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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상무점] 서가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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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양 송천 마을에 사는 이옥남 할머니가 1987년부터 2018년까지 쓴 일기 가운데 151편을 묶어서 펴낸 책이다. 할머니는 어릴 적 글을 배우지 못했다. 아궁이 앞에 앉아 재 긁어서 '가' 자 써 보고 '나' 자 써 본 게 다인데, 잊지 않고 새겨 두고 있었다. 시집살이할 적엔 꿈도 못 꾸다가 남편 먼저 보내고 시어머니 보낸 뒤 도라지 캐서 장에 내다 팔고 그 돈으로 공책을 샀다. 글씨 좀 이쁘게 써 볼까 싶어 날마다 글자 연습한다고 쓰기 시작한 일기를 30년 남짓 썼고 지금도 쓰고 있다.
할머니는 아흔일곱 살이 되어도 뭣이든 들여다보고 있으면 신기하다. 그래서 할머니 눈으로 만난 새소리와 매미 소리, 백합꽃, 곡식마저도 새롭게 다가온다. 도시로 나가 사는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 작은 벌레 한 마리도 예사로 보지 않는 따뜻한 눈길…… 커다란 사건이 있는 게 아닌데도 다음 장이 궁금해진다. 다음 날엔 또 어떤 이야기가 있나 하는 마음으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한 사람의 삶에 푹 빠져든다. 자식들 이야기에서는 뭉클하기도 하고. 그래서 문득 어머니가 생각나 멈추게 된다. 한 사람의 지극한 이야기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또 어느 순간에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습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바라며 살아가지만 사실 우리 삶은 일하고, 밥 먹고, 자식 생각하며 그렇게 하루하루 사는 것이지 않을까. 참 평범하지만 소박한 일상이 주는 힘. 더구나 자연 속에서 평생을 한결같이 산 한 사람의 기록이 더할 나위 없이 맑고 깊다. 그래서 그 삶이 우리 삶을 위로해 준다.
: 손으로 만들어낸 진실, 그 충만함
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을 겪은 ‘양양 송천리’ 이옥남 할머니의 151편 ‘글자들’은 내 양손에 햇살을 움켜쥐는 듯한 따사로움을 준다. 손으로 만들어 낸 진실, 그 충만함. 나는 이 햇살을 오래오래 받았다. 자연과 생명을 귀하게 대하고 자식과 이웃을 정성스럽게 맞이하며 먼저 간 친구를 그리워하는 인간적이고 위선 없는 세계. 농사짓고 책 읽고 글자 쓰는 자신의 고유한 시공간을 품고 사는 할머니. 이 소박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세속의 욕망과 어그러진 관계로 가득한 현실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마저 갖게 한다. 한 편 한 편 애틋하고 뭉클하다. 그러다가도 웃음이 빵 터진다. 도토리를 “돌멩이 위에 놓고 망치로 때리는데 자꾸 뛰나가서 에유 씨팔 뛰나가긴 왜 자꾸 뛰나가너 하고 욕을 하고는 내가 웃었다” 하고 쓰신 일기에서는 나도 같이 웃었다. 할머니의 글 감각은 엄지 척! 한없이 고되지만 농사일을 해야 뿌듯해지고, 뉴스에서 나오는 안타까운 사고에는 눈물지으며 도울 방법을 찾고야 마는 이옥남 할머니. 어깨에 힘 하나 안 들인 글에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게 된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삶이 시가 된 글을 저도 읽게 해 주셔서요. : 백 살이 넘은 어느 수녀님의 일기와 자그마한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서 여전히 두 손으로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농부 할아버지와 아흔이 넘어서도 여전히 피아노를 치며 단정하게 하루하루를 꾸려 나가는 피아니스트 할머니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것은 좀 멀리 있는 이야기였고, 언젠가는 닮고 싶은 모습이었다. 그것이 내 엄마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걸, 할머니의 일기를 읽다가, 이제야 깨닫는다.
아흔일곱 이옥남 할머니의 일기에는 삶과 죽음과 강낭콩을 파는 일과 손주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경중이 없다. 여든 넘어 처음 사 본 믹서가 마냥 신기한 마음과 치매를 앓는 열네 살 아래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이 다르지 않고, 애써 꿰어 만든 삼태기를 마지못해 천 원에 팔고 돌아오는 속상한 마음이 몇 남지 않은 동네 친구가 떠난 뒤의 헛헛한 마음에 모자라지 않다. 고추를 말리고 감자를 썩히고 두부를 만들고 김을 매는 할머니의 하루에는, 그 자체로 할머니의 아흔일곱 인생이 온전히 들어 있다. 왜인지, 무용하게 지나 보낸 할머니의 어느 하루가 오히려 더없이 소중하게만 느껴지는 것을, 당신은 알까. 이옥남 할머니는 오늘도 마을회관을 둘러보고, 동네 친구분과 새침하게 다투고, 손주의 전화를 기다리고, 조금씩 아껴 가며 책을 읽고, 당신의 소중한 하루를 일기장에 기록하실 것이다. 당신의 그 하루가, 우리에겐 백 년의 지혜입니다.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 연합뉴스 2018년 8월 16일자 - 문화일보 2018년 8월 17일자 -
동아일보 2018년 8월 25일자 '책의 향기/밑줄 긋기' - 경향신문 2018년 8월 24일자 '책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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