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소설가, 작사가, 영화감독 등 유난히 섬세한 이들의 여행을 담는 여행 무크지 『어떤 날』 8호는 기억에 담고 싶지 않은, 그래서 오히려 기억에 남는 ‘망가진 여행’을 담았다. 그 망가진 여행을 회복하기 위해 그들은, 그럼에도, 다시 여행을 떠나겠다고 말한다. 그 어떤 모습이든, 일단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서점에는 여행서가 많다. 거의 모든 여행서가 추억에 잠겨 행복해 죽겠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어떤 날 8』은 그건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솔직히 말하건대, 집 떠나면 고생이다. 여행은 그게 견딜만한 고생일 때까지만 즐겁다. 함께 여행을 떠난 상대를 잘못 선택해서, 여행지를 잘못 선택해서, 도착한 그곳이 기대보다 더 훌륭했음에도 조금씩 계획이 뒤틀리면서 여행은 얼마든지 망가질 수 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여행은 그런 것이다. 가보지 못한 곳, 달성하지 못한 목표, 만나지 못한 이, 풀지 못한 의문, 못한 것투성이일 수 있다. 그래서 계속, 계속, 계속 가고 싶은 것이다. 모든 일정이 여행자의 뜻대로 된다면 다시는 찾지 않았을 어떤 곳. 그곳을 이해했다고 성급히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 ‘망가진’ 여행 덕분에 여행자는 오늘도 다른 여행을 준비한다. 여행은 그렇게 지속된다.
실패하여 지속될 수 있는 마음 / 강윤정
여행을 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 / 오은
그토록 사소한 기적을 바랐던 어느 여행가의 죽음 / 위서현
어떤 싸움의 기록 / 이현호
Last Summer / 장연정
11월의 어느 겨울에 낭트영화제를 가는 것에 대하여 / 정성일
파라다이스에 혼자 남겨지면 / 정세랑
수상 :2019년 대산문학상, 2019년 현대시작품상, 2014년 박인환문학상 최근작 :<초록을 입고> ,<어떤 마음은 딱딱하고 어떤 마음은 물러서> ,<절해고도> … 총 63종 (모두보기) SNS ://twitter.com/flaneuroh 소개 :2002년 봄 『현대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왼손은 마음이 아파』 『나는 이름이 있었다』 『없음의 대명사』, 청소년 시집 『마음의 일』, 산문집 『너랑 나랑 노랑』 『다독임』을 썼다. 박인환문학상, 구상시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작란(作亂) 동인이다.
수상 :2019년 시인동네문학상
최근작 :<점, 선, 면 다음은 마음> ,<작가의 루틴 : 시 쓰는 하루> ,<당신의 그림에 답할게요> … 총 26종 (모두보기) 소개 :시인. 시집 『라이터 좀 빌립시다』,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 『비물질』과 산문집 『방밖에 없는 사람, 방 밖에 없는 사람』, 『점, 선, 면 다음은 마음』을 펴냈다.
수상 :2017년 한국일보문학상, 2017년 창비장편소설상, 2013년 창비장편소설상 최근작 :<나의 축제는 거칠 것이 없어라> ,<소설의 첫 만남 11~20 세트 - 전10권> ,<하필 책이 좋아서> … 총 93종 (모두보기) 인터뷰 :<목소리를 드릴게요> 출간, 정세랑 작가 인터뷰 - 2020.01.10 SNS ://twitter.com/callmerang 소개 :2010년 『판타스틱』에 단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이만큼 가까이』로창비장편소설상을, 2017년 『피프티 피플』로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았다.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목소리를 드릴게요』, 장편소설 『덧니가 보고 싶어』, 『지구에서 한아뿐』, 『재인, 재욱, 재훈』,『보건교사 안은영』, 『시선으로부터,』, 산문집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가 있다.
여행을 망치려면 일단 여행을 떠나야 한다,
망가진 여행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을 망쳐버리고 싶다.
여행을 망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을 망치려면 일단 여행을 떠나야 한다.
그때는 늦지 않게 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여행의 시대다. 모두가 여행을 좋아한다고, 떠나겠다고, 떠나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한다. SNS로 여행을 ‘생중계’하는 시대에 여행은 우리 시대의 스토리텔링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여행이 우리를 흡족케 하는 것은 아니다. 여행을 준비할 때, 출발 직전에, 여행 도중에 여행은 종종 우리를 배신한다. 여행 정보가 넘쳐나서, 일정이 완벽해서 ‘망가질’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믿었던 여행 동반자가 여행을 ‘망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이도 있다. 여기저기 넘쳐나는 여행의 판타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도 적지 않다. 시인, 소설가, 작사가,... 여행을 망치려면 일단 여행을 떠나야 한다,
망가진 여행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을 망쳐버리고 싶다.
여행을 망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을 망치려면 일단 여행을 떠나야 한다.
그때는 늦지 않게 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여행의 시대다. 모두가 여행을 좋아한다고, 떠나겠다고, 떠나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한다. SNS로 여행을 ‘생중계’하는 시대에 여행은 우리 시대의 스토리텔링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여행이 우리를 흡족케 하는 것은 아니다. 여행을 준비할 때, 출발 직전에, 여행 도중에 여행은 종종 우리를 배신한다. 여행 정보가 넘쳐나서, 일정이 완벽해서 ‘망가질’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믿었던 여행 동반자가 여행을 ‘망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이도 있다. 여기저기 넘쳐나는 여행의 판타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도 적지 않다. 시인, 소설가, 작사가, 영화감독 등 유난히 섬세한 이들의 여행을 담는 여행 무크지 『어떤 날』 8호는 기억에 담고 싶지 않은, 그래서 오히려 기억에 남는 ‘망가진 여행’을 담았다. 그 망가진 여행을 회복하기 위해 그들은, 그럼에도, 다시 여행을 떠나겠다고 말한다. 그 어떤 모습이든, 일단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여행을 망치려면 일단 여행을 떠나야 한다
사람들은 여행을 좋아한다. 기회가 닿는 대로 지금-여기를 떠나고 싶어 한다. 여행 계획을 짜놓고 공항에 가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들이 넘쳐난다. 가히 여행의 시대다. 그러나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이도 있다. 일상의 안정감이 깨어지는 게 싫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갖가지 이유를 들어 여행을 떠나지만, 지금-여기를 벗어나고 싶은 일탈의 욕망을 품고 있지만, 여행이 선사하는 설렘과 흥분을 즐기지만 그러한 비일상적이고 극적인 자극을 일상에 대한 폭력으로 여기는 이도 적지 않다. 어떤 이에게 여행은 보통의 생활에 균열을 일으키고, 몸담고 있는 현실을 파괴하는 평지풍파다.
시인, 소설가, 작사가, 영화감독 등 유난히 섬세한 이들의 여행을 담는 여행산문 무크지 『어떤 날』 8호는 기억에 담고 싶지 않은, 그래서 오히려 기억에 남는 ‘망가진 여행’을 담았다. 강윤정(편집자), 오은-이현호(시인), 정세랑(소설가), 장연정(작사가), 정성일(영화감독), 위서현(아나운서) 등 7명의 여행자들이 자신의 망가진 여행을 고백했다.
문학 전문 편집자 강윤정은 몇 해 전 토리노행 열차 티켓을 끊었다. 프리모 레비(Primo Levi), 유대계 이탈리아인이며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인 작가. 그가 나고 자란 곳, 끌려갔다가 돌아온 곳,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곳에 꼭 가고 싶었다. 그렇게 레비가 묻힌 묘지 앞에 서는 것을 택했다. 자신에게 인간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를 보여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토리노 역에 도착했다. 구글맵으로 지도를 확대-축소하며, 대중교통과 도보를 총동원해 묘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문이 닫혀 있었다. 월요일에는 문을 닫는다고 했다. 공동묘지에도 휴무일이 있을 줄이야. 묘지 관리인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건 영화 속에나 나오는 일이었다. 운명 같았던 토리노 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저 멀리 알프스 산봉우리를 덮은 만년설이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웃음이 났다. 신기했다. 완전히 다른 시공간을 살았던 프리모 레비라는 사람을 마음 깊이, 오래도록 그리워하고 애도할 수 있다는 것이. 돌아오는 기차에서 생각해보니 레비의 말, 삶, 그리고 그가 본 세상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만으로도 그 여행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시인 오은의 망가진 여행은 친구와 나눈 맥주 한잔에서 시작되었다. “남들은 좋아하는데 끌리지 않는 게 뭐야?”라는 친구의 물음에 그는 “여행”이라고 말했다. 시인에게 여행은 불편한 경험에 불과하다. 예상할 수 없는 일, 예기치 않은 일이 그냥 싫다. 그래도 이번에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주말을 피해서 2박 3일, 아무 계획 없이 단지 자유롭게! 며칠 후, 두 사람은 서로의 거주지 중간에 위치한 용산에서 만났다. 까만색 SUV 렌터카에서 친구는 전국 지도를 펼쳤다. 속초! 수학여행을 제외하곤 가본 적이 없던 강원도로 정했다. 계획이 없다는 것은 아무것이나 해도 문제 될 게 없다는 말이다. 그때였다. 우두둑우두둑 소리가 났다. 비였다. 일기예보에서는 강원도에 호우주의보가 내려져 있다고 했다. 계획이 어그러지고 변수가 등장했지만, 여행은 ‘나도 몰랐던 나’를 튀어나오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펑크록과 브릿팝을 들으면서 해안도로를 달렸다. 그날 밤, ‘강원도-바다’ 하면 떠오르는 횟집으로 향했다. 회는 살살 녹았고, 술도 달았다. 하지만 여행은 다음 날 끝나고 말았다. 비 오는 날 회를 먹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계획이 없는 여행에 적응해갔지만 몸은 그렇지 않았나보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배탈에 두 사람은 고속도로 휴게소에 오래 머물러야 했다. 무얼 먹지도, 무얼 보지도 않은 채. 비는 그치고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친구가 말했다. 그냥 서울로 돌아갈래?
비록 바다에 가지 못하고 휴게소 화장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그래서 실패한 여행이었지만 시인은 여름만 돌아오면 그 여행이 떠오른다. 무계획, 날씨, 과식이 망친 여행이지만, 그 여행은 ‘망친 여행’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적응하는 나를 만들어주었으니까.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좋아하는 것을 찾으면 된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으니까 말이다.
시인 이현호에게 여행은 ‘어떤 싸움의 기록’이다. 시인은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상의 안정감이 깨어지는 게 싫어서란다. 그런 시인에게도 잊지 못할 여행이 있다. 4년 전 떠났던 최초의 해외 여행이었다. 늦깎이 군 생활을 마치고, 서른 살 삶을 되돌아보고 앞날을 정비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여자 친구의 성화도 있었다.
여자 친구와 함께 떠난 2박 3일의 홍콩 여행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늦잠을 잤고, 허둥지둥 공항에 도착했다. “간판이 중국어인 거 빼면 서울이랑 똑같네”라는 말에 여자 친구의 화를 돋우었고, 영화 <중경삼림>의 명소는 공사중이었고, 폭우도 쏟아졌다. 사람 냄새 나는 곳에서 밥을 먹자고 고집을 부려 찾은 식당은 실패였다. 템플 스트리트, 틴하우 사원, 제이드 마켓, 침사추이…… 어디를 찾아도 그저 시큰둥할 뿐이었다. 시인은 여행을 즐기는 게 아니라 여행과 대결하고 있었다. 감동은 여행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여행은 망가졌다. 그러나 그 여행은 헛되지 않았다. 그 여행에서 시인은 “여행을 위해서 공간을 이동할 필요는 없다”는 페르난도 페소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모든 방식으로” 느낄 수만 있다면 “여행을 위해선,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일상은 여행이 될 수 있음을 그는 알게, 아니 느끼게 되었다.
시인은 여전히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을 망쳐버리고 싶다. 그러나 조금 달라졌다. 여행을 망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생각, 여행을 망치려면 일단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는 늦지 않게 공항에 도착할 거라는 시인의 다음 여행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서점에는 여행서가 많다. 거의 모든 여행서가 추억에 잠겨 행복해 죽겠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어떤 날 8』은 그건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솔직히 말하건대, 집 떠나면 고생이다. 여행은 그게 견딜만한 고생일 때까지만 즐겁다. 함께 여행을 떠난 상대를 잘못 선택해서, 여행지를 잘못 선택해서, 도착한 그곳이 기대보다 더 훌륭했음에도 조금씩 계획이 뒤틀리면서 여행은 얼마든지 망가질 수 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그건 『소울 트립』, 『눈물 대신, 여행』 작가 장연정도, 영화감독 정성일도, 소설가 정세랑도 같은 마음이다. 무더위밖에 생각나지 않는 싱가폴(장연정), 11월의 어느 겨울에 찾은 낭트영화제(정성일), 친구가 떠나고 홀로 남은 하와이(정세랑)는 ‘망가진’ 기억을 남겨주었지만, 그렇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으로 그들은 추억하고 있었다.
여행은 그런 것이다. 가보지 못한 곳, 달성하지 못한 목표, 만나지 못한 이, 풀지 못한 의문, 못한 것투성이일 수 있다. 그래서 계속, 계속, 계속 가고 싶은 것이다. 모든 일정이 여행자의 뜻대로 된다면 다시는 찾지 않았을 어떤 곳. 그곳을 이해했다고 성급히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 ‘망가진’ 여행 덕분에 여행자는 오늘도 다른 여행을 준비한다. 여행은 그렇게 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