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중고매장

미리보기
  • 최저가 : -원 I 최고가 : -원
  • 재고 : 0부
  • - 쇼핑목록에 추가하신 후 목록을 출력하시면 매장에서 간편하게 상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종로점] 서가 단면도
(0)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하는 강학종 목사의 야고보서 강해. 시간을 뛰어넘어 이 시대의 언어로 잘 풀어내어 현재의 교회와 성도의 삶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걸작이다.

머리말 7

1장 야고보의 당부 11
2장 믿음 아닌 믿음 103
3장 말과 지혜 145
4장 헛된 욕구 헛된 관심 178
5장 우리의 추수 220

최근작 :<잃어버린 400년>,<LET’S GO 요한계시록>,<LET’S GO 야고보서> … 총 19종 (모두보기)
소개 :

강학종 (지은이)의 말
한 나라의 언어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옮기면 의미가 손상되게 마련입니다. 오죽하면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사극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를 영어로 옮기면 “Thank you”입니다. “황공무지로소이다”는 “I am sorry”입니다. 도무지 같은 뜻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그것이 언어 현실입니다.
저는 데모가 끊이지 않던 시절에 대학에 다녔습니다. 대학가에는 반미 감정도 상당했습니다. 당시 워커 주한 미국 대사가 “지나친 내셔널리즘은 양국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 때문에 반미 데모가 더 격화되었습니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요?
한 재미동포 작가가 워커 대사가 말한 내셔널리즘과 한국인이 생각하는 내셔널리즘은 같은 뜻이 아니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내셔널리즘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말을 민족주의로 번역하는데 내셔널리즘과 민족주의는 뜻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미국은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쪽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내셔널리즘은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대입니다. 우리나라가 이민족의 공격을 받은 횟수가 931회라고 합니다. 다른 나라를 지배한 적은 없고 지배를 받기만 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배격하는 쪽으로 민족주의를 말합니다.
한쪽에서는 다른 나라를 지배하려는 것을 내셔널리즘이라고 하는데 그 단어를 민족주의로 번역해서 자기 나라를 보호하려는 것으로 얘기하면 대화가 제대로 될 리 없습니다. 역사적인 배경이 다른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흔히 행위를 강조한 책이라고 합니다. 교회에서는 늘 이신칭의를 말하는데 무슨 영문일까요? 오죽하면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아닌 행위를 말하는 것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입니다.
믿음은 히브리어 ‘에무나’를 번역한 말입니다. <70인역>에서는 ‘피스티스’로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에무나가 믿음이고 헬라어로는 피스티스가 믿음입니다. 그런데 둘의 뜻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헬라는 철학이 발달한 나라입니다. 사유와 성찰을 중시하는 풍조가 있으니 언어도 다분히 사변적입니다. 피스티스도 지적 동의를 뜻합니다. 어떤 사실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피스티스입니다. 우리말 ‘믿음’도 다분히 그렇게 쓰입니다. 반면에 에무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적 동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행동을 수반합니다. 전인격적인 반응을 말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운 적이 있습니다. 모세가 기도를 하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기도를 쉬면 이스라엘이 지다가 아론과 훌이 모세 양옆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려서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게 하는 것으로 결국 이긴 전투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다”라고 할 때 우리말 ‘꾸준하게’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가 번역이 안 되었습니다. 바로 ‘에무나’입니다. 모세의 손이 꾸준하게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히브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꾸준한 순종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도 믿음을 피스티스의 의미로 생각하는 풍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급기야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일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런 야고보가 쓴 서신을 가리켜서 행위를 강조한 책이라고 하는데 차라리 왜곡된 믿음을 바로 설명한 책이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야고보가 이해한 믿음이라고 해서 바울이 이해한 믿음과 다를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바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모쪼록 이 책이 믿음을 바로 이해하는 데 한 조각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읽는 모든 분들께 제가 야고보서를 통해서 받은 은혜가 그대로 전이되기를 소망하며 아울러 이 책이 나오도록 수고해주신 방주석 장로님과 베드로서원 가족들에게 고마움의 뜻을 전합니다.

주후 2023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