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최전선에서, 환자들의 목숨을 떠메고 병원 곳곳을 뛰어다니는 의사들의 기록. 의사들이 펜을 들었다. 언뜻, 냉정해 보이는 의사들이 기록한 환자들과의 가슴 먹먹했던 순간, 남몰래 눈물지어야 했던 사연,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가슴 철렁했던 사건. 그 시간을 통해 환자의 마음까지 읽어 내는 의사로 성장해 가는 이야기들이 담겼다.
"무언가와 싸워야 할 이유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사람도 있다. 지구별은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은 틀렸다." (p.251)
첫문장
나는 피부과 의사다. 20년 전에 피부과를 시작해서 계속 대학병원 근무만 했고 어느덧 지천명의 나이다.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펜을 든 의사들
의사는 누구보다 아픈 이들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죽음을 거치면서 점차 그에 무뎌지고, 때로는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공감 능력까지 잃은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의사들이 펜을 들었다. 때론 억울한 죽음 앞에 고통스러운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때론 그 환자를 잊지 않기 위해, 때론 더 섬세한 마음으로 아픔을 바라보기 위해…….
사건을 기록하고 사람을 기억하면서, 점차 환자의 마음까지 읽어 낼 수 있기를 소망하는 의사들의 이야기를 한 권에 담았다.
―누군가의 죽음을 소재로 글을 쓰기가 고민되어 펜 들기를 주저했다. 고인의 숭고한 죽음을 모독하거나, 내가 모르는 그 삶의 의미를 훼손하거나 폄하시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섬세하게 바라보며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강한 충동이 밀려왔다. 어쩌면 그건 내가 잠시 잊고 살았던 삶의 의미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p.45)
의사가 만난 사건, 사람들의 이야기
의사들은 병원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어떤 마음의 변화를 겪었을까?
손에 사마귀가 주렁주렁 달린 환자가 내심 다른 의사에게 갔으면 했던 피부과 의사 이야기, 중환자실 한가운데서 울음을 터뜨렸던 어떤 인턴의 다짐, 병원비를 낼 돈이 없는 환자를 밤중에 몰래 병원에서 탈출시켰던 작전, 진료 중 갑작스레 환자에게서 받았던 공격, 환자의 엑스레이 사진에서 수술 중 사용했던 거즈가 발견되었던 아찔했던 사건, 오진으로 환자 앞에서 쩔쩔맸던 일 등…….
병원에서 환자들과 함께하는 의사들의 솔직한 에피소드, 때로는 묵직한 사연,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다시금 돌이켜 보게 만드는 이야기들.
―어느 날 할아버지는 기관절개관을 자신의 손으로 막고 나에게 말했다. “의사 양반! 내 다리 찾아 줘. 어디다 숨겨 놓지 말고 이제 찾아 줘. 나 이제 다 나아서 내 다리로 집에 가야 혀…….”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하고 이 상황을 피해야 할지. 할아버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나의 입을 똑바로 쳐다보며, 내가 지금이라도 당신의 두 다리를 가져다주겠다는 말만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할머니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가득 맺혔다. (p.268)
의료계의 신춘문예 ‘한미수필문학상’ 여섯 번째 작품집
제15회, 제16회, 제17회의 한미수필문학상 수상작 40편이 실려 있다. 의약분업이 한창이던 2000년, 환자와 의사 간 신뢰관계 회복을 위해 탄생한 한미수필문학상은 매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며 성장해 왔다. 이번 작품집은 정호승 시인을 비롯한 심사위원들로부터 “우리가 사는 세계가 날로 궁핍해져 가고 있으나, 그럴수록 누군가는 온기를 불어넣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인간의 존엄을 지켜 짐승으로 굴러떨어지고 마는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응모작들은 모두 따뜻하기 이를 데 없다. 만만치 않은 심사였으나 줄곧 훈훈했던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을 게다.”는 극찬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