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에 겐자부로가 2006년 4월 18일부터 2012년 3월 21일까지 아사히신문 문화면에 '정의집(定義集)'이라는 제목으로 매달 한 번 연재한 것을 가필하여 단행본으로 묶은 것이다. 2014년 국내에 번역 출간된 후 독자들의 호응에 힘입어 개정판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1935년 일본에서 태어나 패전과 전후 일본 사회의 혼돈을 겪으며 문학 작가로서의 입지를 구축해온 저자가 뇌에 장애를 가진 아들의 아버지이자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일본 문화와 사회에 대해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 담담하게 써 내려간 수필집이다.
그동안 읽은 책, 만난 사람, 해온 일, 그리고 가족(특히 뇌에 장애를 가진 아들) 이야기를 제재삼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일본의 대표적 지성인인 오에 겐자부로가 이 시대 이 사회의 정의正義를 위해 우리가 잊으면 안 될 말들의 의미를 정의定義하고 있다.
첫문장
장남 히카리(光)가 지적장애를 안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 가족이 그가 만드는 음악을 낙으로 삼아 그럭저럭 조용히 살아온 이야기는 가끔 글로 썼습니다.
수상 :1994년 노벨문학상, 1973년 노마문예상, 1958년 아쿠타가와상 최근작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 ,<소설의 전략> ,<쓰는 행위> … 총 223종 (모두보기) 소개 :1935년 일본 에히메현에서 태어났다. 1954년 도쿄대학에 입학해 불문학을 공부했고, 특히 사르트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도쿄대학신문〉에 게재한 단편 「이상한 작업」으로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으며, 1958년 「사육」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1963년에 태어난 장남 히카리의 지적 장애를 계기로 작품세계에 큰 변화를 맞았고 『개인적인 체험』 등에서 이를 주요하게 다루었다. 이후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은 르포르타주 『히로시마 노트』, 1960년의 안보 투쟁을 그린 『만엔 원년의 풋볼』, 천황제와 핵 문제를 고찰한 『핀치 러너 조서』를 발표하는 등, 전후 일본 사회의 불안한 상황과 정치·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작품에 담아냈다. 솔제니친과 김지하의 석방 운동에 적극 참여해 실천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많은 소설과 수필, 평론을 발표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1994년, 일본 정부가 문화훈장과 문화공로자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하자 “나는 민주주의 그 이상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라며 수상을 거부했다. 2002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작가이자 지식인으로서 반전과 평화, 공존을 역설해왔다.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동일본대지진’ 이후 반원전 운동에도 앞장섰던 그는 2023년 3월 3일 영면에 들었다.
최근작 :<그림 그리는 남자> ,<르네상스인 김승옥> ,<번역과 번역가들> … 총 223종 (모두보기) 소개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외국어대학 연구원을 지냈고,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하며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미야모토 데루의 《환상의 빛》, 《금수》,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를 비롯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도련님》,《마음》 등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지은 책으로 《르네상스인 김승옥》(공저)이 있다.
시대의 위기에 대해,
평생 동안 수련해온 소설의 언어로 자신만의 정의를 내리는
오에 겐자부로의 비평적 에세이.
“이 시대, 이 사회의 작가로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개정판 출간을 앞두고 다시 읽어보는데, 인간다움에 입각한 오에 겐자부로의 섬세하면서도 단단한 말의 정의들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는다. 언어는 시대와 함께 태어나고 그 안에서 존재하지만, 시대를 넘어 그 의미를 되새겨봐야 할 말들이 있다. 이 책에서 오에 겐자부로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는 다시 생각해봐야 할 다양한 말들을 제시하고, 이 시대 이 사회의 정의正義를 위해 평생 동안 수련해온 소설의 언어로 자신만의 정의定義를 내린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일본의 ‘행동하는 지성의 전형’으로 인정받는 오에의 작품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가장 주요한 테마는 소외와 일탈된 사람들이다. 오에는 시코쿠의 산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일본 단가短歌 책을 많이 갖고 있던 큰형 덕택에 문학적인 감수성을 익혔다. 십대 시절 일본 작가들의 책을 독파했으며, 대학에서는 그의 평생 스승인 와타나베 가즈오의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을 읽고 프랑스문학에 대한 흥미를 고조시킨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4세 때부터 항상 읽으면서 인간 내면의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배웠고, 프랑스 문학자 라브레에게서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을, 사르트르에게서는 그의 실존주의적인 사고로부터 문학적인 큰 영향을 받았다.
대학시절 문단에 데뷔한 이후 일본 젊은이와 양심을 대변하는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오에는 뇌에 장애를 가진 아들의 출생을 계기로 문학 생활에 커다란 방향전환을 겪는다. 이후 오에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천착하는 철학적인 주제에 더욱 몰두하게 되고, 엄청난 독서에 의한 학문적인 깊이와 논리와 사상, 그리고 독특한 문학적인 사유를 특기로 하는 그만의 문학을 펼치게 된다.
이 책 『말의 정의』에서 오에는 ‘인간을 더럽히는 것’에 대해 우려하면서도 생활에 배어있는 인간다움을 찾아내는 ‘주의 깊은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일본은 애매함 때문에 과거 역사적으로 과오를 범했고 지금 또한 애매함 때문에 전쟁포기 서약을 파기하려 하고 있다. 일본인으로서 그것을 막고 인류의 치유와 화해를 향한 소설가로서의 임무를 다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듯이, 오에는 “이 시대, 이 사회의 작가로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사유하며 일본 사회의 도의적인 책임, 나아가 핵문제, 차별문제 등 사회모순을 형상화하는 데까지 시선을 돌리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루쉰, 레비스트로스, 이노우에 히사시의 작품을 읽으며 경애하는 말을 베껴 쓰고, 다시 읽고, 자신만의 정의를 내리고자 노력해 온 오에는 특히 새로이 소설을 쓰는 사람들에 전하는 조언으로, 최초로 완성한 작품을 고쳐 쓰는 습관을 키움으로써 구조화하는 능력을 키울 것을 강조한다. 재능 있는 신인이 계속 등장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다양한 저항력을 키워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의(定義)에 대하여. 저는 젊었을 때 발표한 소설에, 장애를 갖고 성장해가는 장남을 위해 세계의 모든 것을 정의해주겠다는 ‘덧없는 꿈’을 썼습니다. 그 꿈은 이룰 수 없었지만, 지금도 뭔가에 대해 그가 이해하고 또 웃어줄 것 같은 사물의 정의를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불행한 인간’에 대한 주의 깊은 눈이 있는가, 좋은 평화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사회에 ‘섬세한 교양’이 무너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인생에서 만난 모든 소중한 말들을 간직한 채, 스승?친구?세계적인 작가들 등 ‘큰사람’과 공생해왔음을 행운이라 여기며, 노년에도 습관처럼 글을 쓰는 작가 오에 겐자부로. 그가 지금 만나고 있는 시대의 커다란 위기에 대해 평생 동안 수련해온 소설의 언어로 자신만의 정의를 내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인생의 어느 순간 친구가 왠지 모르게 전과는 다른 눈으로 저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 거울에 비추어 밑바닥 깊은 데서 한기를 느끼는 것 같을 때는, 자신이라는 운동체를 멈출 수는 없어도 궤도 수정은 해왔습니다.‘ 라는 저자처럼, 친구의 눈 삼아 곁에 두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