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의원 1주기 추모집이다. 제1장은 월간 『인물과사상』에서 진행한 노회찬 의원과의 인터뷰 모음이다. ‘노회찬과 삼성 X파일’은 2013년 4월호, ‘노회찬과 노무현’은 2009년 7월호, ‘노회찬과 진보정치’는 2005년 6월호에 실린 인터뷰다.
제2장은 강수돌 고려대학교 교수, 우석훈 경제학자, 김종대 정의당 국회의원이 노회찬 의원을 회고하며 쓴 글을 묶었다. 제3장은 노회찬 의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비교섭단체 대표로 연설한 글을 묶었다. 여기에 손석희 JTBC 앵커의 글과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고문의 글을 덧붙였다. 노회찬은 떠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노회찬을 보내지 않았다. 어쩌면 노회찬 의원이 꿈꾸는 정치와 세상은 지금 대한민국 모든 사람의 몫으로 남아 있다.
프롤로그 : 노회찬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 손석희 … 7
제1장 노회찬을 만나다 : 인터뷰
노회찬과 삼성 X파일 / 노회찬 ․ 홍아미 … 15
노회찬과 노무현 / 노회찬 ․ 김현진 ․ 지강유철 … 47
노회찬과 진보정치 / 노회찬 ․ 지승호 … 85
제2장 노회찬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평생 노동자로 살다 / 강수돌 … 123
학번과 학벌 없이 살던 내 친구 / 우석훈 … 141
정의로운 정치인 / 김종대 … 154
제3장 노회찬이 꿈꾸는 세상
정의를 실현하는 국회를 만듭시다 … 173
공정하고 평등한 대한민국 … 194
정의롭고 공정한 정치 … 211
에필로그 : 가난한 사람을 위한 민주주의 / 이대근 …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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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2004년 전태일문학상 최근작 :<노회찬6411> ,<[큰글자도서] 우리가 꿈꾸는 나라 >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 총 32종 (모두보기) SNS :http://twitter.com/hcroh 소개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 1979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고, 1980년 5월의 광주를 보며 노동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1983년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을 따고 서울, 부천, 인천 등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며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1987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창립을 주도하고,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백기완 선거대책본부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 후 진보정당추진위원회와 진보정치연합 대표, 『매일노동뉴스』 발행인, 국민승리21 정책기획위원장, 민주노동당 부대표와 사무총장을 거쳐 2004년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진보신당 상임공동대표와 상임대표를 지냈으며, 2012년 서울 노원병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12년부터 2013년까지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를 역임하고, 2016년 경남 창원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정의당 원내대표를 역임했다.
평생 진보정치의 길을 걸으며 노동자와 농민 등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해왔다. 2005년 삼성에서 떡값을 받은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하고 거대 권력에 맞서서 한국 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을 해왔다. 호주제폐지법, 장애인차별금지법, 정리해고제한법 발의 등 서민 보호를 위한 입법 활동에 앞장섰으며, 사법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2018년 12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하고, 2019년 5월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이해 제정된 ‘프라이드 어워드’의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지은 책으로는 『노회찬, 함께 꾸는 꿈』, 『노회찬의 진심』, 『우리가 꿈꾸는 나라』, 『노회찬과 삼성 X파일』, 『나를 기소하라』, 『힘내라 진달래』,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등이 있고, 함께 지은 책으로는 『노유진의 할 말은 합시다』, 『생각해봤어?』,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등이 있다. 2018년 7월 23일 영면했다.
최근작 :<장기려 평전>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사랑하며 춤추라> … 총 8종 (모두보기) 소개 :신학대학 종교음악과에서 지휘를 공부하고 성가대 지휘자와 청년 교역자로 살았다. 교단장 금권 선거, ‘옷 로비 사건’, 교회 직원의 인권 문제에서 내부 고발을 피하지 않았고, 기독 시민단체 실무자로 담임목사 세습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개신교와 진보 월간지에서 전문 인터뷰어로 양심적 지식인을 만났고, 100주년기념교회 부설 양화진문화원에서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최근에는 우리 전통춤 승무와 괴테의 『파우스트』에 자극 받아 탄생한 예술 작품에 천착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요셉의 회상』, 『안티, 혹은 마이너』, 『장기려, 그 사람』이 있고, 『존 스토트, 우리의 친구』, 『교회 세습 반대의 풍경들』, 『백낙청 회화록』, 『신영복의 말과 글 만남』,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입니다-노회찬이 꿈꾸는 정치와 세상』 등을 공저했다.
최근작 :<함익병을 말한다> ,<의사라는 세계> ,<성시완의 음악이 흐르는 밤에> … 총 88종 (모두보기) 소개 :열심히 읽고 성의껏 듣는 것 외에는 별다른 재주가 없어 전업 인터뷰어로 살고자 하나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다. 20년 넘게 꾸준함 하나로 버티며 60권의 인터뷰 단행본을 냈다. 《홍혜걸을 말한다》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바이러스가 지나간 자리》 《공범들의 도시》(표창원)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강신주) 《닥치고 정치》(김어준) 《신해철의 쾌변독설》 《괜찮다, 다 괜찮다》(공지영) 외 다수의 책이 있다.
최근작 :<김철과 한국의 사회민주주의> ,<기후 위기 시대, 슬기로운 경제 수업>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 … 총 117종 (모두보기) 소개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서 학사・석사 공부를 했고, 독일 브레멘대학교에서 노사관계 분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노동연구원을 거쳐 고려대에서 인사·조직·노사 분야를 가르쳤다.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독일 베를린대학교, 스웨덴 칼스타드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 연구했으며, 조치원 신안리 마을 이장도 했다.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선 ‘교육-노동-경제-생태’ 문제를 패키지로 풀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산다.
저서로는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 『잘 산다는 것』, 『살림의 경제학』, 『자본주의와 노사관계』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더 나은 세상을 여는 대안 경영』, 『파국이 온다』 등이 있다.
최근작 :<12개 렌즈로 보는 남북관계>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 총 9종 (모두보기) 소개 :우석대학교 국방정책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경향신문 편집국장 및 논설고문,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 자문위원, 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북한군사 문제를 넘어 한반도 평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로는 『북한 군부는 왜 쿠데타를 하지 않나』, 『김정은 시대 조선로동당』(공저), 『북한군사문제의 재조명』(공저), 『북한의 당·국가기구·군대』(공저) 등이 있다.
노회찬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 시대의 양심은 서민들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제가 할 일은 한국 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2019년 7월 23일은 고(故) 노회찬 의원의 1주기다. 노회찬 의원은 평생 진보정치의 길을 걸으며 노동자와 농민 등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2005년 삼성에서 떡값을 받은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하고, 거대 권력에 맞서기도 했다. 그는 “제가 할 일은 분명합니다. 거대 권력에 과감하게 맞서서 한국 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 즉 제도와 정책을 바로 세우고 진보정당이 온전히 자기 역할을 하게끔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호주제폐지법, 장애인차별금지법, 정리해고제한법 발의 등 서민 보호를 위해 앞장섰으며, 사법개혁을 위해서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가 설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8년 7월 23일, 신촌 세브란스병원에는 수많은 조문객이 찾아왔다. 7월의 폭염 속에서도 조문객들은 노회찬 의원의 서거를 애도했다.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과 미안함, 그의 빈자리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범벅이 되어 조문객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끝을 알 수 없는 슬픔의 바다였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지역에 상관없이, 해외에서도 조문을 왔다. 누구나 평등하고 존중하면서, 반칙과 특권이 사라진 나라를 만들자는 노회찬 의원의 강렬한 메시지는 많은 사람을 움직였다. 노회찬 의원의 죽음은 사랑과 연민을 일깨우는 큰 울림이었고,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전선에 참여하라는 소집 명령서였다.
노회찬 의원은 각 시대마다 시대의 양심이라는 게 있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과연 이 시대의 양심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양심은 무엇보다도 IMF 외환위기 이후 지속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고도성장 속에서 희생만 강요당한 노동자와 농민 등 서민들의 편에 서는 게 시대의 양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서열과 차별이 없고, 교육·취직·결혼·출산에 걱정이 없는 나라, 차별이 없는 나라,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 연주하는 나라를 꿈꾸었다. 이제 성장 타령 그만하고 분배에 신경 쓰는 ‘노동 존중 사회’, ‘선진 복지국가’,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를 꿈꾸었다. 그것만이 노동자와 서민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7월 27일 영결식에서 “약자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민주주의의 가능성 하나를 상실했다”고 애통해했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노회찬 의원님,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항상 시대를 선구했고 진보정치의 상징이었습니다. 못 가진 자, 없는 자, 슬픈 자, 억압받는 자 편에 늘 서야 한다 생각했던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국회 청소 노동자들은 노회찬 의원을 추모하며 끝까지 운구 행렬을 지켰다. 노회찬 의원은 노동자의 영원한 친구였다. 그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정치 조직을 위해 쓰려고 아껴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민주주의’라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떠났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국회는 노회찬이라는 큰 자산을 잃어버렸다. 모두가 기득권의 손익계산서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죽비처럼 내려치는 목소리가 사라진 것은 정치의 건강을 지키는 백신이 사라진 것과 같다. 노회찬 의원이 아니라면 앞으로 누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교도소 재소자의 인권을 부르짖을 것이며, 누가 국회 특수활동비를 비롯한 기득권 폐지를 외칠 것이고, 누가 기득권자들의 교만한 논리를 분쇄할 것인가?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손석희 JTBC 앵커는 “정치인 노회찬은 노동운동가 노회찬과 같은 사람이었고, 또한 정치인 노회찬은 휴머니스트로서의 자연인 노회찬과도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또 “자신의 신념과 원칙, 방향성을 한 번도 잃지 않고 지켜”온 사람이면서 동시에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다고 믿어지는 정치인”이라고 말했다.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은 “삶의 진정성으로 국민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노회찬 의원을 평가했다. 황광우 전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은 “노회찬 의원은 소외받는 노동자의 해방을 애타게 갈구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입으로만 사회주의를 외치는 분들과 달리 그는 정녕 사회주의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실천했”다고 말했다. 노회찬 의원은 “기득권을 포기하자”고 외친 정의로운 정치인이었다. 노회찬 의원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발의한 법안은 2018년 7월 5일 ‘국회 특수활동비 폐지’였다. 그는 마지막 법안을 발의하면서 “국회 특수활동비는 기밀사항과는 상관없는 활동비, 출장비, 의전비, 진행 경비 등으로 특수활동비가 ‘쌈짓돈’처럼 사용되었다”고 주장했다.
노회찬 의원은 노동자와 서민의 정치가이기를 원했고, 진보정당은 대중과 함께하기 위해 한없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 잘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조차 보기 위해 ‘하방(下方) 연대’를 실천해야 한다고 보았다. 정말로 자신을 낮은 곳으로 내려놓고 투명한 눈으로 세상을 보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그가 정작 필요한 때다. 기득권을 버리고 한없이 낮아지려고 했던 상선약수의 노회찬, 넘어지고 깨지면서도 또다시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간 칠전팔기의 노회찬, 온갖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위트와 해학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킨 촌철살인의 노회찬. 그렇게 하고도 바보처럼 빙그레 웃던 노회찬이 무척 그립다.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입니다』는 노회찬 의원 1주기 추모집이다. 제1장은 월간 『인물과사상』에서 진행한 노회찬 의원과의 인터뷰 모음이다. ‘노회찬과 삼성 X파일’은 2013년 4월호, ‘노회찬과 노무현’은 2009년 7월호, ‘노회찬과 진보정치’는 2005년 6월호에 실린 인터뷰다. 제2장은 강수돌 고려대학교 교수, 우석훈 경제학자, 김종대 정의당 국회의원이 노회찬 의원을 회고하며 쓴 글을 묶었다. 제3장은 노회찬 의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비교섭단체 대표로 연설한 글을 묶었다. 여기에 손석희 JTBC 앵커의 글과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고문의 글을 덧붙였다. 노회찬은 떠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노회찬을 보내지 않았다. 어쩌면 노회찬 의원이 꿈꾸는 정치와 세상은 지금 대한민국 모든 사람의 몫으로 남아 있다.
노회찬을 만나다 : 노회찬과의 인터뷰
2005년 8월 18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삼성 X파일 녹취록을 입수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개원과 동시에 삼성에서 뇌물을 받은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2013년 2월 14일 대법원은 ‘삼성 X파일’을 폭로한 노회찬 의원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판결에 대해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까지 한목소리로 성토했다. 17대 국회 때도 삼성 X파일 문제에 대해 국회의원들의 입장은 비슷했다. ‘다시 있어서는 안 될 거대 권력들의 대형 비리 부정 사건이다.’ 당시 천정배 법무부 장관은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부정 사건이다’라고 규정했다. 당시 국회의원 90퍼센트 이상인 280명 이상이 ‘공개되지 않은 나머지 삼성 X파일도 특별법을 설치해서라도 모두 공개해야 한다’는 법안을 공동발의했을 정도다.
이에 분개한 시민사회단체와 유권자들도 대대적인 사면 서명운동을 벌였다. 그것은 ‘용서를 바란다’는 의미의 사면 요구가 아니라 ‘노회찬은 무죄다’라는 명제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대법원에서 유죄를 확정 지었으니 대통령이 사면권을 행사해서라도 대법원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으라는 요구였다. 2012년 4월 총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는 이 사건을 홍보물에 알려 노회찬 후보를 뽑아서는 안 된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노회찬을 국회의원에 당선시켰다. 다시 말해 국민들이 무죄라고 심판한 것이다. 노회찬 의원은 삼성 X파일 녹취록을 공개할 때도 자기 자신에게 수십 번 질문을 했다고 한다. 후회하지 않을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지만 노회찬 의원은 배운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고, 국회의원이라면 당연히 공개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한국 사회는 충격과 깊은 슬픔에 빠졌다. 추모 행렬은 500만 명에 이르렀고, 봉하마을에도 100만 명이 내려갔다. 그만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주는 슬픔의 정도가 컸다는 의미다. 민주화 시대 이후 최대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죄책감에 시달렸다. 2008년의 촛불집회가 광우병 반대로 모이기는 했지만, 이명박 정부의 등장이나 통치 방식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깔려 있었다. 마찬가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문제의식과 분노가 깔려 있었다. 사실상의 국상(國喪)이었다. 촛불집회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반발이 기폭제가 된 사건이었다면, 추모 인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이 계기가 되었다. 이명박 정부가 일을 잘못 추진한 것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유사했다.
노회찬 의원은 국민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보내는 지지는 진보를 향한 열망이라고 보았다. 진보 진영의 문제의식에 따르면 진보 진영과 노무현은 차별화가 되어야 하는데, 그 차별화도 성공시키지 못했다. 국민들에게는 양쪽이 비슷해 보이는데 한쪽은 현실을 책임지고 있고, 한쪽은 책임감이나 책임질 권한도 없었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서민 대통령이었는데, 서민 대통령은 좋은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서민 대통령이라면 노무현이든 누구든 좋다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만으로도 역사의 진전이다. 그래서 노무현 정신이 현실의 정책으로 실현되게 하는 게 남은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2004년 총선에서 노회찬 의원은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민주노동당 원내 진출 1년 후 노회찬 의원은 한국 정치사에서 큰 족적을 남기는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진보정당 특유의 진취적인 기상과 서민정당으로서 정책 내용을 갈고 다듬어 빠른 시일 내에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는 정책정당, 뭔가 국민들로 하여금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서민정당으로 확실하게 우뚝 설 거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는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에 걸맞은 새로운 정책 활동이나 정치 형태를 좀더 공세적이고 적극적으로 펼쳐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이고,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서민정당이라는 이미지에 의해서 지지율을 유지해가는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의석수는 10석이고 의석 점유율도 3.3퍼센트밖에 되지 않지만, 민주노동당이 대변하고 있는 정책들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율은 30~40퍼센트다. 다시 말해 상당수의 국민들이 민주노동당을 통해서 대변되고 있는 정책들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정책정당으로서 정책 이념상의 정치를 하기를 요구하고 있고, 시대도 그것을 바라고 있다. 그렇지 못하면 한국 정치의 발전을 바라는 많은 국민을 크게 실망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한국 정치는 조직 형식과 정치 이념이 일치하는 방향으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조응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역사의 발전이며, 정치의 발전이라는 것이다.
노회찬은 정의로운 정치인이다
강수돌은 1996년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에서 강의할 적에 노회찬 의원과 김문수 의원을 만났던 때를 기억한다. 그 수강생 중에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은 1970~1980년대 거물급 노동운동가였지만, 김문수는 더는 옛날의 이념이나 운동 방식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보고 보수적 현실 정치와 손을 잡았다. 반면, 노회찬은 오히려 그럴수록 서민과 사회적 약자에 애정을 갖는 진보적 현실 정치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노회찬은 1982년 노동운동을 위해 대학생 신분을 포기하고 노동자 신분으로 ‘존재 이전’을 한 후 “사회변혁을 위해서는 노동자가 되어 평생 노동자로 살아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노회찬 의원은 인민노련 창립 이후 약 20년 동안 진보정당 운동에 매진했다. 진보정당 운동이 녹록지 않았지만, 노회찬 의원은 마음이 부서져도 새롭게 열리며 또다시 일어났다. 그는 노동자의 영원한 친구이자, 희망이 아이콘이 되었다.
우석훈은 노회찬 의원이 늘 명랑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라고 회고한다. 노회찬 의원은 기회가 날 때마다 사람들을 웃을 수 있게 해주려고 했다. 그것이 ‘삼겹살 불판’ 같은 촌철살인의 언어가 되었다. 그러면서 노회찬 의원은 학번과 학벌 없이 살던 친구라고 말했다. 진보 진영 내에도 학벌과 위계가 있을까? 그러면 안 된다고 머릿속으로 생각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소개할 때 제일 먼저 학교부터 소개하고 학번 소개하는 방식으로 서로를 인지한다. 그러나 노회찬 의원은 누구와도 친구가 되고, 누구의 손이라도 덥석 잡아주고 힘내라고 말했다. 노회찬 의원은 선배와 후배를 원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친구를 원했던 것 같다. 국회의원 노회찬, 운동 선배 노회찬, 진보정당의 창업자 노회찬 같은 딱딱하고 위계 넘치는 표현보다는 그냥 ‘사람들을 잘 웃겼던 친구’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종대 의원은 노회찬 의원을 회고하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아직도 너무 생생한 노회찬 의원의 죽음을 담담하게 회고하기에는 1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 노회찬 의원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노회찬 의원의 부재는 상실이자 고통이었다. 2018년 9월, 노회찬 의원이 없는 국회가 열렸다. 노회찬 의원의 자리는 김종대 의원의 바로 뒷자리였다. 원내 대변인인 김종대 의원은 본회의장에서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질 때마다 호기심이 많은 어린아이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그날도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지만, 노회찬 의원은 없었다. 머리로는 노회찬 의원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지난 2년간 몸에 밴 습관은 아직도 그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 표결 상황이 표기되는 전광판에도 노회찬의 이름은 없었고, 명패도 없어 본회의장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정치적 고아가 되고 말았다고 고백한다.
노회찬이 꿈꾸는 정치와 세상
노회찬 의원은 사법부의 개혁을 염원했다. 사법부를 상징하는 정의의 여신 디케는 한 손에는 저울, 한 속에는 칼을 들고 있지만, 대한민국 정의의 여신상은 한 손에는 전화기, 한 손에는 돈다발을 들고 있다고 말했다. “전직 부장검사가 전화 두 통으로 서민들이 평생 벌어도 못 벌 돈을 벌어들이는 전관예우의 법정에서 과연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합니까? 만 명만 평등할 뿐입니다. 여기에 정의가 어디 있습니까?” 한국 사회의 모든 이해, 갈등, 다툼이 멈추는 현장이 되어야 할 사법부가 오히려 갈등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사법부는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온 국민의 우환 덩어리다.
노회찬 의원은 자영업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도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시장만큼 낙수효과 이론이 횡행한 곳도 없었다. 강자가 살아야 약자도 살 수 있다는 논리를 앞세우고 노동시장의 약자, 즉 노동자를 보호하던 제도들이 후퇴하면서 노동시장에서 축출되거나 퇴각한 노동자들로 자영업 인구가 폭증했다. 그리하여 음식점 절반이 1년 내에 문을 닫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영업은 중산층 몰락의 현장이 되고 있다. 영세 자영업이 대자본의 갑질로부터 보호받고 공생할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노회찬 의원은 평등한 교육제도를 주장했다. 부모의 지위가 자식의 대학을 결정하고, 부모가 부유할수록 자녀의 대기업 취업률도 높아졌다. 가난하면 학업과 돈벌이를 같이해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경쟁이 불가능하다. 이제 교육은 부와 가난이 세습되고 승계되는 통로로 전락했다. 따라서 입시를 격화시키는 외고·국제고 등의 특목고와 자사고를 폐지하고 일반고로 전환해야 한다. 사실상의 고교 서열화와 중학교 서열화까지 부추기는 특목고·자사고 입시를 폐지해야 아이들은 물론, 부모들에게도 숨통이 트일 것이다.
노회찬 의원은 국민의 의지가 정치권력에 정확히 반영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주장했다. 다시 말해 국민의 지지가 국회 의석수에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국민의 사표를 방지함으로써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다양한 국민의 요구와 지향이 정치에도 정확히 반영되는 가장 선진적인 정치제도다. 승자독식과 지역 패권 정치를 연명시켜온 현행 소선거구 다수대표제를 그대로 둔다면, 민의가 왜곡되는 일이자 정치의 퇴행이다. 국회의원 선거제도는 국회의원이 되려는 사람들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국회의원에게 자신의 권력을 위임하고자 하는 국민들을 위한 제도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공정한 정치를 만드는 시작이며, 그 토대 위에 공정한 사회도 가능하다.
노회찬 의원은 재벌개혁도 주장했다. 한국 사회를 좌지우지하며 정경유착을 일삼아온 재벌은 효과적으로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될 괴물이 되었다. 따라서 재벌 총수들의 편법적 세습을 저지하고, 총수들의 지배력 집중을 해체해야 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산은 현재 10조 원에 육박한다. 이렇게 막대한 재산이 있는 이재용이 낸 세금은 고작 16억 원이 전부다. 과연 이 땅에 경제 정의라는 단어마저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이미 다수의 다른 재벌들도 이런 방법을 통해 세습 지배 구조 확립을 이루어낸 상태다. 이런 편법적 승계를 저지하고, 다른 재벌들이 이미 저지른 편법적 지배권 확립을 무효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