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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점] 서가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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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382권. 2006년 무려 19년 만에 "너무 슬프고 너무 아름답다"는 평을 받은 두번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을 펴내며 문단에 신선한 감동과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후 다시 9년이라는 긴 시간 뒤에 선보이는 김사인 시인의 세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삶과 죽음의 갈피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여여(如如)하게, 또는 엄숙하게 수락하는' 겸허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대문자 시의 바깥에서 종용히 움직이는 미시(微詩)의 시학'을 펼쳐 보인다. 고향의 토속어와 일상언어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빼어난 언어감각과 정교하고 정감어린 묘사로 '생로병사의 슬픔 일체를 간절한 마음의 치열한 단정(端正)에 담아'낸 시편들이 나직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 이 시집의 첫 시, 그러니까 서시 격인 「달팽이」 마지막 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 안에서 달팽이는/천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귀가 죽고/귓속을 궁금해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오늘날 김소월은 시적으로 극복될 수 없다. 근대시 문법을 여는 듯 닫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정주는 극복될 수 없거나, 극복이 부질없다. 그의 시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근대 이전 정서가 언어의 처음을 입는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수영은 극복될 수 있고, 극복이 유의미하다. 그가 여전히 동시대인인 까닭이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혹시 본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김사인의 시는 그 점을 성취와 한계 양면에서 보여줘왔다. 느리지만, 참으로 끈질기게. 그만큼 생의 태도가 겸손한 사람을 찾기 힘들지만, 특히 이번 시집에서, 그의 시는 겸손하다기보다 생로병사의 슬픔 일체를 간절한 마음의 치열한 단정(端正)에 담아내는 식으로 김수영과 또다른 길을 내려는 야심이 만만하고, 단정은 그의 가장 튼튼하고 가장 미래지향적인, 그러니까 죽음에 이르는 미학이다. 아무렇게나 한구절, 이를테면 “비라도 오는 밤은 내 남은 혼/초분 위에 올라앉아 원숭이처럼/긴 꼬리 서러워 한번쯤 울어도 보리.”(「초분」)쯤을 중간역 삼아 이 시집을 다 읽고 다시 첫 시, 그러니까 서시 격인 「달팽이」로 돌아오면 마지막 연이 이렇게 끝난다. “네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더듬더듬/먼 길을.” 우리는 생로병사의 구조가 순환할수록 단정으로 아름다움의 슬픈 깊이를 더해가는 희귀한 현대 시집을 한권 얻었다.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 한겨레 신문 2015년 1월 8일자 - 중앙일보 2015년 2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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