방법에 일대 개혁을 베풀어 이 평양의 식을 따면 어떨까 합니다. 나는 가정의 주부들에게 이것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습니다. 단지 의학박사가 아닌 까닭에 잠자코 있을 뿐입니다.
잔칫집에서 가져오는 약과와 과질은 요릿집 식탁에 오르는 메추라기 알이나 갈매기 알과 함께 멋없고 속없는 것입니다. 약과는 굳고 과질은 검습니다. 다식이니 정과니 하는 유는 찾으려야 찾을 수 없습니다. 없는 모양입니다.
중요한 음식의 하나가 야키니쿠인데 고기를 즐기는 평양 사람의 기질을 그대로 반영시킨 음식인 듯합니다. 요리법이 가장 단순하고, 따라서 맛도 담백합니다. 스키야키같이 연하지도 않거니와 갈비같이 고소하지도 않습니다. 소담한 까닭에 몇 근이고간에 양을 사양하지 않는답니다. 평양 사람은 대개 골격이 굵고 체질이 강장하고 부한 편이 많은데, 행여나 야키니쿠의 덕이 아닌가 혼자 생각에 추측하고 있습니다. 다만 야키니쿠라는 이름이 초라하고 속되어서 늘 마음에 걸립니다. 적당한 명사로 고쳐서 보편화시키는 것이 이 고장 사람의 의무가 아닐까 합니다. 말이란 순수할수록 좋은 것이지 뒤섞고 범벅하고 옮겨 온 것은 상스럽고 혼란한 느낌을 줄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어죽을 듭니다. 물고기 죽이란 말이나 실상은 물고기보다도 닭고기가 주장이 되는 듯합니다. 닭과 물고기로 쑨 흰죽을 고추장에 버무려 먹습니다. 여름 한철의 진미로서 아마도 천렵 풍습의 유물로 끼쳐진 것인 모양입니다. 제철에 들어가 강 놀이가 시작되면 반월도를 중심으로 섬과 배 위에 어죽놀이의 패가 군데군데에 벌어집니다. 물속에서 철벅거리다가 나와 피곤한 판에 먹는 죽의 맛이란 결코 소홀히 볼 것이 아닙니다. 동해안 바닷가에서 홍합죽이라는 것을 먹은 적이 있는데, 그 조개로 쑨 죽과는 맛이 흡사한데다가 양편 다 피곤한 기회를 가린 것이라, 구미 적은 여름의 음식으로 이 죽들은 확실히 공이 큰 듯합니다.
-《여성》1939.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