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개의 달 시화집' 시리즈 중 6월편으로, 초여름에 어울리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윤동주, 백석, 김영랑, 정지용, 한용운 등 18명의 시인들의 초판본 시를 엮은 책이다.
미국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는 현대인의 고독한 삶의 단면을 그림으로 노래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1882년 7월 22일 뉴욕 주 어퍼나이액에서 태어나 1967년 5월 15일 뉴욕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사망하기까지, 양차대전을 겪은 미국 사회의 고독함과 절망감이 담긴 일상을, 시간을 초월한 듯하게 표현한 그의 그림을, 사람들은 사랑했다.
한편 같은 시절, 윤동주는 가혹한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따뜻하고 충만한 감성과 순결한 영혼으로 절망과 고난을 시로 노래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김영랑, 한용운, 박용철 등 시인들 모두 고단한 삶의 순간을 아름다운 시어로 승화시켰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그들의 시와 그림을 사랑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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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 서울신문 2018년 7월 30일자
최근작 :<매일 예쁜 시 한 편> ,<[큰글자책] 평생 간직하고픈 필사 시>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 총 145종 (모두보기) 소개 :전라남도 강진의 부유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김영랑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이다. 영랑永郞은 아호인데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했으나 불과 1년 반 만에 부인과 사별했다. 그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후에 ‘사립휘문고등보통학교’로 개칭)에 입학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 등의 선배와 정지용, 이태준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데 직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이 무렵 독립투사 박렬, 시인 박용철과도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후 고향에 머물렀다. 1925년에 개성 출신 김귀련과 재혼했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했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했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으며,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 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와 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영위했다. 9·28수복 하루 전인 9월 27일 길에서 유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작품이 실린 《영랑시집永郞詩集》(1935)과 《영랑시선》(1949), 유고시집 《모란이 피기까지는》(1981) 등이 있다.
최근작 :<매일 예쁜 시 한 편> ,<시를 잊은 나에게> ,<모던걸 수필집 : 내 머릿속에 푸른 사슴> … 총 149종 (모두보기) 소개 :1911년 9월 1일 황해도(黃海道) 장연군(長淵郡) 전택면(專澤面) 비석리(碑石里)에서 출생한다. 본래 이름은 항렬자를 따른 기선(基善)이었으나, 여섯 살 때 홍역을 심하게 앓고 소생한 후 하늘의 명(天命)으로 살았다는 의미로 이름을 고쳐 올렸다고 한다. 아버지 노계일(盧啓一)은 무역업을 통해 상당한 재산을 모은 소지주였으며, 어머니 김홍기(金鴻基)는 서울 태생의 양반 가문 규수로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1917년 일곱 살 때 장연에 있는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의 친정인 서울로 이주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낯선 환경으로의 변화는 이후 노천명 문학에서 드러나는 ‘향수’의 근원이 된다. 1920년에 비로소 서울 생활의 근거지(창신동 81번지 2호)를 정하고 진명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5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해 1926년 진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다. 4년간의 여고보 생활 동안 항상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이미 이 시절부터 시작(詩作)에 능했으며, 몸이 약한데도 달리기 선수로 활약했다. 성격은 예민한 편으로 특히 자존심이 강했으나, 평생 지우 이용희와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1930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 겨울 모친이 57세로 죽는다. 이화여전 재학 중에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의 가르침 속에 시작(詩作)에 집중해 교지를 비롯해서 ≪신동아≫ 등 여러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한다.
1934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노천명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시원≫ 창간호(1935. 2. 10)에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한다.
1937년 조선 중앙일보사를 사직하고 북간도의 용정, 연길 등을 여행했으며, 1938년 49편의 시를 수록한 ≪산호림(珊瑚林)≫을 자비 출판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공고히 한다. 이화여전 은사들인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 등과 남산의 경성 호텔에서 화려한 출판 기념회를 열었으며, 진달래빛 옷을 곱게 입고 참석한 노천명은 ‘한국의 마리 로랑생’, ‘앨리스 메이넬’로 불린다. 이후, 다시 조선일보사에서 운영하는 ≪여성≫지의 편집 기자 생활을 하면서 지속적인 창작 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1942년부터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친일시를 창작하고 ‘조선문인협회’에 모윤숙, 최정희 등과 함께 간사로 참여한다. 1945년 29편의 시를 수록한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이 매일신보 출판부에서 간행된다.
해방 후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서울신문으로 이어지면서 노천명은 문화부에 근무한다. 1947년 노천명의 형부 최두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에 이어 극진히 사랑하던 조카딸 최용자마저 맹장 수술 후 스물두 살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 특히 각별한 사이였던 최용자의 죽음은 깊은 슬픔과 허망함을 주는 사건이 된다. 이러한 면면들은 여러 편의 수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1948년 10월 38편의 수필이 수록된 첫 번째 수필집 ≪산딸기≫가 정음사에서 간행된다. 또한 같은 해 3월에는 동지사에서 출간한 ≪현대 시인 전집≫ 제2권에 55편의 <노천명집>이 수록된다.
한국 전쟁기는 노천명에게 큰 시련이었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노천명의 부역 행위는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해 20년 형이 선고되어 노천명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부산으로 이감된다. 김광섭 등의 구출 운동으로 1951년 4월 출옥하게 되며, 가톨릭에 귀의하고 공보실 중앙 방송국 촉탁으로 일하게 된다. 이러한 시련은 노천명에게 일생의 굴욕으로 다가왔으며 옥중의 심정은 여러 시편으로 형상화된다. 1953년 3월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가 간행된다.
1954년 7월 두 번째 수필집 ≪나의 생활백서≫를 출간하고, 1955년 12월 ≪여성 서간문 독본≫을 출간한다. 서라벌 예술대학에 강사로 출강하는 한편, 1956년 5월 ≪이화 70년사≫를 간행하는데, 이 일에 몰두했던 노천명은 건강에 무리가 온다. 결국 1957년 3월 7일 오후 3시 거리에서 쓰러진 노천명은 청량리 위생병원 1호실에 입원한다. 재생 불능성 뇌빈혈 판정을 받고, 요양과 입원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1957년 6월 16일 새벽 1시 30분에 종로구 누하동 225번지의 1호 자택에서 운명을 다한다. 노천명의 장례는 6월 18일 천주교 문화회관에서 최초의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이헌구가 식사를, 오상순, 박종화, 이은상, 김말봉이 조사를, 최정희가 약력을 소개하고, 전숙희는 유작을 낭독했으며, 중곡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후에 천주교 묘지 이전으로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으로 이장되었는데, 묘비는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하고, 서예가 김충현이 시 <고별>의 일부를 새겼다.
사후 1년에 42편이 수록된 유고 시집 ≪사슴의 노래≫가 한림사에서 간행되고, 1960년 12월 김광섭, 김활란, 모윤숙, 변영로, 이희승 등의 발행으로 노천명의 3주기를 기념한 ≪노천명 전집 시편≫이 간행된다. 또한 1973년 3월 시인의 유족이 주선하고 박화성이 서문을 쓴 수필집 ≪사슴과 고독의 대화≫가 서문당에서 간행되며, 1997년 7월 이화여자대학교 문인 동창회와 시인의 유족, 솔 출판사가 힘을 합해 노천명의 시와 산문(유고 포함)을 수록한 ≪노천명 전집≫1, 2권이 간행된다.
최근작 :<필사의 힘 : 백석처럼 사슴 따라쓰기> ,<백석과 모네> ,<[큰글씨] 마음의 위로가 되는 한국의 명시 43> … 총 201종 (모두보기) 소개 :(白石, 1912~1996)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로 평가받는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과를 졸업했다. 1934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했고,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8월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여성』지 편집 주간,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직원, 만주 안둥 세관 직원 등으로 일하면서 시를 썼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 정주로 돌아왔고, 1947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분과 위원이 되어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이 외에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 편집위원,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1957년 발표한 일련의 동시로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최근작 :<하루하루 하이쿠> ,<일본 하이쿠 선집> ,<열두 개의 달 시화집 겨울> … 총 13종 (모두보기) 소개 :1716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에도로 나와 하진이라는 하이카이 선생의 집에 기거하며 그에게서 본격적인 수업을 받았다. 1742년 그의 나이 27세에 스승이 세상르 떠나자, 관동과 동북 지방을 순례하며 그림과 하이카이 수업을 쌓다가 1751년 에도로 나왓다. 1754년부터 요사 지방에 4년 동안 머문 뒤, 귀경하여 성을 요사라 칭했다. 그 후 교토에 거처를 정하고 1768년에는 <헤이안 인물지>에 화가로서 이름을 올렸고, 하이카이 중흥의 1인자 자리에 올랐다.
최근작 :<이파리를 흔드는 저녁바람이> ,<스페이드 퀸> ,<이제 그만 울어요> … 총 219종 (모두보기) 소개 :영국의 시인 겸 수필가. 1844년 영국 켄트주 월마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했다. 처음에는 약학을 공부하고 소아과 병원에서 근무하다 개인 병원을 열었으나 환자가 적어 병원 경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1882년부터는 시 창작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1885년부터 1894년까지 8편의 희곡을 써서 고전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단시집>으로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순직한 감정과 운율이 아름다운 시를 많이 썼다. 그밖에도 장시집 <미의 유언>을 발표했다.
최근작 :<윤곤강 전집 : 비평> ,<윤곤강 전집 : 시> ,<열두 개의 달 시화집 봄> … 총 47종 (모두보기) 소개 :1911년 9월 24일에 충남 서산군 서산읍 동문리 777번지에서 부친 윤병규(尹炳奎)와 모친 김안수(金安洙)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한다. 아호 ‘곤강(崑崗)’은 천자문의 “금생려수(金生麗水) 옥출곤강(玉出崑崗)”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1930년에 일본 센슈(專修)대학에 입학해 ≪시인춘추(詩人春秋)≫로 활동하던 그는 1931년 11월에 종합지인 ≪비판(批判)≫(7호)에 <녯 성터에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이후 이 ≪비판≫을 비롯해서 ≪조선일보≫, ≪우리들≫, ≪중앙≫, ≪조선중앙일보≫ 등에 시를 지속적으로 발표한다. 1933년 일본에서 귀국한 그는 ≪신계단(新階段)≫(8호)에 평론 <반종교문학의 기본적 문제>를 발표해 시뿐만 아니라 비평 활동도 같이 한다. 1934년 2월 10일 현실 비판적인 작품 활동을 해 오던 윤곤강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인 ‘카프(KAPF)’에 가입한다. 그러나 몇 개월 뒤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7월에 전북 경찰부로 송환되었다가 장수(長水)에서 5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12월에 석방된다. 당시 수감 생활의 모습은 그의 시 <향수 1>, <향수 2>, <향수 3>, <창공>, <일기초>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해에 처음으로 소설 <이순신>을 ≪형상≫(1호)에 발표한다. 이후 그는 충남 당진읍 유곡리로 낙향했다가 1936년에 상경해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간다.
1937년에 서울의 사립학교인 화산(華山)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며 그의 첫 시집 ≪대지(大地)≫(풍림사)를 발간하게 된다. 이듬해에 제2시집 ≪만가(輓歌)≫(동광당서점)를 펴낸다. 그리고 1939년에는 제3시집 ≪동물 시집≫(한성도서주식회사)을 발간하게 되고, 다음해에 제4시집 ≪빙화(氷華)≫를 출간하는 등 4년에 걸쳐 시집 네 권을 펴내는 왕성한 모습을 보여 준다. 1943년에 명륜전문학교(성균관대학교 전신) 도서관에서 근무하던 그는 ‘조선문인보국회(朝鮮文人報國會)’ 시부회(詩部會) 간사로 임명되기도 한다. 1944년 동거하던 김원자와 사별하게 된 그는 충남 당진읍 읍내리 368번지로 낙향한다. 이 시기 일제의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면 서기로 근무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상경한 그는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카프에 가담해 식민지 현실을 비판적으로 표출하던 작품 세계가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1946년 모교인 보성고보 교사로 근무하게 되고, 이후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을 탈퇴한다. 이 시기 문우들과 함께 해방 기념 시집인 ≪횃불≫을 발간한다. 1947년 그는 성균관대 시간강사로 출강하면서 편주서인 ≪근고조선가요찬주(近古朝鮮歌謠撰註)≫(생활사)를 펴낸다. 1948년에 중앙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그는 고독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면서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여 준다. 제5시집 ≪피리≫(정음사)와 제6시집 ≪살어리≫(정음사)를 펴냈으며, 김기림의 ≪시론≫에 이어 두 번째로 시론집 ≪시와 진실≫(정음사)과 찬주서 ≪고산가집(孤山歌集)≫(정음사)을 발간한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1950년 1월 7일 서울 종로구 화동 138-113번지에서 작고하게 되고, 충남 당진군 순성면 갈산리에 안장된다. 제주 조각공원과 보성고교, 그리고 충남 서산시 서산문화회관과 그의 묘소 입구 등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최근작 :<중고등생 필독서 한국 소설 수필 시 국어교과서 수록 작품 읽기 4> ,<매일, 시 한 잔> ,<시를 잊은 나에게> … 총 32종 (모두보기) 소개 :1895년 경성부 천연동 16번지 출생
1911년 보성전문학교 입학, 3년 수료 후 보성전문학교 모표 사건으로 퇴학
1914-15년경 도일
1916년 1월 16일 격월간지 <근대사조> 발간
1918년 미키로후(삼목로풍)가 주관한 미래사 동인으로 활동
1919년 2월 홍영우, 유지영, 이병도 등과 함께 동경 유학생 낙우회(樂友會)의 기관지 <삼광(三光)> 창간
1920년 4월 와세다대학(早稻田大) 전문부 정치경제학과 입학
1921년 5월 <장미촌> 창간(동인 변영로, 노자영, 박종화, 박영희, 정태신, 이훈, 오상순 등)
1921년 11월 25일 동경에서 원종린, 조용희, 정재달과 함께 문화주의 운동 선전문을 배포하다 검거됨
1922년 7월 <폐허(廢墟)> 창간(창간 동인 김억, 남궁벽, 오상순, 이병도 등과 함께 참 여)
1922년 9월 제적. <삼광> 3월호에 ‘고뇌(苦惱)의 려(旅)’ <창조> 6호에 ‘눈으로 애인아 오너라’, ‘소곡(小曲)’ 등을 발표하며 여러 매체에서 활발히 작품 활동
1927년 2월 만주 장춘에서 만주이주조선농민보호연구회 부회장으로 취임
1927년 10월 <조선시단> 창간
1945년 대동신문 주필 취임
1945년 12월 건국기금조성회 총무부에 참여
1946년 3월 전조선문필가협회 가입
1953년 4월 국민대학교 교무처장 취임
1955-58년 동아일보, 현대문학 등 각종 매체에 작품 활동 활발히 함
1959년 4월 지병으로 영면
최근작 :<매일, 시 한 잔> ,<시를 잊은 나에게> ,<문예월간 文藝月刊> … 총 55종 (모두보기) 소개 :1904년 8월 2일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면 소촌리 363번지(현 광주광역시 광산군 소촌동 363번지)에서 마을의 대지주였던 부친 박하준(朴夏駿)과 모친 고광(高光)의 삼남으로 태어났으나, 장남과 차남이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법률상 장남으로 자랐다.
1920년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자퇴한 뒤, 1921년 봄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다. 이곳에서 18세의 박용철은 한 살 연상인 김영랑과 처음 만난 이래 평생 교분을 나눴다. 1923년 도쿄외국어학교 독일문학과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이어서 연희전문학교 문과 1학년 2학기로 편입했으나 몇 달 만에 자퇴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에서 한문학과 조선 문학을 강의하던 위당 정인보에게 시조를 배우고, 일성(一星) 이관용에게 독일어를 배우면서 동시에 일어, 영어, 독일어로 된 해외 시집을 탐독했고 또 영국 낭만주의 시,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소네트를 탐독하면서 희곡에 심취하기도 했다. 1925년 봄 누이동생 박봉자가 배화여자고동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함께 상경한 이후 영어와 독일어 및 문학과 철학, 역사 등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1926년 지속된 유폐 생활로 인한 위병(胃病)으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는 등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1926년 창작 희곡 <말 안 하는 시악시>가 연희전문학교 학생극 대본으로 선정되어 처음 공연되었다. 1928년 9월 박봉자의 요청에 따라 쓴 배화 학생극용 창작 희곡 <석양>이 공연 무대에 올랐다. 1929년 4월 박봉자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박용철은 소촌리에 남아 영시와 독일시 번역에 몰두했다. 박용철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시들, 즉 <떠나가는 배>, <이대로 가랴마는>,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싸늘한 이마> 등은 대부분 이 시기에 창작되었다.
1929년 10월 22일 김영랑과 함께 시 잡지를 발간하기 위해 경성으로 가서 정지용을 처음 만났고, 12월 10일경 변영로와 정인보 등을 만나 순수 서정시파인 ‘시문학’ 동인을 구성했다. 이렇게 해서 ≪시문학≫에 수록된 외국 시 번역에서 영미 시는 정지용이, 프랑스 시는 이하윤이, 독일 시는 박용철이, 한시는 정인보가 전담하게 되었다. 이후 1930년 가을 무렵 박용철이 옥천동에서 견지동으로 이사하면서 견지동 집은 ‘문예월간사’ 사무실 역할을 겸하게 되었다. ≪문예월간≫이 종간된 이후 박용철은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평론을 비롯해 해외 번역시와 수필, 창작시를 꾸준히 발표했다. 같은 해 7월 ‘해외문학파’가 주축이 된 ‘극예술연구회’가 결성되면서 이하윤의 중재로 박용철이 ‘극예술연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1934년 1월 ≪문학≫ 창간호를 발간, 편집과 발행 및 재정을 박용철이 맡았다. 이어서 같은 해 4월 ‘극예술연구회’의 기관지 ≪극예술≫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했다.
1935년 봄 박용철은 정지용, 김영랑과 함께 폐병으로 병석에 누운 임화의 병문안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시집 발간에 대해 합의하고 나서 산실된 원고들을 모아 10월 27일 ≪정지용 시집≫을 발간하고 이어 같은 해 11월 5일 ≪영랑 시집≫을 시문학사에서 발간했다. 이후 <‘기교주의’설의 허망>, <기술의 문제> 등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에 전념했다.
1936년 무렵 박용철의 공식적인 문단 활동은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다시 문학잡지 간행을 계획했다. 이헌구, 구본웅 등과의 논의를 거쳐 잡지명을 ≪청색지(靑色紙)≫로 하고, 이듬해 1월 문단인들에게 발간 취지서를 발송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잡지 간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1937년 초겨울부터 박용철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병석에서 <시단: 정축년 회고>, <시적 변용에 대해서>를 발표하고 곧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필답으로만 겨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에서 시와 편지를 썼다고는 하나, 시 <만폭동>이 그의 마지막 공식 발표작이 되었다.
1938년 5월 12일 오후 5시 후두결핵으로 사직동 자택에서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최근작 :<이파리를 흔드는 저녁바람이> … 총 2종 (모두보기) 소개 :고려 중기의 문인으로, 고려를 대표하는 천재시인. 그가 쓴 서정시는 한 시대 시의 수준을 끌어올렸고, 그는 대대로 시인의 모범이 되었다. 다른 한편 시대의 풍운아였던 그는, 서경 천도를 주장하는 무리들과 어울려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적극 나섰다. 그러나 정치적 포부는 좌절되었고, 우리에게 그는 다만 몇 편의 시로 기억되고 있다.
최근작 :<이파리를 흔드는 저녁바람이> … 총 2종 (모두보기) 소개 :彌三良低耳, 데이지는 바쇼의 《오쿠로 가는 작은 길(奧の細道)》에 하이쿠 1편이 실렸을 뿐, 지방 상인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최근작 :<이파리를 흔드는 저녁바람이> … 총 2종 (모두보기) 소개 :大須賀乙字, 1881~1920. 일본의 하이쿠 시인. 1908년 도쿄 대학 재학 중에 발표한 〈하이쿠 계의 새로운 추세〉로 작가로서 이름을 높였다. 40세에 요절했기 때문에 작가로서 의 활동 기간은 10년 남짓에 불과하다.
최근작 :<천사가 날 대신해>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사랑은 무한대이외다> … 총 80종 (모두보기) 소개 :1896년 평안남도 평양군 융덕면에서 태어났다. 1911년 서울 진명여학교 보통과를 졸업하고, 2년 뒤 일본으로 가 국정여학교에 편입했으나 중퇴 후 귀국, 1917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청춘》 현상문예에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1918년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며, 《창조》의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5년경 《매일신보》 기자를 지내기도 했다. 소설 「칠면조」(1921) 「돌아다볼 때」(1924) 「외로운 사람들」(1924) 「탄실이와 주영이」(1924) 「꿈 묻는 날 밤」(1925) 「손님」(1926) 「모르는 사람같이」(1929), 시 「동경」 「옛날의 노래여」 「석공의 노래」 「시로 쓴 반생기」, 시극 「조로의 화몽」 등 개작을 포함하여 170여 편의 소설, 시, 수필, 희곡을 남겼다. 그 밖에도 창작집 『생명의 과실』(1925)과 『애인의 선물』(1930?)을 펴냈으며, 에드거 앨런 포의 『상봉』,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의 『외로운 사람들』을 번역했다. 1951년경 도쿄 아오야마 뇌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작 :<세계 거장의 드로잉 컨셉북 : 와토.호퍼> … 총 139종 (모두보기) 소개 :1882~1967.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 뉴욕 주 나이아크에서 출생, 뉴욕에서 사망했다. 1889년경 파슨스디자인스쿨의 전신인 뉴욕예술학교에서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로버트 헨리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에드워드 호퍼는 현대 미국인의 삶과 고독, 상실감을 탁월하게 표현해내 전 세계적으로 열렬하게 환호와 사랑을 받는 화가이다. 그의 여유롭고 정밀하게 계산된 표현은 근대미국인의 삶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시각을 반영한다. 희미하게 음영이 그려진 평면적인 묘사법에 의한 정적(靜寂)이며 고독한 분위기를 담은 건물이 서 있는 모습이나 사람의 자태는 지극히 미국적인 특색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미국 생활(주유소, 모텔, 식당, 극장, 철도, 거리 풍경)과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라는 두 가지를 주제로 삼았으며, 그의 작품들은 산업화와 제1차세계대전, 경제대공황을 겪은 미국의 모습을 잘 나타냈고, 그 때문에 사실주의 화가로 불린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팝아트, 신사실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평범한 일상을 의미심장한 진술로 표현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에드워드 호퍼 그리고
윤동주 외 17명의 시인이 쓰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한 편의 시를 만나는 초여름 저녁,
시를 잊은 당신에게,
바람이 분다
미국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는 현대인의 고독한 삶의 단면을 그림으로 노래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1882년 7월 22일 뉴욕 주 어퍼나이액에서 태어나 1967년 5월 15일 뉴욕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사망하기까지, 양차대전을 겪은 미국 사회의 고독함과 절망감이 담긴 일상을, 시간을 초월한 듯하게 표현한 그의 그림을, 사람들은 사랑했다. 한편 같은 시절, 윤동주는 가혹한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따뜻하고 충만한 감성과 순결한 영혼으로 절망과 고난을 시로 노래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김영랑, 한용운, 박용철 등 시인들 모두 고단한 삶의 순간을 아름다운 시어로 승화시켰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그들의 시와 그림을 사랑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파리를 흔드는 저녁바람이』는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시리즈 중 6월편으로, 초여름에 어울리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윤동주, 백석, 김영랑, 정지용, 한용운 등 18명의 시인들의 초판본 시를 엮은 책이다. 손 안에 들어오는 크기의 작은 시집을 펼치면, 시 한 편과 그림 한 폭에 힘들었던 하루가 안개 걷히는 사라지는 듯하다. 한때 우리가 교과서에서 만났던 시인들의 시를, 다시 찬찬히 읽고 행간을 음미하다보면, 정신없는 일상에서 잠깐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재미도 감동도 관념도 없이 살았던 삶을 살고 있던 당신에게, 잠깐이나마 감미한 저녁바람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줄 시화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