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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점] 서가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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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슬픔, 흥분과 무료함, 감탄과 환명이 뒤얽힌 유년 시절을 '시간'이 아닌, '기억' 의 순서에 따라 풀어낸 작품. 폭력과 죽음에 천착한 실험성 강한 중단편을 쓰던, 소위 선봉파의 대표 작가 위화가 1993년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이다.
이성의 논리를 거부하고 전통 사회의 도덕과 윤리를 전복하려던 선봉파의 주제 의식을 유지하면서도, 이후 위화가 선보일 새로운 작품 세계를 예고한 작품이다. 위화는 '진실'이 개인의 의식 속에만 있다며 일상생활의 경험과 질서를 부정하던 경향에서 벗어나, <가랑비 속의 외침>을 통해 다시금 일상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뒤얽힌 시간과 수많은 인물들의 사연 가운데서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주는 화자 쑨광린의 회상은 우리에게 유년의 기억이 결코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추잡하고 역겨운 어른들의 세계가 아이들의 세계를 서서히 잠식해 들어간다. 비 내리는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던 외침은 아무런 대답을 얻지 못하고, 아이는 절망 속에서 어른이 되어간다. : 위화의 소설은 끈적끈적하고, 거무튀튀하고, 때로는 붉다. 역사의 고난이 날줄이라면 가족사를 둘러싼 가난은 씨줄처럼 고통스런 삶을 구성한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이 '고발'의 양식이 아니라 '반성'의 양식이라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소설 속에 드문드문 풀어놓은 해학을 쫓아가노라면 불행이 묘하게도 희망으로 대체되는 광경을 자주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안도현 (시인) : 기억으로 관통된 소설
작품 전반에 걸쳐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가 깔려 있긴 하지만, 이 소설에는 또한 <인생>이나 <허삼관 매혈기> 등 이후의 작품들에서 만개한 위화 특유의 유머 감각, 즉 능청스런 풍자와 해학이 곳곳에 살아 있다. 특히 자신을 철두철미한 후레자식으로 만들어가던 아버지 쑨광차이가 인륜과 도덕을 무시한 채 저지르는 온갖 만행은 쑨광린의 유년에 그늘을 드리우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폭소를 자아내며 작품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또한 유년의 사건사고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에 대한 호기심, 또래 친구들과 저지른 충동적인 행동들 역시 방관자이기만 했던 쑨광린을 세상으로 바짝 끌어당기는 동시에 독자를 숨죽여 웃게 만든다. 밤마다 거듭되는 자위행위에 죄의식을 느끼던 쑨광린이 쑤위의 도움으로 광명을 되찾고, 몰래 누드 사진을 보며 여성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는 유쾌한 성장소설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