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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위로
앤터니 스토 지음, 이순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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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억에는 없으나, 언젠가 어머니가 말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시절 어느 날 나는 수업이 한창인 교실에서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나를 발견한 담임 선생님은 방과 후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있냐는 담임 선생님의 물음에 어머니는 아마도 집안 사정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 집안 사정이란 동생이 어떤 사고로 인하여 병원에서 사경을 헤맸던 일을 말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는 나를 발견한 선생님도 참 대단하다. 그때는 초등학교 한 반에 50명이 넘는 학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중학교 시절 내가 죽은 이후 어떻게 되는지 종일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답을 찾지 못해 슬픔에 빠진 적이 있는데, 아마도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은 그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연인, 배우자, 가족, 학교 친구들, 회사 동료들, 출퇴근 북적거리는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 역 사람들, 은행과 병원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심지어 친한 사람들과 식사를 같이 하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내 주위에 사람들이 있음에도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이 아니라, 실상 혼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닐까. 


사람은 산모 뱃속에서 나올 때 홀로 태어나고, 죽음을 맞을 때에도 홀로 감당한다. 어느 누구도 나를 위해 나의 삶을 대신 살아가 주거나, 나의 죽음을 대신하여 죽어 줄 수 없다. 이것은 인간관계에 연연하여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굳이 거기서 행복과 위안을 찾을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오히려 인간관계에서 발생된 문제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실망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삶의 어디에서 견고한 행복과 위안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최근 나는 ≪고독의 위로≫라는 책을 입수했다. 인간관계에서 얻는 행복과 위안이란 불완전하다는 생각에 이를 즈음, 인터넷 서점에서 ‘고독’을 단어로 검색한 결과 이 책을 발견하고는 목차와 내용 미리보기를 통해 대충 줄거리를 파악했다. 괜찮은 책인 것 같아 소장을 결정하고 중고 서점을 통해 책을 손에 넣은 후 한 장 한 장 읽어내려 갔을 때, 카메라로 ‘인생 샷’을 건진 것 마냥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오! 이건 인생 책이다.’


글쓴이는 관련 분야의 전문가로서 영국인 정신분석학자이자 정신과 의사 앤서니 스토(Anthony Storr, 1920~2001)이다. 그는 학자이자 의사로서 각종 사례와 연구 결과를 통해 그의 주장을 입증한다. ≪고독의 위로≫는 그가 남긴 ≪Solitude(고독): A Return to the Self(자신으로 돌아옴)≫(1988)의 번역본이다. 전문 분야의 내용이 담겨 있음에도 번역이 깔끔하게 되어 있어서 고등학생들도 무난하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건강을 위해 태권도를 배우던 어머니가 근래에 킥복싱 학원에 등록했다. 이렇게 재미있는 운동은 처음이라며 나에게도 권했다. 한 번뿐인 인생, 의미 있고 즐거운 것에 집중하며 행복과 위안을 얻는 삶은 얼마나 귀하고 가치가 있는가. “만족스러운 인간관계를 맺었든 맺지 않았든 이렇게 다른 대상에 열정과 흥미를 쏟으면서 삶을 그야말로 가치 있게 만든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는 글쓴이의 말에 밑줄을 긋는다.


홀로 생각을 정리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즐겨 갖는 나에게 ≪고독의 위로≫는 이러한 나의 생활양식에 대한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 같다. 이제 글쓴이는 죽고 없지만, 그의 생각은 책을 통해 이렇게 살아서 나를 응원하고 위로하는 듯하다. 또한 유한한 단 한 번의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에 재미를 느끼며 열정을 쏟는 삶이란 얼마나 고귀하고 가치가 있는가. 나만의 가슴 뛰는 삶을 통해 스스로에게 감동하며 행복과 위안을 얻는 인생을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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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환 교수와 함께 걷다 : 블라디보스토크 - 러시아 한인이주 150주년 기념
박환 지음 / 아라(도서출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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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러시아의 도시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와 그 주변 도시를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마냥 경치 좋은 곳만 둘러보거나, 쉼을 위해 그곳을 다녀가자는 생각은 아니었다. 러시아 연해주[Примо́рский край]는 한인들이 살았던 곳이기에, 나는 그 장소들을 걸으면서 당시 한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유추해 보고 그분들을 마음으로 기리고 싶었다.


1860년대 초 이미 한인들은 연해주로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더욱 많은 한인들이 일본의 억압을 피해 연해주로 들어왔다. 그 중에는 효과적인 독립 전쟁을 위하여 연해주로 이동한 최재형 선생, 이동휘 선생 등과 같은 독립 운동가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한인들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우리나라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이 지속되고 확대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일본은 19204월 참변과 같은 학살을 자행하였고, 러시아 당국은 한인들의 자치권 획득을 막고자 1920년대 중반부터 계획한 한인 강제 이주를 1930년대부터 꾸준히 실행하면서 급기야 19379월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대규모 강제 이주를 시켰다.


이처럼 연해주는 일본으로부터의 탄압과 러시아로부터의 차별을 겪었던 한인들의 한 서린 장소였다. 나는 그 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를 방문하여 한인 사적지들을 둘러보고 싶었다. 답사 계획을 세우고자 관련 도서를 알아본 결과, 블라디보스토크와 그 주변 도시들의 명승지를 소개하는 관광 책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와중에 나는 제목과 같이 박환 교수와 함께 걷다 블라디보스토크라는 책을 발견했다. 이 책은 201431일 러시아 한인 이주 150주년을 기념하면서 도서출판 아라를 통해 간행된 것이다.


저자 박환은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살았던 한인들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그는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즉 이 책은 전문가가 쓴 것으로서 권위 있고 믿을만하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이 책은 반드시 전문인을 대상으로 하는 책은 아니었다. 꼭 전문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일반인이 쉽게 읽을 만하게끔 평이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중고등학생도 소화할 수 있을 내용이었다.


이 책에는 연해주 내 3개 도시 안에 있는 한인 사적지들이 소개되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와, 그 북쪽 도시인 우수리스크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시내 지역북부 지역동남부 지역, 그리고 두만강과 인접한 곳에 있는 도시 크라스키노(Краскино)에 있는 한인 사적지들이 그것이다.


최근 나는 이 책을 읽고, 여기에 소개된 한인 사적지를 답사하고자 직접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를 방문하였다. 주말과 공휴일, 그리고 휴가를 활용하여 45일간의 제한된 기간 동안 이 책에 서술된 한인 사적지 모두를 답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그 주요 장소를 둘러보면서 사적지를 확인하고, 그곳에서 살았던 한인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으로 기리어 보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처음 한인들이 이주하였던 해양공원, 디나모(Динамо) 경기장(Адмирала Фокина Улица 1) 입구 맞은편의 자매결연공원(Семёновская Улица 1-3) 모퉁이에 있는 <연해주 한인이주 150주년 기념비>, 한인들을 핍박한 바 있는 연해주 총독의 옛 관저(Светланская Улица 52), 19174월 이동휘 선생 등이 기독교 전도회를 구실로 조직적 운동을 하였던 푸쉬킨 극장(Пушкинская Улица 27),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 문학비(Аксаковская Улица 12А 건물 후원), 1937년 한인들을 강제 이주하기 위해 집합시켰던 혁명광장, 신한촌 입구(Комсомольская Улица 13), 서울거리 2A 가옥(Сеульская Улица 2А), 한민학교 터(Амурская Улица 7), <신한촌 항일운동 기념탑>(ХабаровскаяУлица 26б),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등을 갔다.


우수리스크에서는 라즈돌나야(Раздольная) 강변에 있는 이상설 선생 유허비, 최재형 선생 최후 거주지(Володарского 38), 1918613일~23일 전로한족 중앙총회 결성 장소(Горького Улица 20), 19204월 참변 추모비(Комарова Улица 1), 고려인 문화센터(Амурская Улица 63A), 우수리스크 기차역 등을 방문했다.


이 책은 연해주에서 거주하였던 한인들의 삶을, 그리고 항일 독립 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조금이나마 추적할 수 있는 좋은 도서이다. 다만 한인 사적지의 정확한 주소와 지도상에서 구체적으로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명확히 표기되지 않아서 이 책을 단서로 한인 유적지를 찾아 가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따른다. 이를 위해 미국의 Google 지도 서비스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이 책을 읽고 연해주를 답사하면서 안타까웠던 순간들을 서술하고자 한다. 서울거리 2A 가옥을 찾느라 헤매고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등 매우 번거로웠는데, 막상 그곳에 도착하고 보니 비포장도로에 주변은 창고들이 줄지어 있어서 마치 빈민가를 연상시켰다. 포석 조명희 문학비가 있는 곳에는 주변이 철창으로 둘러 닫혀있어 근접할 수 없었다. 신한촌 입구와 한민학교 터 등에는 이를 알려주는 어떤 표식이 없었다. 컨테이너 박스 같은 곳에서 홀로 <신한촌 항일운동 기념탑>을 지키는 리웨체슬라브 선생은 고려인으로서 200771일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된 바 있는데, 지금은 중풍을 앓아 오른손과 다리를 거의 쓸 수 없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위와 같은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한인 사적지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관심은 적어 보였다. 만일 러시아 소재 우리나라 유적지 보호를 위한 러시아 당국의 관심이 의무 사항이 아니라면, 우리나라 정부가 관심을 갖고 나서야 할 텐데, 우리나라 정부 차원의 대책과 지원도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살고 있는 한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무관심 속에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2017414일 주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의 <연해주 개황 및 블라디보스톡 약황>을 살펴보면, 2017년을 기준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사는 고려인의 수는 블라디보스토크 인구 1923,100명의 0.96%를 차지하는 약 18,000명으로 집계된다. 최소한 그곳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나라 정부가 러시아 당국과 적극적으로 교섭하여 한인 사적지를 보존보수하고, 누구나 그 유적지에 찾아갈 수 있도록 표식을 세우고,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을 지원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이 필요해 보인다.


2018. 0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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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안 - 라틴어 원전을 충실하게 완역한 탁월한 정본
보에티우스 지음, 이세운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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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9월 유관순(19021920) 열사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본 경찰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19871월 박종철(19651987) 열사도 서울 용산구 남영동의 치안본부 대공 분실에서 경찰 수사관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아벨은 신실한 삶을 살다가 들판에서 그의 형 가인에 의해 살해되었고, 남국 유다 제8대 임금 요아스의 재위 말년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도 직언하다가 성전 뜰에서 왕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처럼 양심과 정의에 따라 투철하게 살던 이가 어느 날 악한 마음을 품은 자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일들이 있다.


로마 사람으로서 행정장관으로 비견되는 콘술(Consul)을 역임한 철학자 보에티우스(Boethius, 475?~524?)도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약자들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자를 막기도 하였고, 한 왕실 관리인이 시도하던 악행을 무산시키기도 하였다. 기근이 들어 강제매입이 선포되었을 때 이에 반하다가 왕이 심문하는 자리에서 강하게 주장하여 그 시행을 취소시켰으며, 원로원 의원인 알비누스가 판결도 나기 전에 처벌받는 것을 막으려고 밀고자 퀴프리아누스의 공격을 대신 받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입법 기관 원로원을 변호하다가 무고(誣告)를 당하여 유배되었다. 동고트(Ostrogothi) 왕국의 통치자 테오도리쿠스(Theodoricus)가 알비누스에게 씌워진 반역죄를 원로원 전체에게 전가하였던 것이다. 원로원 의원 모두가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보에티우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의 무죄를 위해 변호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선행의 결실로, 밀고자가 원로원을 반역 죄인으로 만들 문서를 공개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는 것으로 고발을 당하고, 아무 심문절차 없이 멀리 유배지에 보내져 사형선고를 받았다.


어째서 양심과 정의에 따라 투철하게 살던 이의 결말이 이렇단 말인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을 섭리라고 부를진대, 선한 삶을 살던 이의 결국이 악한 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자연은 늘 어떠한 법칙을 따라 움직이고 있어서, 나무는 봄에 싹을 틔우고 가을에 낙엽을 떨구며, 땅에서 볼 때 하늘의 별들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우주에서 지구를 볼 때 태풍은 북반구에서 반시계방향으로 회전한다. 그러나 인간 양심에는 도덕률이라는 법칙이 관통하고 있음에도 인간은 양심을 따라 행하기도, 혹은 양심을 배반하여 행하기도 한단 말인가?

 

만약 정말로 

신이 있다면 악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신이 없다면 선은 어디서 오는가?

 

인간은 권선징악을 통하여 사회를 정화시키고자 분투하고, 도덕률은 그에 따라 사는 것을 인간에게 가르치고 있는데, 도덕률을 견지하던 이의 결국이 그와 같다면 도대체 권선징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곧 처형될 보에티우스는 위와 같은 외침으로써 권선징악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보에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 이제 가련한 대지를 돌아보시기를

자연의 법칙을 엮으시는 분이시여.


그토록 위대한 것들 중에서도 가치 있는 

우리 인간들은 

파도치는 바다로 인해 흔들립니다.


지배자시여

거친 파도를 억누르시고, 거대한 하늘을 지배하시는 

당신의 그 약속으로

땅도 또한 평온하게 지켜 주십시오.

 

보에티우스는 죽임을 당할 시점에 위와 같이 기원하기를, 한결같은 자연과 같이 인간 사회에서도 항상 평화가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여기서 확인되는 사실은, 자연은 그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반면, 인간은 그 양심을 지배하는 도덕률이 강조되고 있음에도 이를 따라 행할 것인지 아닌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여신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재정의(再定義)하였다.

 

그는 … 

그의 고삐에 의해 인도되고 

그의 정의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자유라 여기는 자다.

 

보에티우스는 자유에 대해서 재정의하기를, 문맥에 의거하여 철학을 통치하는 단 하나의 지도자곧 그의 정의를 따라 순종하는 것(이사야 1:19, 고린도전서 9:27)이라고 했다. 보에티우스는 만물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듯, 인간 또한 그 양심에 흐르는 도덕률을 따름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누릴 것을 권하고 있다.

 

생겨난 것은 그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은 채 머무르지 못한다.

이는 영원한 법을 통해 

굳게 자리 잡았으니.

 

자연에서의 법칙과 인간 사회에서의 도덕률을 아우르는 불변의 진리는 해 아래 새 것은 없다는 것(전도서 1:9), 즉 보에티우스가 말한 위의 시와 같이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변화한다는 것이다(히브리서 12:27). 꽃이 시들고 풀이 마르는 것처럼(이사야 40:8), 인간 또한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낮은 바위에 

굳건하게 집을 세워야 함을 기억하라.


바람이 

평온한 바다를 뒤집고 돌진하며 

천둥소리를 낸다 해도,


평온을 품은 벽의 힘으로 지어져 

행복한 너는

하늘의 화를 비웃으며 

즐거이 삶을 영위할 것이다.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나는 행복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가? 나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나는 죽음을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에 미련을 두면서, 내게 주어진 것들로 마냥 기뻐하며 이것이 행복인양 즐거워하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때로는 내게 주어진 것들이 상하거나 없어질까 두려워하며 염려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게 있던 것이 닳거나 사라짐으로 인하여 슬퍼하고 비통해한다. 하물며 선한 일을 하다가 피해를 입는다면 얼마나 당황하며 원망할까.


세월의 풍파가 내 삶을 뒤집으며 천둥소리를 낸다고 하여도, 그 때에 나는 이성과 철학으로부터 위로를 얻어 하늘의 화를 비웃을 수 있을까? 그 때에 나는 과연 평온한 마음이라도 유지할 수 있을까? 차라리 나에게는 그런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고백하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 아닐까? 내가 애초 적신(赤身)으로 세상에 나왔는데, 매순간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며 살 수만 있다면 다행이겠다.


2019. 03.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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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계를 생각하는 시간 - 노력해도 괴로운 당신을 위한 관계 심리학
에린 K. 레너드 지음, 박지선 옮김 / 빌리버튼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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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유행으로 인해 과거의 일상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종종 나는 홀로 여행을 떠나곤 했다. 일정을 세우고 카메라를 둘러메어 눈이 머무는 곳, 가슴을 뛰게 하는 것들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는다. 풍경이나 들꽃, 새와 같은 하나의 대상을 관찰하며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어차피 죽으면 그만인데 부질없는 짓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사진과 영상으로 담는 그 순간, 사색을 누리는 그 시간은 오히려 나에게 더 없이 소중한 찰나가 된다.


혼자 여행을 다닌다고 하더라도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기는 어렵다. 위험에 처했던 적도 있었으나, 감사하게도 친절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실 차나 먹을 것을 대접받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전통행사나 문화재를 촬영할 때면 담당자에게 청하여 관련 설명을 얻어 듣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어느 가정집에 초대되어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하며 며칠을 묵기도 하였다. 즐겁고 뜻깊은 여행을 위한다면 도중 만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소중하다. 삶도 하나의 여행이라면, 삶의 모든 짐을 내려놓는 순간까지 맺어지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기왕이면 즐겁고 뜻깊은 삶의 여행을 위하여 이 책을 집었다. 읽으면서 위로를 얻거나 해방감을 느끼기도 하였고,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도 있었다. 나의 인생 가운데 나를 괴롭게 했던 사람들이 생각났고, 내가 다른 사람을 괴롭게 했던 때도 떠올랐다. 사람마다 성격과 태도, 가치관 등이 다르기에 사람들과의 만남 가운데에는 성숙한 사람과 미성숙한 사람이 있고, 정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아동청소년 전문 박사 학위를 받고, 20년 넘게 다양한 사람들의 고민과 문제를 들으며 그들과 상담해 온 권위자이다.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을 독자가 타인의 정서적 성숙도를 파악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하였다.


저자는 정서적으로 여유가 있는 성숙한 사람과 정서적으로 여유가 없는 미성숙한 사람의 특징 및 그 내면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타인은 물론 본인이 정서적으로 얼마나 여유가 있는 사람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혹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인해 힘들어 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위로를 얻을 수 있다. 다만 글쓴이는 읽는 이가 미성숙한 사람이라면 상대방의 감정이나 관계 따위는 애초부터 신경을 쓰지 않아서, 이 책을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생각하건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상대방의 처지가 되어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길 원한다. 누구든지 타인으로부터 존중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부드러우면 삼키고 딱딱하면 뱉는 것[柔則茹之 剛則吐之]”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면, 상대방의 처지가 되어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은 끊임없이 연습되고 훈련되어야 한다. 학벌, 직업, 가정환경, 종교성 등 사람의 외모와 표면적 모습들은 인간 내면의 성숙도와 관련이 없다고 한 부분에서는 일말의 위안마저 느낀다.


정서적 친밀감을 이루는 공감과 책임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적용되나 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함께 울고 웃던 가족과 이웃들이 코로나19’로 인하여 고귀한 생명을 잃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는 가운데, 남은 이들은 자신과 타인을 지키기 위하여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자가격리에 힘쓰고 있다. 총선 다음날인 416일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세월호 6주기를 추모하는 글에서, 세월호의 아이들이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우리에게 공감사회적 책임을 유산으로 남겼다고 하였다. 함께 아파할 줄 아는 마음, 잘못을 시인할 줄 아는 용기와 전철을 답습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더욱 소중한 시대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2020. 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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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는 법 -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인간관계 처방전
정재훈 지음 / 마인드셋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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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18일 아주대학교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는 tvN 방송 채널 프로그램 <어쩌다 어른>에서 소시오패스(Sociopath)와 관련한 강연을 했다. 그는 평범한 모습을 한 소시오패스가 인구의 4% 이상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25명 중 1명이 소시오패스라는 이야기인데, 내가 다니는 직장의 동료 중에서도 그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부지불식간 군 복무 시절, 학창 시절 그와 만났을 수 있다. 어쩌면 나의 가족 중 그가 존재할 수 있다. 생활 속의 심리학(김은하, 2012)에 따르면 소시오패스란 반사회적 인격 장애의 하나로서,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이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데, “사이코패스(Psychopath)는 자기 감정에 미숙하고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순간적으로 극도의 감정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나, 소시오패스는 자신의 감정 조절에 뛰어나고 타인의 감정을 잘 이용한다.”고 설명한다.


소시오패스의 성향 중에서 타인의 감정을 잘 이용한다.”는 점은 가스라이팅(Gaslighting)과 맞닿아 있다. ‘가스라이팅1938년 영국인 작가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가스등(Gas Light)>을 통해 처음 그 용어가 등장하였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이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판단력을 잃게 만들고, 타인에 대한 통제력이나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시사상식사전(pmg 지식엔진연구소)에 따르면 이는 정신적 학대의 한 유형으로, 친구·연인·가족 등 친밀한 관계는 물론 학교나 직장 등에서 주로 발생한다.”고 한다.


이상에서 등장하는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가스라이팅 등은 20세기 이후에 이르러 정의된 현상이다. 오래 전부터 그와 같은 성향의 사람이 존재했음에도 20세기에 이르러 그 용어가 탄생하고 정의되었다는 점은 공자의 인(),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 예수의 아가페(Agape) 등 옛 철학자와 성인(聖人)이 강조했던 가르침들이 오늘날 현대인의 각양각색 감정과 생활양식을 담고 발견하기에는 이미 버겁게 되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


세계 도처에서의 전쟁과 기아, 주가와 환율, 인플레이션과 스태그플레이션, 종교 갈등, 민족 다툼, 테러 등은 물론이거니와, 국내 각종 정치, 사회, 교육, 금융, 주택 등의 이슈로 인하여 현대 사회는 복잡하면서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지구 위의 한 개인은 이러한 문제들과 하루하루 고민하며 씨름하는 가운데, 다시 자신이 속한 가정과 학교, 일터에서 가치관과 살아온 환경이 서로 다른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때로는 위로를 얻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관계의 현상 유지나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힘쓰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상처를 입으며 감정을 소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 몸의 회복을 얻는다. 그 전에 면역력을 길러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에 힘쓴다. 몸에 질병이나 장애가 생기면 병의원에 가는 것처럼 정신에 질환이나 장애가 생기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야 하는데, 정신질환이나 정신장애는 눈에 분명히 보이지 않으니 이를 가볍게 여기고는 무시하기 쉬운 것 같다. 그러나 정신질환이나 정신장애가 생기면 정신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 마음과 정신의 치유와 회복을 얻어야 한다. 그 전에 자존감을 높여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보존하면 다행이다.


무례한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는 법(정재훈, 2022)은 바로 자존감을 높여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신속하고도 즉각 적용할 수 있는 처방들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은 관계에서 발생되는 문제에 대해 스스로 처신할 수 있는 방책을 제시하는 것은 물론, 타인의 어떠함을 분별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격 또한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거울이다.


오늘날 복잡하면서도 빠르게 변화하며 나타나는 각종 현상과 문제 속으로 던져진 내가 가정과 일터에서 서로 다른 삶의 양식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가운데 발생되는 관계의 문제들을 옛 지식인들의 철학을 통해 이를 풀어내고 해석함으로써 일말의 위로를 얻는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일인가. 머리가 더 아플 지경에 이르지 않을까. 세상의 문제는 물론 자신의 고민들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와 함께 생활한다면 참 행복하겠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얼마나 있겠으며, 그런 사람과 인연이 닿아 함께 하며 행복을 누리는 사람 또한 얼마나 될까.


인격의 성숙은 학력, 지위, 재산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오히려 배웠다는 사람들이, 높은 반열에 앉은 사람들이, 부자인 사람들이 더욱 악랄하고 교활한 방법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경우들은 경험칙이 아니던가. 불행하게도 가정과 일터에서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함께 처하게 된 이에게 이 책은 삶에서 두고두고 유용하게 활용될 비책이다. 타인의 성향이 어떠하든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을 읽으며 본인의 마음과 정신을 지키고, 감정을 보호하며 자존감을 높여 성숙한 인격을 갖게 된다면 도리어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행복이 되겠다.


2022. 0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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