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건축서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의 저자 서현 교수가 조금은 독특한 책으로 돌아왔다. 이 책은 ‘건축에 대한’ 글쓰기 못지않게 ‘건축적’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고 밝혀온 저자의 숙원을 위해 잘 깔아놓은 멍석이다. 서문에서 밝히듯, 그는 건축 설계도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깨진 채 쌓인 벽돌도, 줄눈 안 맞게 붙여진 타일도, 구멍이 숭숭 난 콘크리트도 없는’ 문장으로 구축된 세계에 뛰어들었다.
개인 홈페이지에 연재한 서평을 엮어 <또 한 권의 벽돌>을 냈을 정도로 저자는 분야를 막론하고 어마어마한 독서량과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상상은 고전과 동화, 종교, 역사, 과학을 마구 넘나든다. 이 책에서 저자는 상상의 토대 위에 있되 지극히 현실적인 건축의 세계에 몸담아온 건축가로서 비로소 건축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어떤 제약도 개의치 않고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그 실험은 새로웠으며, 즐거운 작업이었다.
첫문장
문 닫고 좀 들어시죠.
이렇게 이야기한 것은 의사였다.
최근작 :<도시논객> ,<내 마음을 담은 집> ,<상상의 책꽂이> … 총 16종 (모두보기) 소개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건축을 묻다> <빨간 도시> <배흘림기둥의 고백> <또 한 권의 벽돌> <세모난 집 짓기> <상상의 책꽂이> <내 마음을 담은 집> 등의 저자이고 건축가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고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건축대학원을 졸업했다.
‘건축에 대한’ 글쓰기에서
‘건축적’ 글쓰기로!
멀게만 느껴지던 건축을 대중의 테두리 안으로 가져오는 데 기여한 인문 건축서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의 저자 서현 교수가 조금은 독특한 책으로 돌아왔다! 이 책은 ‘건축에 대한’ 글쓰기 못지않게 ‘건축적’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고 밝혀온 저자의 숙원을 위해 잘 깔아놓은 멍석이었던 셈이다. 서문에서 밝히듯, 그는 건축 설계도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깨진 채 쌓인 벽돌도, 줄눈 안 맞게 붙여진 타일도, 구멍이 숭숭 난 콘크리트도 없는’ 문장으로 구축된 세계에 뛰어들었다.
개인 홈페이지에 연재한 서평을 엮어 『또 한 권의 벽돌』 (효형출판, 2011) 을 냈을 정도로 저자는 분야를 막론하고 어마어마한 독서량과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상상은 고전과 동화, 종교, 역사, 과학을 마구 넘나든다. 책 제목이 ‘책꽂이’인 것도 이 책에 수록된 글의 팔 할이 지금까지 그가 섭렵한 책들의 어딘가에서 빚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가 내놓은 이 책 한 권이 또 누군가의 책꽂이 한 편에 자리할 것이기 때문이리라.
집요한 질문과 촘촘히 짜인 논리로 유명한 그의 글쓰기는 이 책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하지만 지금껏 논리적 글쓰기를 지향했던 서현 교수가 새롭게 시도한 상상은 뭔가 남다르다. ‘논리’와 ‘상상’이라는, 얼핏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이 둘의 조합은 이 책을 통해 저자만의 독자적인 창작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건축적 상상’, ‘논리적 상상’이라고나 할까? 그리하여 제목이 네 글자로 맞춰진 각각의 꼭지는 이 한 권의 책을 이루는 벽돌 하나로, 각 장(章)은 이 책의 구조 전체를 떠받치는 기둥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너는 얼마나 다른데.”
상상으로 집을 짓는 건축가가
자신의 상상력을 시험하다
이 책의 출발은 이렇다. 건축은 땅 위에 건물이라는 물리적인 실체를 짓는 작업이다. 따라서 건축에서 요구되는 상상은 비현실적인 공상 또는 망상과는 구별된다. 우리가 ‘상상’하면 흔히 떠올리는 ‘팔이 등에 붙은 인간’들을 위한 건물이 아닌 지극히 합리적이고 설득 가능한,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도면이 그려지고 현실에서 구현 가능한 상상이어야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저자는 공교롭게도 상상력이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인 건축과의 신입생들에게서 자주 이 능력의 부재를 목도한다. 그리고 그는 자문한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에서 저자는 상상의 토대 위에 있되 지극히 현실적인 건축의 세계에 몸담아온 건축가로서 비로소 건축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어떤 제약도 개의치 않고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그 실험은 새로웠으며, 즐거운 작업이었다.
단어, 문장, 이야기를
쌓고, 뒤집고, 비트는
정의 불가능한 상상 종합 세트
오랜 기간 다져진 인문학적 토양을 바탕으로 쓰인 그의 글은 결코 술술 읽히지 않는다. 그 소재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것이라 해도, 정작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 숨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요소가 돌발적으로 튀어나오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겹쳐지며, 짜 맞춰지기 때문이다.
이 한 편의 거대한 우화(寓話)는 일견 잘 알려진 일화나 사실에서 가져다 쓴 이야기의 나열로 보이지만 기존의 상식을 가차 없이 깨고 있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며, 전복적이다. 그의 글에서 어린 왕자는 구미호로 둔갑한 여우의 유혹을 이겨낸 예수의 모습으로 (「어린왕자」), 그 유명한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과학자 파블로프는 개가 침을 흘릴 때마다 종을 치려고 안달이 난 조건반사의 대상으로 역전된다. (「조건반사」) 그런가 하면 미녀의 대명사 백설공주는 눈·코·입을 죄다 뜯어고친 성형미인으로 (「백설공주」), 지극한 효녀 심청이는 악덕 파워블로거로 등장한다 (「컴맹탈출」). 이렇듯 이 책에서는 우리 머릿속에 고정되다시피 한 인물과 사건들이 쉴 새 없이 ‘둔갑’을 거듭하고, 새 옷을 갈아입는다.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시간과 공간, 등장인물의 성격과 입장만 살짝 바꾸어 놓았을 뿐이지만 쉽사리 떠올리기는 어려운 이 ‘역발상’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탁하고 무릎을 칠 수 밖에 없게 된다. 글 속에 숨겨진 각종 비유와 장치는 독자에게 숨은그림찾기나 퍼즐 맞추기를 하는 듯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처음에는 왜 이 이야기가 불쑥 끼어들었는지 모르겠다 싶다가도, 그리 길지 않은 각 꼭지를 찬찬히 읽다 보면 전체의 윤곽이 비로소 눈앞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빨간 도시』의 저자가 적나라하게 펼치는
‘웃픈’ 한국 사회의 민낯
건축을 사회학적 시각으로 바라본 전작 『빨간 도시』 (효형출판, 2014) 에서와 같이, 저자는 건축과 사회의 관계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연구해왔다. ‘건축 사회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의 독특한 관점은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주로 우화나 패러디의 형식으로 낱낱이 까발려지는 한국 사회의 민낯을 저자는 그만의 필치로 그려내는 데 거침이 없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지만 누구도 쉽게 해결할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고질적 병폐를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펼쳐내는 그의 입담에 우리는 통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한편, 현실을 부인할 수만은 없는 씁쓸한 마음에 쉽사리 얼굴을 붉히고 말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 그대로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블랙 코미디의 향연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을 살피다 보면 북한의 김정은 체제,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과 G20 정상회담 등 최근의 국내 현안과 잊히지 않는 사건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속물적 행태, 정·재계의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 더 나아가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이 줄줄이 딸려 나온다. 저자는 소위 ‘역사적 가정’과 때로는 SF를 방불케 하는 ‘우의(寓意)적’ 기법을 자주 구사하는데,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때가 지금 같다면 어떨까 가정해보는 데서 비롯된 상상, 아니면 『이솝우화』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연상시키는, 사실상 동물의 탈을 쓴 인간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특히 대한민국 전반의 상상력 부재를 꼬집는 맥락에서 경쟁 위주의 입시 교육을 비꼬는가 하면 (「신사임당」), 새털같이 어린 목숨들이 물속에 그대로 가라앉는 순간 앞에서도 냉혹한 본색을 드러낸, 차마 ‘호모사피엔스’로 분류할 수 없는 인간 군상을 고발하기도 한다 (「사피엔스」).
이처럼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한 일부의 인간들에게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저자는, 한편 이와 정반대의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연민의 눈길을 보낸다. ‘최저시급을 최적시급으로 알아듣는’ 이기적인 어른들에게 고용되어 도로 위에서 위험천만한 질주를 할 수밖에 없는 어린 ‘알바생’들 (「오토바이」), 세월호 사건을 목전에 두고도 엉뚱한 상상을 끄적이며 ‘허튼소리’나 하는 자신을 책망하는 목소리까지 (「맺는말 - 꿈과 꽃」), 이 책의 근간을 이루는 분노와 냉소가 다분한 풍자적 상상은 알고 보면 사회의 어두운 그늘과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에서 비롯되었다.
꿈이 사라져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바치는
한 권의 묵직한 충고
저자는 마지막 꼭지인 「꿈의해석」에서 말한다. 요즘 사람들이 꿈을 꾸지 않는 이유는 잠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오지 않는 잠을 술로 억지로 달래기 때문이라고. 이는 우리의 상상력 부재가 비단 ‘수면 부족’에서 왔다고 말하고자 함은 아닐 것이다. 프로이트의 역사적인 저작과 동일한 제목이면서도 말 그대로 꿈의 해석을 시도하는 이 재기발랄한 꼭지는, 상상력이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기능하는 건축계 종사자로서, 또 학생들의 상상력을 북돋워야 하는 선생으로서, 아직까지 기발한 생각들이 자라날 토양을 제대로 마련해주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현실과 대중의 인식 부족에 대한 안타까움이 암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이 탄생하게 된 본래의 계기와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의미심장한 마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