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소개]
☞ 동아일보 2018년 4월 28일자 기사 바로가기
다른 사람의 삶의 질을 놓고 생사를 판단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가
죽음을 허용하는 것과 생명을 빼앗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저자 스캇 펙 박사의 ‘죽음론’
2018년 2월부터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 한국에서도 존엄사가 가능해졌다. 2009년 대법원이 이른바 ‘김할머니 사건’에 대해 존엄사 허용 결정을 내린 이후 8년이 걸린 법안 확정이다. 그리고 2개월 만에 3천 명이 넘는 환자가 존엄사를 선택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2018. 4. 7. 조선일보).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 존엄사 허용, 웰 다잉에 대한 관심 등, 이제 우리도 ‘죽음’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평생 동안 삶과 죽음의 의미를 탐색했던 스캇 펙 박사의 ‘죽음관’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원제: Denial of Soul)》를 개정 출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이자 신학자로서 인간의 본성을 의학적 차원과 영성의 측면에서 살펴온 그는 64세에 이르러 본인의 실존적 고민을 얹어 ‘죽음’의 의미를 살펴본다. 안락사, 존엄사, 자연사, 자살, 조력 자살 등 죽음의 면면을 통해 오히려 삶의 의미와 철학, 생명과 영혼의 불멸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 실행이 각자의 몫이 된 지금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 어떻게 볼 것인가
사람들은 왜 죽음을 스스로 앞당기려고 할까?
두려움 때문이다. 저자는 가장 먼저,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육체적·정서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지적한다. 여기에는 통증에 대한 적절한 처치를 하지 않는 의료계의 관행에도 큰 잘못이 있다(의료 환경과 현장에서의 관행, 의료인들의 고정관념 등이 1부에서 상세히 묘사된다).
다음으로,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로서 죽음에 대한 결정권을 자신이 갖고 있다고 믿는 신념의 만연함이다. 자살을 행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스스로에게 “내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내가 내 삶의 창조자니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도 있다고!”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창조자가 아니다. 우리는 장미꽃 한 송이조차 만들어낼 수 없는 존재들이다. 꽃을 가꾸고 관리할 수는 있지만 꽃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죽을 시간을 선택하고 자신의 통제 아래 깔끔하게 죽겠노라 결심한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저자는 ‘죽을 권리를 전적으로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의사와 가족, 신과도 그 권한을 공유할 것’을 주장한다.
저자는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흑백논리로 구분해 판결하지 않는다. 그 역시도 치유할 수 없는 죽음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의 수명을 과도한 조치로 연장시키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고 보지만, 다만 안락사 혹은 ‘필요한 경우의 안락사’로 이름 붙일 수 있는 행위에 대한 자유방임주의적 태도는 분명 지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환자의 요청에 따른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문제는 그들이 목적을 달성하게 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보다 훨씬 더 기계론적인, 영혼 없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 사회는 죽어가는 과정에 잠재된 어떤 영광도 사라진 사회, 사람들이 요청만 하면 간단히 잠들 수 있는 극단적으로 이성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본문 330쪽
저자는 안락사 논쟁에 대한 대안으로 ‘호스피스’ 간호에 대한 사회 전반적 인식 확대를 제안한다. 실제로 ‘호스피스 간호를 손쉽게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안락사의 권리도 열렬히 지지할 것’이라고 강변하면서, 의사에 의한 조력 자살 문제의 해답도 역시 호스피스의 확대임을 주장한다.
호스피스는 자택 간호와 함께 되도록이면 환자가 집에서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주안점을 두되, 다만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경우 환자의 마지막 날을 위해 조용히 거주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육체적인 간호뿐만 아니라 정서적·심리적·정신적 간호를 제공하므로 환자의 입장에선 죽음의 준비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다는 기대가 가능하다. 출간 당시 미국인의 정서는 호스피스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대세였다 하는데, 현재 호스피스 이용률 15퍼센트라는 우리 상황을 감안하면 충분히 참고해볼 만한 부분이다.
호스피스에서는 간호가 우선순위에 있다.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치료는 그 다음이며 무엇보다 적절한 통증 완화가 간호의 기본이다. 호스피스의 목적은 치료를 통해 환자를 죽음에서 구해내거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간호를 통해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이게 해주는 것이다. ―본문 83쪽
■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아직도 가야 할 길》 外 연작에서 저자는 줄곧 외로움과 고통, 불완전함, 문제투성이의 삶을 어떻게 대면하고 극복해 나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나름의 해법을 제시했다.
이후 20여 년이 흘러 60대에 이른 그는 인간에게 주어진 나머지 문제, 즉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그동안 살아온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깊은 통찰과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인간이 죽음을 택하는 거의 모든 방식(살인, 자살, 안락사, 자연사에 이르기까지)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죽음 해부학을 펼쳐 보인다. 그것을 들여다보는 매개체는 ‘안락사’지만 그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영혼과 그 영혼이 가진 가치와 아름다움이다. 즉, 안락사라는 문제에 대면한 순간, 인간이란 존재에게 영혼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함축하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까지도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지 않고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는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성숙해진다. 그들은 일생 동안 회피해온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죽음에 이른 순간, 임종 시의 고백과 대화는 가능할 것 같지 않던 용서와 화해를 이루며 커다란 성장을 불러온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매우 진실해진다.
삶이 그렇듯 죽음 또한 영혼의 성장을 위한 배움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저자는, 늙고 죽는 과정에 수반되는 생존적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행위는 스스로 그 배움의 길을 막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신학자로서 영성의 면을 강조하는 책의 후반부는, 죽음의 시간을 결정할 때 가족과 의사뿐만 아니라 하나님과도 그 권한을 공유할 것을 간곡히 권한다. ‘죽음’이 주제가 된 종교적 탐구는 죽음뿐 아니라 삶에 대한 위대한 진실을 들여다보게 하기 때문이다.
안락사는 결국 영혼의 성장과 학습의 기회를 차단하는 일이다. 안락사를 선택함으로써 바로 인간 존재의 의미 그 자체를 부정해버리기 때문이다. 안락사를 선택하는 사람은 존재의 이유를 애써 회피하려고 한다. 실상 안락사는 신으로 향하는 길을 단절시킨다. ―본문 225쪽
■ 죽음에 대처하는 자세
‘연명의료결정법’ 공포 이후, 한국 사회에서도 윤리적·신학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연명치료보다는 생명 연장을 하지 않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병원에는 사전의료의향서가 비치되고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관한 의견도 분분하다. 고령화, 빈곤화와 맞물려 이 시대의 ‘잘 죽는 법’은 나와 내 주변, 가족이 당면한 문제임이 분명해졌다.
1997년에 출간된 이 책의 문제 인식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가 되는 것은, 살면서 당연히 겪는 생존적 고통과 직면하기보다는 쉬운 길을 택할 권리/자유를 추종하는 것을 사회가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있는 상황의 유사성 때문이다. 사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그것에 승복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더 옳아서가 아니라 더 쉬워서 그렇다. 하지만 누구나 삶의 고통을 말끔하게 끊어낼 방법은 없다. 인간의 조건이란, 종종 우리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가 의지를 지닌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스캇 펙은 자신이 경험한 숱한 사례들을 통해, 죽어가는 것으로부터 배움의 문제를 일깨우고 인생의 역경에 맞설 용기를 불러일으키기를 희망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마지막에 던지는 질문을 우리 또한 절실히 반문해봄 직하다.
진정으로 큰 문제는 우리 사회가 안락사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갈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영혼과 영혼의 성장을 독려하는 사회를 원하는가의 여부다. 거의 모든 안락사 논쟁의 복합성은 결국 간단한 질문 하나로 해결될 수 있다.
“우리는 영혼과 영혼의 성장을 독려하는 사회를 원하는가?” ―본문 3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