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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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1990년 장편 『빨치산의 딸』로 작품활동 시작한 정지아 작가는 김유정문학상, 심훈문학대상, 이효석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작품으로는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등 소설집 외에 어린이용 위인전이나 일반 전기물도 다수 있다. 작가의 소설 속 캐릭터들은 디테일이 살아있어 마치 실존 인물처럼 느껴지고 사건은 실화처럼 여겨진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역시 그렇다. 한 인터뷰에서 정지아의 작품을 소설이 아닌 다큐로 읽는 독자들이 많다는 말에 작가는 “소설이라는 게 진실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이 책의 줄거리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찾아온 사람들을 통해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딸의 이야기다. 온갖 궂은일이나 보증으로 애를 먹어도 언제나 인간을 신뢰한 아버지. 그런 남편 때문에 눈물 마를 날 없는 어머니도 ‘유물론’ ‘사회주의’라는 단어 처방만으로도 서운함을 툭 털어버리는 구빨치산 출신이다. 구빨치 중에 살아 나온 자는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귀한 명줄을 타고난 아버지는 작은 세상에 촘촘한 그물망을 만들어 놓고 여든둘에 이승에서 해방됐다.

“의식을 잃은 아버지는 얼굴의 근육이 완전히 이완되어 편안하디편안한 모습이었다.”(p.198) 젊은 시절 무수한 죽음을 묵도해야만 했던 참혹함, ‘빨갱이’로 낙인찍혀 받아야 했던 모진 고문, 연좌제로 발이 묶인 일가친척들의 원망을 묵묵히 듣기만 했던 아버지.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아버지는 죽음을 통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딸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잊고 있던 어린 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p.231)이라고 딸은 뒤늦게 깨닫는다.

항꾼에 치르는 장례식은 슬픔보다는 정겨움이 넘친다. 전기고문으로 임신 불가 판정을 받은 아버지에게 기적처럼 태어난 아리는 외동이지만 외롭지 않다. 빨치산 시절 어머니 동료의 딸인 떡집 언니는 든든한 맏딸 역할을 하고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미리 준비한 선견지명이 있는 동식씨는 아들 역할을 한다. 장례식장을 떠올리면 엄숙하고 칙칙한 분위기가 연상되고 형식적인 조문으로 얼굴도장을 찍는 절차를 과히 달가워하지 독자라도 책 속 시끌벅적한 장례식이라면 거부감이 없을 것이다. 뼛속까지 유물론자였던 아버지 가시는 길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입을 통해 듣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뭉클한 감동으로 눈자위가 뜨끈해질 것이다.

“움켜쥔 손을 허공에 치켜들고 가만히 주먹을 풀었다. 바람은 일정하게 불지 않았다. 아버지의 유골은 이리로도 저리로도 날아가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는 바람만이 알겠지. 어디로 갔든 아버지의 유골은 어딘가 내려앉아 무언가의 거름이 될 것이었다.”(p.258)
웰빙보다는 웰다잉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이 문장의 여운이 오래 남을 것 같다. 전쟁과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어보지 못한 세대라도 이 책을 읽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부모의 이야기이면서 저마다 고통을 양어깨에 짊어지고 꿋꿋하게 때로는 위태롭게 버티는 삶을 살다가 누구라도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정 작가는 데뷔작 『빨치산의 딸』로 한국문학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32년간 축적된 그의 필력은 시대의 온기를 잔뜩 품고 있다. 역사를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사실과 허구를 섞어가며 자유자재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관록, 마지막 순간까지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마력으로 유감없이 대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작가 스스로 “체화되지 못한 이야기를 쓰지 못하는 소설가”라고 밝혔는데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통해 독자들은 역사와 가족,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다시 새기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20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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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과학분야쪽 책은 읽을 때 마음아프게 하는 책이 찐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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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을 읽을때 마음을 아프게 하는 책이 찐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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