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겐지는 그의 주 작업인 소설만큼이나 에세이 집필에 있어서도 왕성한 필력을 보여준다. 애견이나 식물, 혹은 정원 가꾸기나 바이크 취미 등등 그의 삶에 밀접히 닿아 있는 다양한 주제로 여러 에세이집을 발표하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지난 과거를 세밀히 되새기며 전 생애를 기록한 자전 에세이를 썼다는 점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그는 앞으로 남은 나날을 작가라는 타이틀로 '더 치열히' 살기 위해선 중간적인 점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자신의 지난날을 정리하고자 쓰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산 자에게>는 가족과 학교라는 유년기의 현장에서 목격한 부조리, 그로 인한 방황과 삐딱한 시선의 성장기를 보낸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그토록 문학을 증오하던 자신이 어느덧 소설을 쓰는 청년으로 변화하게 된 과정과 까닭을 들려준다. 그리고 작가가 된 이후에 '괴짜' '기인'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산골로 들어가 주류 문단과 선을 긋고 살고 있는 이유도, 절절한 고백과 강한 어조의 비판을 번갈아 가며 독자들에게 설명한다.
생애 전반을 되돌아보는 마루야마 겐지 자전 에세이
마루야마 겐지는 그의 주 작업인 소설만큼이나 에세이 집필에 있어서도 왕성한 필력을 보여준다. 애견이나 식물, 혹은 정원 가꾸기나 바이크 취미 등등 그의 삶에 밀접히 닿아 있는 다양한 주제로 여러 에세이집을 발표하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지난 과거를 세밀히 되새기며 전 생애를 기록한 자전 에세이를 썼다는 점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그는 앞으로 남은 나날을 작가라는 타이틀로 ‘더 치열히’ 살기 위해선 중간적인 점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자신의 지난날을 정리하고자 쓰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산 자에게>는 가족과 학교라는 유년기의 현장에서 목격한 부조리, 그로 인한 방황과 삐딱한 시선의 성장기를 보낸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그토록 문학을 증오하던 자신이 어느덧 소설을 쓰는 청년으로 변화하게 된 과정과 까닭을 들려준다. 그리고 작가가 된 이후에 ‘괴짜’ ‘기인’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산골로 들어가 주류 문단과 선을 긋고 살고 있는 이유도, 절절한 고백과 강한 어조의 비판을 번갈아 가며 독자들에게 설명한다.
전 생애에 걸친 개인사를 가감 없이 드러낸
전무후무한 겐지의 자전 에세이
국내에도 적지 않은 팬을 가지고 있는 일본 문단의 기인 마루야마 겐지. 그는 본업인 소설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수많은 에세이를 통해 ‘기존 관습’ ‘기득권’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그의 고집을 글이라는 무기로 끊임없이 어필해 왔다. 다른 소설가들에 비해 에세이류의 집필에도 큰 애정과 열정을 보여준 마루야마 겐지는 그의 생활에 밀접히 닿아 있는 여러 소재거리를 한 권씩의 에세이에 담아 발표하곤 했다. 한때 오프로드 바이크에 빠져 삶의 희열을 경험했거나(《세계 폭주》), 그의 오랜 시골생활에 동반자로 지내온 애견을 이야기하고(《개와 웃다》), 정원을 가꾸며 느끼는 사계절 풍경을 그리거나(《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귀농을 꿈꾸는 이들을 향한 냉철한 시골생활의 직언(《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등등 그 주제 또한 다양했다.
그러나 《산 자에게》는 겐지의 다른 에세이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바로 그의 ‘자전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여태껏 그가 그토록 자전적 고백서를 피해왔던 이유는 본문에도 나와 있듯 “사소설 작가 취향의 자학적인 착색을 하지 않는, 싸구려 정서에 허우적대지 않는, 지극히 냉정한 방식으로” 글을 쓰고자 했던 작가로서의 신념 때문이었다. 지난한 과거를 읊으며 독자들에게 감성적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위험만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쉰여섯의 나이에 자신의 전 생애를 한 권으로 정리하는 자전 에세이를 썼다.
(이 책은 2000년에 일본에서 첫 출간되었으며, 국내에서는 2001년 《산 자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책은 본문 모두 새로운 번역과 편집으로 선보이는 완전 개정판이다)
과연 나는 가진 능력을 마음껏 다 쓸 수 있는 인생을 선택한 것일까. 사실은 가장 편한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닐까. 혹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낼지도 몰라서 다음 소설에 돌입하기 전에, 자전적이면서도 제대로 된 자서전과는 다른, 더구나 실수로라도 고백을 지향하거나 하지 않는 이 에세이를 쓰기로 했다. ……그러나 앞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이 과거에 뚫고 나온 50여 년과 마찬가지로 평온할지 어떨지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수 없다. 가장 예상확률이 높은 것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 전 생애에 걸쳐 소설을 써나갈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도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지금은 일흔이 넘은 노작가로 여전히 왕성히 집필 중이지만, 이 에세이를 썼던 쉰여섯의 마루야마 겐지는 아마도 당시 자신을 작가 인생의 중간 지점에 위치시켰던 것 같다. 분명 성실하게는 써왔으나 ‘혼이 해방될 만큼’ 극도의 전력투구를 보여주었는가 하는 질문에 이르면 대답을 할 수 없노라고 말한다.
남은 인생에서 능력의 임계점에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스스로를 만나기 위해서, 그는 그간 마음속 깊은 곳에 넣어두고 꺼내지 못한 자신의 과거를 토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렇게 전 생애를 가감 없이 정리하고 재정립하는 시간을 거쳐야만 남은 작가로서의 발전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 인생 재정리의 시간이 다름 아닌 《산 자에게》라는, 그의 자전 에세이로 탄생하였다.
“광기와 이성의 뜨개바늘로 차갑게 써나가겠다”
_ 겐지의 유년은 그의 문체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기존 소설가가 쓴 자전 에세이를 읽는 즐거움의 이유를 한 가지 꼽으라면 단연 “그의 소설 속 문체와 세계관이 어떻게 정립되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그는 유년의 기억과 특수한 상황들을 다시 한 번 꺼내어 봄으로써 과거와 화해하고, 이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봄으로써 작가 인생의 후반부를 좀 더 치열하고도 성공적으로 보내고자 열망한다.
겐지의 여타 소설과 산문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공통적으로 ‘저렇게까지 냉혹하게 일갈해야만 할까’ 하는 불편함을 잠시라도 느끼게 되곤 했다. 그의 시니컬하고도 현실 직시적인 세계관은 물론 그의 유년기 기억과도 무관하지 않다. 동네 장난꾸러기 친구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너네 부모님은 진짜 부모가 아니야”라고 던진 기억, 자신을 들여다보며 “너만 없었더라면”이라 말한 엄마의 모습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지금껏 헷갈린다고 그는 감정을 섞지 않은 채 차분히 적어간다.
‘황실의 높은 분’이 죽었으니 일제히 동경 쪽을 향해 절을 하라는 담임교사의 말에 교실을 박차고 뛰쳐나간 초등학생의 겐지에게는 이미 저항의 유전자가 몸속 깊이 박혀 있었을 것이다. 그는 비록 어릴 적의 경험이지만, 그날 교실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자신이 분노하는 대상이 무언지, 어떤 것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알아차렸노라 고백한다.
작가가 된 경위도 마찬가지다. 부엌에서 튀김 음식을 요리하던 어머니 얼굴에 기름불꽃이 튀어올라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자, 얼굴만 빠끔히 내밀던 아버지는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 TV에 시선을 집중했노라 말한다. 이토록 가정에서 보여준 모습이라고는 늘 문학 책만 읽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청소년기의 겐지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적대적인 대상은 다름 아닌 문학이었다. 그런 그가, 20대 초반 고단하고도 지루한 직장생활의 틈 속에서 어느새 원고지를 채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지나친 적대가 오히려 애증의 화살이 되어 마루야마 겐지의 인생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아쿠타가와상 수상과 함께 작가로 데뷔한 이후, 그는 주류문단의 어두운 아집과 가치관의 근본적 차이 등을 느끼며 위화감의 정점을 맛본다. 결국 ‘지리적으로라도 그들과 최대한 멀어지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고, 잘 알려졌다시피 일본의 북알프스라 불리는 고향 오오마치 산천에 둥지를 튼 채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도 그다지 가혹하지도 않은 현실로부터 어디까지나 눈을 돌리고, 별반 노력도 하지 않고 도망가, 간지러운 목소리로 내는, 선량한 척, 겉으로만, 주지는 않고 받기만 하는 상냥함에 어디까지나 연연하는 타입의 전형이었을까? 이러한 무리가 인생의 감동이 이렇다 저렇다 하며 말하고 쓰고 그럴 것 아닌가? 만일 어떻게든 소설을 계속 쓰고 싶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자기의 썩어빠진 근성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생생하게 써야 할 것이다. 그것도 사소설 작가 취향의 자학적인 착색을 하지 않는, 싸구려 정서에 허우적대지 않는, 지극히 냉정한 방식으로…….
“산 자로 살 것이냐, 죽은 자에 가까운 산 자로 살 것이냐”
_ 저항의 유전자로 가득한 겐지의 문장들
배가 부르면 정신이 맑지 못하다며 저녁식사를 거른 채 비타민과 물로 대신하고, 소설가로서의 각오를 다지기 위해 나이 쉰이 됐을 때부터 삭발을 유지해오고 있으며, 자신의 몸은 곧 글을 쓰는 펜이라 여기며 신체 단련에 힘쓰는 마루야마 겐지. 날카로운 혼을 유지하기 위한 그의 생활 방식은 그만이 겪었던 유년의 특수한 깨달음과 섞여, 곧 그가 쓰는 문장 하나하나에 그대로 투영된다.
이 책을 찾는 독자들이라면, 아마 처음엔 작가의 앞선 인생이 어땠는가가 궁금하여 이 자전 에세이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 읽고 난 후엔 겐지의 과거사보다는 그가 던지는 아프디아픈 돌직구와, 그 독설이 허튼 말장난으로 변질되지 않게 각오와 도전의 앞날을 살겠다는 치열한 각오에 머리가 숙여질 것이다.
본문 곳곳마다 밑줄을 긋게 되거나 노트에 필사를 하게끔 만드는 마루야마 겐지의 문장들…… 엉덩이를 걷어차이는 것 같은 아찔함을 던져주는 직언들…… “산 자로 살 것이냐, 죽은 자에 가까운 산 자로 살 것이냐” 하고 독자들에게 묻는 일흔이 넘은 노 작가는 지금도 날카로운 혼을 유지한 채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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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을 받을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언제나 이런 충고를 한다. 정에 얽매여 생각하면 부모 뜻대로 된다, 부모라는 존재는 상당히 뻔뻔스럽고 영악하니까 단지 부모라는 이유로 기세등등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원래 부모에게 은혜를 느낄 필요 따위 전혀 없다, 낳은 자가 키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진정한 애정을 가진 부모라면 아이의 자립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를 위한 투자나 보험 역할을 맡길 요량으로 아이를 낳고 키우는 부모는 부모가 아니다, 자신의 인생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 같은 참견을 하거나 행동에 나서거나 했을 경우에는 부모라 해도 망설일 필요 없이 잘라버리는 편이 좋다, 그 편이 최종적으로 쌍방 모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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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죽고 싶어 하는 예술가의 기분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고독하다는 둥 산고라는 둥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며 과장되게 고민하는 작가를 끈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그들에게 공감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많은 독자의 기분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기보다 이해할 가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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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기성 지식을 죽을 둥 살 둥 머리에 계속 쑤셔 넣어, 그 성적에만 의지해 세상의 각광을 받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자에게, 학교에 도시락만 가져가는 공격적인 지진아가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는 것이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도무지 수학공식에 들어맞지 않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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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도 과학도 철학도 의학도 종교도 정치 등등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은 일시적인 안심이나 위안 정도일 뿐이다. 인간을 구제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구제받지 못하는 부자유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야말로 자유를 격렬하게 추구하고, 싸우고, 그것을 추구할 때에 날아 흩어지는 불꽃이야말로 현실에 뿌리박은 참된 산 자의 감동이 아닐까. 구제받지 못하는 몸이기 때문이야말로 이 세상을 사는 힘과 가치가 생기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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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지금까지 봐오지 않았던 인간을 주시하고,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인간이 보이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살아온 보람이 있는 것이겠지. 그리고 장자를 능가하는 노인이 되어 폐에 들이마신 마지막 공기를 뱉어내는 순간까지, 인간으로서의 최상의 증거인 ‘언어’를 광기와 이성의 뜨개바늘을 구사하여 뜨겁게 차갑게 계속 짤 것이다. 그렇게 되고 싶다. 꼭 그렇게 되고 싶다고 염원하는 내가, 자신이 만든 화이트 정원의 한구석에 잠시 멈추어 서서 “누구야 너는?”이라고, 다른 누구도 아닐 터인 나를 향해서 묻고 있다. 그 대답이 지금부터 써나갈 다양한 종류의 소설 속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