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양심,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을 만화로 만나다. <만화 박정희> <만화 전두환>으로 거센 사회적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백무현 화백이 3년여의 작업 끝에 한국현대사의 산 증인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만화로 엮었다. <만화 김대중> 역시 앞의 저서와 마찬가지로 치밀한 자료조사와 철저한 고증을 거치는 등 역사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일제시대, 6.25, 초대 이승만 정권부터 이명박 정권에 이르는 한국현대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자취는 빼놓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을 누구나 알기 쉽게 하나로 엮은 책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만화 김대중>은 이러한 아쉬움을 해소해줄 것이다. 이 책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구성했다.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한겨레 - 한겨레 신문 2009년 9월 11일자
최근작 :<만화 김대중 1~3 세트 - 전3권> ,<만화 김대중 3> ,<만화 김대중 2> … 총 27종 (모두보기) 소개 :1964년 전라남도 여수에서 태어났다. 1988년 《평화신문》 창간과 함께 시사만평을 연재하기 시작하여, 《언론노보》, 《월간 말》, 《대학신문》, 《노동자신문》 등 진보적 매체에 작품을 연재했다. 1998년 국민의정부 때는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 시사만평을 연재했으며, 진보 단체인 전국시사만화작가회의를 조직하여 회장을 지냈다. 신문 노조위원장 출신으로 1996년 광주 전남언론노조협의회 의장을 지내는 등 언론 개혁 운동을 활발하게 벌이기도 했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 정치의 길에도 뛰어들었으나, 그는 평생을 시사만화가로 치열하게 살다 간 천생 만화가였다. 우리에게 수많은 역작을 남긴 그는, 안타깝게도 2016년 8월 15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펴낸 책에는 《만화로보는한국현대사》(전3권), 《언론, 딱 걸렸어》, 《만화 박정희》(전2권),《만화 전두환》(전2권),《만화 문재인》, 《박근혜는 아무도 못말려》, 《만화 정주영》(전2권), 《만화 노무현》(전2권) 등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을 만화로 만나다!
《만화 박정희》《만화 전두환》으로 거센 사회적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백무현 화백이 3년여의 작업 끝에 한국현대사의 산 증인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만화로 엮었다. 《만화 김대중》역시 앞의 저서와 마찬가지로 치밀한 자료조사와 철저한 고증을 거치는 등 역사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김대중. 그는 한국 현대사가 낳은 거목이었다. 그는 사회? 경제적 모순과 분단이라는 뼈아픈 민족의 현실에 맞서 자신의 정치관을 분명히 세우고 군부독재에 맞서다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했으나, 시대적 한계를 넘어 정권교체를 이뤄내어 ‘인동초(忍冬草)’로 각인되었다.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상징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순한 ‘유화정책’이 아니라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을 바탕으로 평화통일을 이뤄내자는 현실주의적 외교정책이었다. 지금도 6.15 정상회담은 남북한 동포의 가슴에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 세계는 김대중이란 이름을 독재에 항거한 민주화운동의 영웅이자 남북관계를 화해와 공존으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로 인식한다. 김대중. 그는 다름 아닌 ‘행동하는 양심’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국 현대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자취는 빼놓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을 알기 쉽게 하나로 엮은 책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만화 김대중》은 시대의창이 출간한 만화 인물 평전인 《만화 박정희》《만화 전두환》에 이은 완결편이다. 이 작품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과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면서도 객관성을 유지하고 사료적 가치가 있는 수준 높은 만화 인물 평전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역사는 발전한다”
후광(後廣) 김대중, 그의 개인사는 이 땅의 역사와 함께 질풍노도 그 자체였다. 일제식민지 치하의 유년 시절부터 좌우 대립, 분단, 남한 단독정부 수립, 한국전쟁, 이승만 독재, 4.19 혁명, 5.16 군사 쿠데타, 유신독재, 민주화 투쟁, 10.26 사태, 5.18 광주민주화항쟁, 6월항쟁, 정계 은퇴, 대통령 당선, IMF 사태 극복, 6.15 남북정상회담, 노벨 평화상 수상에 이르기까기 그의 인생은 격동의 대한민국 현대사를 그대로 축소해놓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은 나의 85회 생일이다. 돌아보면 파란만장의 일생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_故 김대중 전 대통령 <마지막 일기> 2009년 1월 6일자
《만화 김대중》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구성했다.
1권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태어난 하의도의 풍경이 펼쳐진다. 1623년 인조 임금이 정명공주가 혼인을 할 때 하의도 땅을 하사한다는 명을 내린 이후, 하의도의 농민들은 자신의 손으로 개간한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부당하게 2중으로 착취를 당하는 현실에 분개하여 300년 동안이나 농지탈환운동을 전개한다. 2009년 4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하의도 농민운동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해 “인생을 살아오면서 하의3도 농민의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굴하지 않고 투쟁해왔다고” 말한 바 있다. 하의도에서 보낸 유년 시절이 있었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시대의 모순에 굴하지 않는 ‘인동초’가 될 수 있었다.
겁쟁이였던 김대중의 어린 시절과 목포상고를 나와 해운사업으로 성공하고 6.25 전란 속에서 첫 번째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 정계에 입문하기까지 그의 행적이 고스란히 1권에 담겨 있다.
2권에서는 5.16군사 쿠데타를 통해 악연으로 만난 박정희 정권과의 투쟁을 담았다.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박정희와 맞섰던 1971년 대선, 유신헌법 선포 이후 국외에서 박정희 정권과 싸우다 일어난 김대중 납치사건 등 당시의 시대상황과 민주화 투쟁 과정을 생생히 묘사했다.
3권에서는 10.26으로 유신독재가 종말을 고한 후 찾아온 서울의 봄 그리고 또다시 반복되는 신군부 독재세력과 맞선 민주화 투쟁 과정 등을 담았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투옥되어 사형을 언도받기까지 희극과도 같았던 전두환 정권의 정치공작을 파헤쳤고, 김대중을 살리기 위한 전 세계적 구명 운동과 이후의 미국 망명지에서의 투쟁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4권에서는 6월항쟁에서 청와대에 입성하기까지 험난했던 과정을 되짚어봤다. 후보단일화에 성공하지 못한 채 맞았던 1987년 대선, 3당합당을 통해 군사정권과 손잡았던 김영삼과의 대결, 공안정국에서의 투쟁, 1992년 대선 패배 이후 정계은퇴, 이후 50년 만에 평화적 정권교체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그려냈다.
5권에서는 대통령 취임 이후의 삶을 조명했다. IMF구제금융 극복과 역사적인 6.15남북정상회담, 노벨 평화상 수상 등 그가 남긴 역사적인 업적들을 하나하나 되돌아봤다.
4권 소개
역사와 신을 믿으며 시대의 한계를 넘다
87년 직선제 개헌 투쟁부터 92년 정계 복귀까지
《만화 김대중》 전 5권 중 4번째로 <시대의 한계를 넘어> 편이다. 87년 직선제 개헌 투쟁부터 92년 정계 복귀까지 정치인 김대중의 행보를 추적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주요 사건을 단순히 나열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일어난 배경과 내막까지 자세하고 극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도 풍부하게 실려 이야기 흐름이 흥미롭고 긴박하다.
‘제2의 광주항쟁’ 막으려 대선 출마 포기 선언
김대중이 미국에서 돌아오자 전두환 정권은 곧바로 김대중을 가택연금한다. 그러나 김대중으로 상징되는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꺾진 못한다. 그것은 2?12 총선에서 여당(민한당)이 참패한 것으로 드러난다. 정권 위기를 느낀 전두환은 김대중, 김영삼을 중심으로 번져가는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무력과 갖은 음해 공작으로 막으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박종철, 이한열 죽음으로 중산층을 대변하는 ‘넥타이 부대’까지 거리로 뛰쳐나올 정도로 온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전두환은 6.29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인다. 6.29선언은 다른 누구보다 김대중에게 뜻깊은 사건이었다. 김대중이 대권 출마를 포기한 대가로 ‘제2의 광주항쟁’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6.3사태, 건대투쟁 등 시민들 저항이 날로 거세지자 전두환은 이전 버릇대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무력으로 국민들을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87년 대통령선거에서 직선제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도리어 불출마 선언을 했던 김대중이 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평생 경쟁자이자 동지였던 김대중과 김영삼은 등을 돌린다. 김대중은 말을 바꾸는 가벼운 사람으로 자신을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출마 이유를 설명한다.
“작년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하면 불출마한다고 한 것이지, 이번처럼 국민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진보진영을 비롯해 6월항쟁에 함께했던 시민들이 후보 단일화를 부르짖었지만 김대중, 김영삼은 각자 출마해 결국 노태우라는 군사정권이 다시 들어서고 만다. 이것은 지금도 민주화운동사에 큰 오점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다행히 4.26총선에선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정국을 만드는 데 성공, ‘1노 3김 시대’를 연다. 평민당이 제1야당이 되자 김대중은 광주항쟁 진상을 밝히고 5공화국 비리도 청산하는 청문회를 제안한다. 광주항쟁 피해자로도 출석한 김대중은 “당시 계엄령을 전국에 확대시킨 조치를 취한 것은 군부통치를 위한 정권 탈취의 목적에서였으며, 광주민주화운동은 소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일환으로 날조된 것”임을 강조한다. 청문회 성과는 미흡했지만, 청문회로 인해 전두환 친인척을 비롯해 5공화국 비리를 들추어내고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할 수 있었다.
3당 합당은 “국민을 배신하는 정치 쿠데타”
그러나 ‘1노 3김 시대’는 김영삼, 김종필이 노태우와 손을 잡으면서 끝난다. 노태우가 김대중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가 김영삼에게 다시 손을 내밀어 3당 합당을 추진한 이유는 의원내각제로 헌법을 바꾸어 정권을 연장하려는 속셈 때문이었다. 김대중은 합당은 “국민을 배신하는 정치 쿠데타”라며 끝까지 거부했다. 홀로 남은 김대중은 내각제 포기를 비롯해 지방자치제 실시, 보안사 해체 등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에 들어간다. 특히 그는 ‘미스터 지방자치’로 불릴 만큼 지방자치 실현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이런 끈질긴 노력 덕에 91년 3월과 6월에 30년 만에 처음으로 지방자치 선거가 실시된다.
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은 3당 합당 덕을 톡톡히 누린다. 노태우가 준 거액의 정치자금을 바탕으로 남한조선노동당 결성 사건 등 색깔논쟁과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여러 사건을 조작해 김대중을 압박해갔다. 김영삼은 심지어 질 경우를 대비해 한국 특수대원을 북한군 복장으로 위장시켜 휴전선 일대에서 총격 사건을 일으킬 계획까지 꾸몄다고 한다. 검.경찰, 교육계, 공공기관 등 노태우 정권이 암암리에 모두 김영삼을 지원하고 있는 사실을 드러낸 ‘부산초원복집 사건’이 터졌지만, 시민들은 지역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김영삼을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정계 은퇴 선언과 복귀
대선에서 패한 김대중은 정계 은퇴 선언을 하고는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에서 3학기 동안 공부한다. 이 시기에 민주주의와 통일 문제에 천착한다. 김대중은 동학사상을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로 보았고, 독일을 방문해 독일 학자들에게서 통일에 관한 조언도 들으며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통일을 고민하게 된다. 이때 구상한 것들을 실행하려고 귀국 직후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한 것이다.
때마침 제8차 특사교환 실무접촉에서 북측 단장 박영수가 ‘서울 피바다’ 발언을 하면서 남북은 일촉즉발의 전쟁 상황에 놓인다. 김대중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만남을 제안하고 성사시켜 전쟁 직전에서 한반도를 구해낸다. 이것을 시작으로 정계 복귀를 조금씩 준비하다가 마침내 7월 13일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로 정계 복귀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92년 대선 패배 이후 2년 7개월 만의 일이었다.
5권 소개
역사는 발전한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
제15대 대통령선거부터 2009년 8월 서거까지
《만화 김대중》 전 5권 중 마지막으로 <역사는 발전한다> 편이다. 제15대 대통령선거 즈음부터 2009년 8월 서거할 때까지 ‘인동초’가 만개한 인생 후반부를 다루고 있다. 죽음 직전까지도 ‘행동하는 양심’을 부르짖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김대중의 마지막을 돌아볼 수 있다. 김대중은 칠순이 넘어 기어이 꿈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꿈꾸는 자들에게, 평생 역사와 신앙을 굳건히 믿고 나아갔다는 점에서 다른 세계를 꿈꾸는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IMF 졸업’ 선언 그러나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들
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은 신한국당 이회창과 맞선다. 이회창은 두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이 걸림돌이 되어 지지율이 떨어지자 공작을 편다. 김대중이 비자금을 갖고 있다는 핵폭탄을 거듭 터뜨린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에서도 역사는 김대중 편이었다. 김대중은 50년 만에 처음으로 수평적인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루며 제15대 대통령이 된다.
청와대에 입성한 김대중의 급선무는 IMF사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IMF사태로 한국 사회는 근간이 뒤흔들리는 혼란에 빠진다. 30년 압축 성장 과정에서 생긴 온갖 병폐도 드러났다. IMF체제 1년 반 만인 1999년 12월 21일 ‘IMF 졸업’ 선언을 할 정도로 김대중은 경제를 살리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부실한 기업과 금융기관들을 정리하고, 한국통신?가스공사 등 공기업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더욱이 해외 채권단이 요구한 노동유연화 정책으로 노동자들이 쉽게 해고되고, 불안한 ‘비정규직’으로 몰리게 되었다. 서울역 지하도에는 노숙자가 들끓고,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이 자살하는 일도 속출했다.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 현상도 서서히 굳어졌다. 자신을 지지했던 노동자 계급과 중산층 노동자들을 이런 상황으로 몰아넣었으므로, 이 시기 김대중의 고통도 컸다.
북한 땅을 처음 밟은 대통령
김대중은 재임 기간 중 경색된 남북관계를 푸는 데도 힘을 쏟았다. 현대 정주영 회장이 처음으로 판문점을 거쳐 북한으로 가면서 남북관계에 숨통이 트인다. 그것을 시작으로 2000년 6월 13일에 김대중이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직접 방문해, 남북은 봄을 맞는다. 김대중이 김정일 국방위 위원장과 합의해 선언한 ‘6.15 남북공동선언’은 기본적으로 “한반도 문제는 한반도 사람들끼리 해결하자”는 데 동의하고 있다. 이런 활동의 공로로 김대중은 2000년에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그러나 임기 말년에 막내아들 홍걸이 연루된 ‘최규선 게이트’, 측근 권노갑이 연루된 ‘진승현 게이트’ 등 친인척과 측근들이 저지른 비리로 도덕적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퇴임 후 이전처럼 공부에 매진하던 김대중은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노무현 영결식장에서 권양숙 여사를 붙잡고 오열하던 그의 모습은 많은 이를 울렸다. 그해 6월 11일에 6.15 남북정상회담 9주년 특별강연에서 그는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며 현 정권의 잘못된 것들에 맞서 싸울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것이 김대중의 마지막 연설이자 ‘정치적 유언’이 되고 말았다. 2009년 8월 18일 지병으로 영면했다. 향년 8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