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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점] 서가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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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여름, 한 기독교단체의 초청으로 한국에 오게 된 호주 여학생이 또래의 십대 여공들을 만났다. 미싱을 돌리던 거친 손으로 밤이면 <테스>의 책장을 넘기던 여공들은 언젠가는 자기 글을 쓰고 싶어 했다. 이들의 문학적 열정에 매료된 저자 루스 배러클러프는 십 년 뒤 한국의 여공들에 대한 박사논문을 쓴다.
이 박사논문을 기반으로 한 이 책은 1920, 30년대 지식인들의 눈에 비친 여공들에서부터 1970, 80년대 직접 펜을 들어 자기 삶을 이야기했던 여공들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아우르며 페미니스트 역사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의 관점에서 '한국 여공의 계보학'을 완성해 냈다. 저자는 급속한 산업화의 외상을 간직한 존재로, 공장의 노동착취와 성폭력과 관련해 형성화된 이들 여공이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적) 여성성이 결핍된 존재이자, '쉬운' 존재로 형상화되어 온 과거 전통 속에서 어떻게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존재로 일어설 수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강경애, 석정남, 장남수부터 신경숙에 이르기까지 여성노동자들의 자전적 수기/소설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여공들의 실제 열망과 좌절을 읽어내고, 근대 한국사에서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와 동원, 이들의 주체화 과정의 역사를 다시 썼다. 한국어판 서문 9 : 여성 산업 노동자에 의한/대한 글쓰기는 그간 다양한 학문적 관심을 끌어 왔지만, 이 책은 다음 몇 가지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먼저 산업 문학, 노동 문학, 여성 글쓰기에 관한 서구 학계의 이론적 성과를 불러와, ‘여공 문학’ 논의에 새로운 지점들을 제공한다. 또한 1920, 30년대 식민지 시기와 1970, 80년대를 아우르면서, 여성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통념과 사회운동 담론, 문학적 개입, 재현의 문제와 글쓰기/글읽기의 의미를 긴 호흡으로 분석한 점에서도 귀중한 시도이다. 부제가 말해 주듯이 ‘섹슈얼리티’와 ‘폭력’이라는 렌즈를 통해 현실과 재현에서 여성 노동자가 통제되고 동원되는 복잡한 역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관점도 새로우며 큰 설득력을 가진다. 성ㆍ젠더ㆍ노동의 문제를 문학과 역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오랫동안 천착해 온 배러클러프 교수의 <여공 문학>이 한국에서도 신선한 자극이 되기를 기대한다. : 『여공 문학』은 여공을 ‘산업 역군,’ ‘급속한 산업화의 희생자,’ ‘계급 해방의 영웅’ 등으로 타자화하는 기존 서사와 과감히 절연하고, 여공이 허구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문학작품, 자전적 수기와 소설 등을 분석함으로써 여공을 둘러싼 급진적 재현의 정치를 개념화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 역사와 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전 지구적 산업화와 이에 착종된 성적 적대, 그리고 남성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법제도 사이에서 여공은 왜 모순적인 존재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명료하게 보여 준다. 이 책에 나타난 여공들은 추상적인 계급 모순의 수동적 담지자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동시대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여성다움, 안정, 가족, 지식과 예술 등에 대한 욕망을 추구했으며,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개인적, 집단적 선택을 내렸고, 그 실패에 좌절했으며, 무엇보다 중요하게는 서양 고전과 한국 문학을 탐독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했던 독자이며 작가였다. 예리한 페미니스트 역사학자가 쓴 한국 여공과 여공 문학에 관한 심도 깊은 연구서. : 믿을 만한 번역자들에 의해 이제야 한국에 소개되는 루스 배러클러프의 『여공 문학』에서 두 가지를 다시 배운다. 첫째, 여성 노동에 있어서 ‘노동’과 ‘성’(젠더/섹슈얼리티)은 전혀 별개의 범주가 아니라는 것. 『여공 문학』은 여성 노동이 곧 성폭력, 성차별, 성별 분업에 의해 규정되고 또 이를 감내하면서 이뤄져 왔다는 사실을 한국사의 가난하고 젊은 여성들을 통해 보여 준다. 둘째, ‘프롤레타리아의 밤’(랑시에르). 억압당하고 빼앗겼던 존재들이 스스로 읽고 쓴다. 인간됨을 외치기 위해 석정남과 장남수, 그리고 최근에는 김진숙과 그들의 친구들도 스스로 배우고 글을 썼다. 식민지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가난하고 존엄한 존재들이 써놓은, 또 그들에 대한 글들이 남아 있으니 그래도 한국 문학은 ‘다행’ 아닌가?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 조선일보 2017년 7월 6일자 '한줄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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