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적 성 ‘여성’(female)에서 자신이 원하는 성 '남성'(male)으로 성전환을 한 세 남자, FTM(Female to Male)들의 이야기이다. ‘성적소수문화 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에서 1년여 동안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토대로 만들었다. 세 주인공의 각기 다른 성전환 배경을 인터뷰를 통해 풀어내며, 성적소수자들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거둘 것을 제안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성’이란 것은 늘 고민하고 의심해야 하는 것이지만 ‘남성성’에 대해서만큼은 물음표가 생략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다른 성정체성으로,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FTM들은 우리에게, 질문이 사라진 남성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자신들의 이야기(성전환, 성정체성을 확신하게 된 계기, 수술과 욕망)를 솔직하게 들려준다.
제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옥랑문화상을 수상한 다큐멘터리 「3×FTM」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트랜스젠더라면 하리수밖에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여자로 성전환 하는 사람들 말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놀라움을 안겨주기도 하고 저도 모르게 행해 왔던 차별적 언어와 행동들을 반성하게 하기도 한다.
성전환자라고 밝히기 전에는 그냥 일반 남성과 다를 바 하나 없어 보이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도대체 우리가 남자와 여자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여전히 우리에게 성적소수자들은 낯설고 이질적이기 때문에 이 다큐멘터리는 불편하고, 이를 책으로 엮은 다큐멘터리 북 『3×FTM : 세 성전환 남성의 이야기』도 따라서 불편하다.
세 성전환 남성들은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손을 내밀었다. 세 성전환 남성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성을 구분짓는 근거란 것이 얼마나 허황되고 아이러니한가’이다. 그러나 이성애자와 비성전환자가 대다수인 사회에서 그 구분을 무시하는 것은 역시나 어려운 일이기에 우리는 아직도 성별란이 ‘남’과 ‘여’밖에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개개인에게 있어 ‘차이’가 바로 정체성의 근거가 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선을 그어 차이를 구분하고 그 차이가 없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들이 편안함을 느끼는 ‘정상성’이라는 것을 부여한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성은, 남들과 같고 특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고, 주어진 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남자와 여자만 있고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남자가 되고 싶은 여자,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 외에도 몸은 남자인데 성정체성은 여자라서 남자를 사랑하는 자신을 이성애자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몸은 여자인데 성정체성은 남자라서 남자를 사랑하는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큐멘터리 북 『3×FTM : 세 성전환 남성의 이야기』는 생물학적 성 ‘여성’(female)에서 자신이 원하는 성 '남성'(male)으로 성전환을 한 세 남자, FTM(Female to Male)들의 이야기이다. ‘성적소수문화 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에서 1년여 동안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토대로 만들어진 이 책은 세 주인공의 각기 다른 성전환 배경을 인터뷰를 통해 풀어내며, 독자들에게 성적소수자들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거둘 것을 조심스럽게 제안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성’이란 것은 늘 고민하고 의심해야 하는 것이지만 ‘남성성’에 대해서만큼은 물음표가 생략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다른 성정체성으로,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FTM들은 우리에게, 질문이 사라진 남성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자신들의 이야기(성전환, 성정체성을 확신하게 된 계기, 수술과 욕망)를 솔직하게 들려주고 있다.
“젠더매트릭스에 돌을 던져라!”
세 남자의 당당한 커밍아웃, 『3×FTM : 세 성전환 남성의 이야기』
우리는 삶을 얼마나 사랑할 수 있을까?
살면서 우리는 묻게 된다. 나는 타인을 얼마나 사랑할 수 있을까, 혹은 나를 얼마나 사랑할 수 있을까. 명품 옷으로 내 몸을 두르고, 금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비싼 식사로 위장을 달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방법일까? 삶의 진정성은 삭제되고, 많은 사람들이 좀더 아름다워지고, 좀더 날씬해지는 것이 자신의 삶에 충실한 것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욕망을 배반하고 사회의 욕망을 따르며 그것을 내면화한다. 주어진 대로 사는 삶이란 사회의 욕망을 체화하며 사는 삶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어진 대로, 사회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받아들여 사는 까닭에 우리는 자신이 바라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 낯설음을 견디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상상력을 부여하지 못하는 만큼, 타인의 삶에도 역시 더 많은 상상력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여기 펼쳐 놓은 FTM들의 삶이 고단한 이유이다.
FTM(Female To Male)은 생물학적 성인 ‘여성’(Female)에서 자신이 원하는 성인 ‘남성’(Male)으로 성을 바꾼 사람들이다. 주어진 삶의 궤도에 맞추어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보다 자신의 삶을 더 많이 사랑하지 않고서야 선택할 수 없는 그들의 ‘성전환’은 “삶을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이만큼!”이라고, 그야말로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대답과 같다.
살아 있기 위한 조건, 성전환
“우리 할머니 말씀따라 뭐만 하나 달고 태어났으면 이렇게 힘들게 살진 않아도 됐을 텐데.”(본문 p.90)
인생에서 진실로 불가피한 일이 몇 가지씩은 있게 마련이고, 어떤 이들은 그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다른 삶을 살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작용하는 중력은 남다르다. 가슴절제 수술을 마치고 가슴에 피가 차서 오래도록 고생해야 하는 물리적인 고통 외에도 자신이 트랜스젠더임을 밝히지 않는 것이 동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고뇌, 자신이 여성이었음을 아는 사람을 만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 병원에서 검사할 때마다 자신의 현재 신체와 자신이 원하는 성의 불일치함을 드러내야 하는 괴로움, 남자로서 살아가고 있지만 주민등록번호가 왜 2번으로 시작하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곤란함……. 매 순간마다 ‘이 사람이 내 몸이 여자인 걸 알아챘을까, 아닐까’를 고민하면서 식은땀 흘리며 사는 FTM들에게 세상은 다른 무게감을 갖는다.
가슴을 가리기 위해 입어야 했던 압박셔츠만큼이나 압박하는 세상과 사람들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FTM들에게 사람들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여자로 살았던 과거를 묻거나 왜 힘들게 굳이 남자로 사는 것을 선택했느냐를 묻는다. 이런 물음은 의도된 악의보다 생각없음이 차라리 더 많은 잔인함을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런 사람들의 무심함에 조금이라도 덜 상처받으며 살아가기 위해 자기들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 『3×FTM : 세 성전환 남성의 이야기』 속 세 주인공은 불완전함 혹은 불일치함을 불행이라 여기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익히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삶에 솔직하게 응대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남자의 사정 #1.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남자였어요.”
고종우 씨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남자였다고 말하는, 모기도 꼭 손으로 때려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천생 남자다. 서른이 될 때까지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인하지 못한 채 혼란 속에서 살아왔던 고종우 씨는 여자도 아니고, 레즈비언도 아닌 자신을 무어라 말해야 하는지 모른 채로 삼십 년을 살았다. 혼란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고종우 씨는 생의 나머지 시간들을 온전히 남자로 살고 싶어한다. 벼락을 맞고 ‘생리’라는 단어를 잊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여자로서의 모든 과거를 지우고자 하는 그는, 자신의 몸에 남아 있는 여성육체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배달일을 하며 수술비를 모으고 있다. 실리콘으로 된 남성성기보형물을 착용하고 잘 정도로 그는 남성육체에서 자신감을 느낀다.
그 남자의 사정 #2. “내 몸이 너무 싫어서 불 켜고 샤워도 못할 정도로 부대꼈어요.”
한무지 씨는 남자가 뭔지, 여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기를 남자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해야 남자로 보일지 몰라서 꼴마초처럼 행동했던 적도 있고, 대놓고 여자를 무시한 적도 있다. 그게 ‘남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랜스젠더 인권활동가로 살아가면서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에 대해 고민하게 되면서 보다 조심스러워졌다. 페니스에 대한 욕망이 과장되어 있음을 깨닫고 비성전환 남성의 육체가 의미없게 느껴지기까지 한다고 말하는 그는, ‘정말 다양한 형태의 존재들이 있는데 남자와 여자, 둘로 나누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 남자의 사정 #3. “남자가 되고 싶었다기보다는 남자가 되어야 했죠.”
2006년 호적상 성별변경을 마친 김명진 씨는 대한민국이 인정한 법적 남성이다. 페니스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나 일반적인 남성성에 대한 동경은 없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여자였던 까닭에, 입고 싶은 옷이 남자옷이었던 까닭에, 하고 싶은 행동이 남자답다고 불리는 것이었던 까닭에 남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민등록번호 1번으로 살아가고는 있지만, 자신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것 같다고 말하는 그가 그저 자신에게 편안한 방식으로 살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는 결코 적지만은 않았다. 회사에서는 고소를 당하고, 엄마는 더럽다고 말했고, 징병검사에 가서는 바지를 내려야 했다.
정말 솔직하게 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와 강인함이 필요하다. 생물학적 성에서 자신이 원하는 성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용기있는 세 남자에게 ‘성전환’은 살아 있기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보다시피 성전환을 하게 된 이유와 과정은 저마다 다르다. 성(性)을 바꾸어 생(生)을 살 수 있다면 기꺼이 그 고단함을 감내하며 살아가겠다는 FTM들은, ‘삶이 이토록 어려워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힘들게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만들어간다는 점에서는 참으로 솔직하고 용기있는 실천가들이다.
불편한 책, 다큐멘터리 북 『3×FTM : 세 성전환 남성의 이야기』
제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옥랑문화상을 수상한 다큐멘터리 「3×FTM」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트랜스젠더라면 하리수밖에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여자로 성전환 하는 사람들 말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놀라움을 안겨주기도 하고 저도 모르게 행해 왔던 차별적 언어와 행동들을 반성하게 하기도 한다. 성전환자라고 밝히기 전에는 그냥 일반 남성과 다를 바 하나 없어 보이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도대체 우리가 남자와 여자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여전히 우리에게 성적소수자들은 낯설고 이질적이기 때문에 이 다큐멘터리는 불편하고, 이를 책으로 엮은 다큐멘터리 북 『3×FTM : 세 성전환 남성의 이야기』도 따라서 불편하다.
2006년 12월, 성적소수문화 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에서는 다큐멘터리 「3×FTM」을 위한 인터뷰를 시작했다. 다큐멘터리에 다 담지 못한 1년 동안의 인터뷰를 따로 엮은 이 책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지점들을 친절하게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주인공들의 인터뷰는 흥미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지만, 그들을 통해서 대면하게 되는 우리 사회의 일반화된 남성성과 여성성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다. 책의 마지막에는 우리가 왜 이 이야기에 불편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감독의 말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다큐멘터리의 시작부터 끝까지 제작의도를 엿볼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미 긍정적이다. “성전환 남성은 특정한 과거에 대한 열정적인 집착과 그에 못지않은 강도로 과거에 대해 억압하는 표현을 자주하곤 했는데, 그러한 화법은 마치 기존의 역사에 의문을 품지 않은 채, 유물만 발굴하고 있는 고고학자나 부족한 물증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메우려는 탐정을 연상시킬 정도였다(본문 p.199)”라고 솔직하게 자기의 감정을 밝히고 있는 감독은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이 왜 그렇게 언짢은 마음이 들었는지, 나중에는 그 불편함과 오해가 어떻게 해소되었는지를 담담하게 써내려가고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 김일란은 이 사람에 대한 오해가 또다른 사람과의 인터뷰에서 풀리기도 했던 자신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며 자신이 만나온 트랜스젠더들과 어떻게 실제적으로 소통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 소통의 증거를 보며, 이 작업을 통해 세 성전환 남성들이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손을 내민 것이었음을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혹시 여자로 보이진 않을까 그 불안과 긴장을 일평생 안고 살아왔는데 자신이 FTM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세세하고 내밀한 부분들까지도 모두 드러내는 것은 명동 한복판에서 벌거벗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세 남자에게 이 인터뷰는 또 한번의 커밍아웃인 셈이다.
새로운 성을 상상하자
▶우리에게 성(性)은 무엇이었던가?
성(性), 아직도 사람들은 성을 이야기하는 데 몸을 사린다. 도대체 우리에게 성은 무엇이던가? 성기가 있고, 일어서서 소변을 보면 남자인가? 십자수를 잘하면 여자인가? 누가 보더라도 ‘남자’인 것이 분명한 인터뷰이들을 기존의 잣대로 굳이 구분하자면, 그들은 ‘여자’이다. 따라서 본문의 세 성전환 남성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성을 구분짓는 근거란 것이 얼마나 허황되고 아이러니한가’이다. 그러나 이성애자와 비성전환자가 대다수인 사회에서 그 구분을 무시하는 것은 역시나 어려운 일이기에 우리는 아직도 성별란이 ‘남’과 ‘여’밖에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개개인에게 있어 ‘차이’가 바로 정체성의 근거가 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선을 그어 차이를 구분하고 그 차이가 없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들이 편안함을 느끼는 ‘정상성’이라는 것을 부여한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성은, 남들과 같고 특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고, 주어진 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남자와 여자만 있고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남자가 되고 싶은 여자,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 외에도 몸은 남자인데 성정체성은 여자라서 남자를 사랑하는 자신을 이성애자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몸은 여자인데 성정체성은 남자라서 남자를 사랑하는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물며 아이스크림도 수십 가지이다. 우리의 성이,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확률이 두 가지일 리 없다. 다시 한번 물어보자. 우리에게 성이란 건 정말이지, 무엇이었던가?
여성성은 늘 질문받고 의문시되지만, 그에 비해 남성성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져 질문받지 않는다. 이제 물음을 달리 하자. 남자란 무엇인가에서 무엇이 남자인가로. 여자란 무엇인가에서 무엇이 여자인가로. 한번쯤은 FTM들의 삶과 이야기를 통해 질문하지 않던 남성성에 대해, 혹은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여성성에 대해 물어볼 일이다. 저마다 희미하게나마 질문과 대답을 할 수 있다면 바로 거기에서부터 우리의 새로운, 그리고 조금은 이질적인 성 담론을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그로 인해 기존의 젠더매트릭스에 조금의 균열이라도 가할 수 있다면 자신을 기꺼이 드러낸 인터뷰이들의 용기에 화답하는 일이 될 테니 말이다.
▶우리 안의 N개의 성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약간은 건들건들하면서 투박한 걸음걸이, 낮은 목소리와 짧은 머리, 그리고 굵은 손마디. 그를 남자로 단정하는 것은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참으로 손쉽고 간편한 일이다. 타인의 성별을 판단하는 일은 그렇게 ‘표면적인’ 작업인 까닭이다. “나는 트랜스젠더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퀴어 퍼레이드에서 행진을 하기 전까지 그는, 우리에게 그저 한 명의 ‘남자’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히는 순간, 너무나도 평범했던 한 남자는 갑자기 외계인만큼이나 별나고 이질적인 존재로 둔갑한다. 멋진 남자의 모습이나 사회에서 남자만이 얻을 수 있는 우월적 권위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고시원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 먹으며 살더라도 그저 남자로 살기만 하면 그만인, 그러니까 너무나 일반적이고 평범해서 따로 말하기조차 뭣한,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성전환 남성들의 평범함은 ‘트랜스젠더’라는 한마디로 인해 한없이 특이해져 버리고 만다.
우리는 우리의 많은 시간을 타인에게 쏟는 까닭에 종종 타인의 삶을 ‘사건’으로 만든다. 너무나 쉽게 자신의 몸과 삶이 가십이 되어버리곤 하는 성적소수자들에게 따라서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닥치는 것, 견디는 것이 된다. 이들뿐 아니라 이 땅의 이주노동자들, 혼혈아동들이 눈물을 훔치며 살아가는 이유 역시 이질적 존재와 공존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고, 비슷한 것 사이에서만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의 지독한 관성 때문이다. 도무지 전복되지 않는 관성 탓에 오늘도 신체적·성적·인종적 변방의 사람들은 주변의 시선을 피해 울음을 참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성이란 것을 몸과 떼어 생각하기란 젠더이분법의 세례를 받고 자란 우리에게 몹시도 어려운 일이다. 징병검사에 간 그의 바지를 기어이 내리게 하고, 페니스도 없이 섹스는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하며, 어찌 보면 여자 같아 보이기도 하는 그의 젖꼭지를 유심히 관찰하기도 한 비성전환자 다수는 여전히 그들의 ‘몸’이 궁금하다. 짜여진 젠더매트릭스 안에서 다른 사고는 불가능하기에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상상력만큼의 수많은, ‘n개의 성’이 있음을 받아들일 때이기도 하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인간의 상상력은 꽤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하니까.
우리 안의 n개의 성을 상상하고 계발해 내는 일은 현재의 이성애중심사회에서는 ‘전복적’인 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기존의 성과 다른 성을 상상하는 일은 전복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상적’인 일이다. 한무지 씨가, 김명진 씨가, 그리고 고종우 씨가 우리가 생각하는 젠더프레임 바깥에 존재하긴 해도 그들의 젠더는 사실 너무나 평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영장에서 윗도리를 벗고, 몸이 드러날까봐 항상 입고 있는 조끼를 벗는 것. 남자로 보이는 것, 남자로 사는 것. 그들이 전복한 듯 보이는 젠더는 사실, 비성전환자에게나 전복일 뿐 그들에겐 그저 선택이고, 삶이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이고, 그들의 삶을 ‘사건’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