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이불
안녕달 지음 / 창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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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독서 목록에서 그림책의 비중이 부쩍 커졌다. 좋은 그림책 작가를 알아가고 작가의 작품들을 챙겨 읽는 일을 매우 엄선해서 하고 있다면 꽤나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자 진지한 의식과도 같은 일이다. 좋은 그림책을 읽고 마음이 정화되는 일은 마치 지친 영혼을 정화시키는, 디톡스하는 일과도 같은 일이라고 여기는 덕분에 주기적인 영혼 디톡스에도 열심이다. 새해를 맞이하여 챙겨 읽는 그림책 작가 안녕달 작가의 신간 소식이 들려왔다. 새해부터 영혼 디톡스라니 2023년의 시작이 기대 이상으로 좋은 것 같아 책을 읽기도 전부터 만족도가 이미 최상이다. 




겨울 이불 속만큼 따뜻하고 아늑하고 포근하고 그래서 그만큼 위험한 공간이 있을까? 『겨울 이불』이라는 제목에서 이미 책 속 내용을 다 알아버린듯 하지만 아는 맛이 더 무섭듯 안녕달 작가가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와 그림으로 따뜻함과 아늑함, 포근함을 전해줄지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다. 따뜻한 겨울 이불 속에서 밖으로 나오는 일이 힘든 만큼 안녕달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일도 그만큼 힘든 일이다. 따뜻한 이야기에 무장 해제되고 귀여운 그림과 깜찍한 상상력으로 독자들이 무장 해제되는데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쉽게 통하는 마법이다. 




개인적으로 『겨울 이불』을 처음 읽었던 때를 아마 평생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믿고 보는 그림책 작가의 반가운 신간으로 새해의 시작을 기분 좋게 한다는 즐거움을 가지고 책의 도착을 기다리는 사이 나는 코로나 확진자가 되고 말았다. 확진 초기 내 겨울 이불 속에서 꼼짝없이 아파하느라 밀린 영상들을 챙겨보거나 SNS를 할 여력도 없다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됐을때의식적으로  『겨울 이불』부터 챙겨 읽으며 기력 회복의 축하 세리머니를 했다. 이곳이 며칠째 계속 누워만 있는 이불 속이 아니라 찜질방이면 얼마나 좋을까, 찜질방 안 가본 지 오래됐다, 격리 해제되면 마트 가서 식혜부터 사 먹어야지, 그런데 왜 경상도에선 식혜를 단술이라고 할까, 단술은 우리 할머니 단술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데 이제는 맛볼 수 없는 할머니의 단술이 생각나고 괜히 마음이 찡해지기도 하면서 독서의 감상과 의식의 흐름은 종잡을 수 없이 이어졌다. 


이 겨울을 어떻게 잊을까, 이 이야기를 어떻게 잊을까, 이 독서의 경험을 어떻게 잊을까. 나에게 안녕달 작가의 『겨울 이불』은 그렇게 절대 잊지 못할 작품이 되었다. 영혼 디톡스는 물론이고 코로나 치유까지 됐다. 겨울이면 꼭 생각나겠지. 한 번씩 꺼내 다시 읽을 때마다 2023년 겨울 이불 속에서 읽었던 『겨울 이불』의 추억을 언제고 소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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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뮤지컬 - 전율의 기억, 명작 뮤지컬 속 명언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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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이라고 할 정도까지는 못되더라도 평소 문화, 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다르다고 자부하며 살아왔지만 공연 분야라면 소극적인 태도로 변하고 만다. 과거에는 지방에 살아 서울 사람들과 평등한 문화적 혜택을 누리기 어려웠기에 내 탓이 아닌 환경 탓을 당당하게 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지방에 거주하고 있더라도 2022년에 그런 주장은 좋은 핑계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핑계를 대야 한다면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라고 말하고 싶다. 뮤지컬 역시 마찬가지다.

 

뮤지컬을 뮤지컬 무대보다는 원작 소설이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통해(혹은  반대로배우고 경험한 사람이 바로 나다제목은 물론이고 스토리넘버에 대해 자세히 아는 작품들이 제법 있고   있다하지만 언제나 관심은 있지만 어째서인지 경험치가 관심도와 전혀 비례하지 못한 까닭에 뮤지컬 관람 경험을 꼽는 데 다섯 손가락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있다부끄러움이 밀려온다이런 나에게 모자란 지식을 충전해주고 숨어있던 뮤지컬 관람 욕구를 폭발시켜주는 책을 만났다바로 『방구석 뮤지컬』제목만 봐도 어떤 책일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뮤지컬의 원작 소설들을 찾아 읽은 적은 많지만, 본격적으로 뮤지컬에 알려주는 입문서가이드 형식의 작품은 처음이라 기대감이 남다르다.

 



익히 알려진 작품들의 구성으로 수록된 작품 30편의 목차만 봐도 떠오르는 배우, 장면, 넘버들이 밀려온다. 작품의 배경과 줄거리에 관한 소개, 멜로디가 아닌 가사를 통해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감정을 자세하게 들여다보게 하고 넘버 리스트까지 살펴보며 그냥 봐도 재미있는 작품들이지만 알고 보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해지는 지점들을 제대로 짚어주며 뮤지컬의 매력에 빠지게 만든다. 이서희 작가는 꼼꼼한 줄거리 소개와 배경지식에 관한 이야기들은 작품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도와주지만 30여 작품의 큐레이터로서 작가의 주관을 배제하고 중립적 입장을 철저히 지키면서 독자 몫의 감동과 열정을 남겨두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방구석 뮤지컬』의 독서가 자주 중단됐던 이유에는 넘버를 찾아 듣느라 바빴던 덕분도 있었지만, 영화나 책이 아닌 진짜 뮤지컬 무대에 대한 갈망이 예매를 알아보느라 분주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방구석 뮤지컬』을 읽고 난 후 제목만 알고 있었던 몇몇 작품들에 대한 배경지식이 쌓이는 즐거움도 컸지만, 무엇보다 기뻤던 건 예전엔 추상적이기만 했던 뮤지컬 작품에 대한 관심과 작품 관람에 대한 계획들이 꽤나 구체적으로 변화했던 데 있었다. 이제 나에게 있어서 뮤지컬은 방구석에서 벗어나 진짜 무대로 찾아가는 여정으로 바뀌었다. 그 시작엔 고맙게도 『방구석 뮤지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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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락모락 - 우리들은 자라서
차홍 지음, 키미앤일이 그림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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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생에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 세웠던 버킷리스트만큼 거창한 게 있을까. 나의 경우 어떤 자격증을 취득하고 어떤 나라를 여행하고 서점과 극장 VIP를 놓치지 않겠다던 야무진 결심 사이에 삭발하기가 절대 빠지지 않았던 몇 년이 있었다. 세상에 대한 반항도 아니고 두상에 대한 자신감은 더더욱 아니었던 삭발하기라는 버킷리스트는 결국 한 번도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다가 어느새 인생에서 후회하는 몇 가지의 리스트로 자리를 옮기고 말았는데 어쩐지 삭발을 하기엔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왜 버킷리스트에 삭발하기가 있느냐는 질문에 명확히 설명을 못했던 것처럼 왜 지금 삭발을 할 수 없냐는 질문 역시 명확한 답변을 줄 수 없다.



 

2. 

20대 초반의 내 모습을 기억하던 조카를 실로 오랜만에 만났을 때 조카는 나에 대해 헤어스타일도 자주 바뀌고 염색도 특이하게 했던 이모라고 회상을 했는데 일 년에 몇 번 만나는 아는 동생에게 최근 언니 머리는 고정이냐고 길이며 스타일이 한결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거에 비하면 미용실에서 선택할 수 있는 헤어스타일, 컬러 선택의 폭은 무척이나 넓어졌고 여전히 관심이 많지만 내 얼굴형에 맞는 길이를 너무 잘 알게 되었고 탈모에 대한 고민을 안고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헤어스타일 변화는 꿈도 못 꾸게 된 덕분에 내 머리는 고정이 되어버렸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3. 

블라인드 서평단의 남다른 재미는 작품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 작품을 읽으며 작가가 누구일지 예측해보는 것인데 『모락모락』의 경우 작가에 대한 상상이 쉽지 않다. 하이케 팔러의 『100 인생 그림책』처럼 100세까지 인생의 순간들을 담아낸 점이 닮았지만 그 인생을 머리카락의 시점으로 바라봤다는 점이 흥미롭다. 머리 감는 게 무서운 5살, 여드름을 가리기 위해 앞머리를 자르는 17살, 헤어 디자이너의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라는 말에 안심하는 22살,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는 스타일이 아닌 자신이 하고 싶은 스타일을 찾는 29살, 새치 고민이 생겨난 39살... 유행이 돌고 돌아 자신의 고등학생 시절 머리를 한 손녀를 보며 어린 시절 자신을 다시 만나는 75살... 사랑스러운 100가지 풍경에 책을 읽어가는 내내 마음이 뭉클해진다. 『모락모락』에는 100가지의 뭉클함이 있다.

 

4. 

'모락모락'이라는 단어에 제일 먼저 머리에 김이 모락모락, 연기나 냄새가 모락모락이 먼저 떠오르는 나로서는 이 책의 제목 『모락모락』이 국어사전에서 정의하는 '곱고 순조롭게 잘 자라는 모양'보다는 '樂'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작가는 어떻게 머리카락의 시점으로 인생을 들여다볼 생각을 했을까? 작가는 어쩜 이토록 다정하고 뭉클한 이야기를 끝없이 펼쳐낼까? 작가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1. 그림책 작가일 수도 있고 2. 소설가일 수도 있고 3.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일 수도 있고 좀처럼 감을 못 잡겠다. 무수한 가능성 중에 4. 일러스트를 담당한 키미앤일이 일러스트레이터가 글도 같이 썼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더해본다. 빨리 작가의 정체를 알고 싶다.

 

5. 

짧은 이야기를 빠르게 읽어나가면서 머리카락과 관련된 나의 추억을 수없이 떠올렸다. 그 속엔 나만 있는 게 아니라서 가족, 친구들에 대한 추억도 함께 따라왔는데 괜스레 생각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그중엔 오래전 연락이 끊긴 사람들도 있는데 문득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지고 추억에 소환된 모두가 안녕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아마 모두가 새롭게 예쁘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


출간 하루 전 문학동네 인스타그램에서 작가의 목소리와 함께 힌트를 제공했는데 헤어디자이너 차홍님으로 확정인 분위기에 해당 게시물 댓글창은 그야말로 폭발 중이다. 

상상도 못했지만 블라인드북 취지와 너무나도 찰떡인 작가와 작품의 조합에 감탄 또 감탄 중이다.

천재들이 모여 합심하면 이런 상황을 만들어내는구나. 

그동안 많은 블라인드북 서평단에 참여하여 작가를 추론했지만 『모락모락』 블라인드북 서평단 활동은 그야말로 역대급이었다. 

차홍님 목소리도 정말 좋으신데 차홍님 음성으로 오디오북이 나와도 좋을 것 같다.

작가의 정체가 밝혀진 이후 좋았던 작품이 더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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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로 건너가는 법
김민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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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록, 치즈, 여행, 마감 등 일상에 관해 세심하게 기록한 김민철 작가의 에세이 출간 소식을 접할 때마다 당연한 반가움과 소재의 솔깃함과 출간 속도에 대해 놀라움이 동시에 밀려온다. 카피라이터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상과 군더더기 없는 정갈한 글쓰기에 관한 감탄의 끝은 항상 국내 최고의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 김민철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지곤 했었다. 언젠가는 일에 관한 에세이도 출간해주겠지, 그런데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다는 개인적 바람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의 바람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신간 소식이 들려왔다. 마침 개인적으로 시기도 딱 들어맞았다. 




 마음에 새겨야 한다. 직장인의 3대 즐거움은 월급, 점심시간, 그리고 정시퇴근이다. 앞의 둘은 회사가 챙겨주지만, 정시퇴근을 챙겨주는 회사란 없다. 정시퇴근은 내가, 아니 우리가, 모두 한마음이 되어서 쟁취해내야 하는 것이다. 여섯 시 이후에 술을 마시건 친구랑 놀건 운동을 하건 제빵을 배우건 멍하게 보내건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오늘은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말할 수 있는 분위기여야 한다. 물론 그 열쇠는 팀장이 쥐고 있지만, 팀장 혼자 그 분위기를 완성할 수는 없다. 각자가 여섯 시에 배수의 진을 쳐야 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홀연히 떠나야 한다. 팀 분위기까지 내가 만드는 게 역부족이라면, 내 태도라도 모두에게 주지시키는 것도 방법이다. 저는 제 일 다 하고, 여섯 시엔 떠나겠습니다, 라는 태도를 산뜻하게, 단호하게 보여주는 것. 이것은 내가 내 삶을 주도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니까. p.50-51


처음부터 이렇게 오래 회사에 다닐 계획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19년째 회사에 다니며 한 팀을 이끄는 7년 차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어 있다는 김민철 작가가 『내 일로 건너가는 법』에서 들려주는 정시 퇴근, 회의의 원칙, 딴짓 예찬 등의 이야기가 쳇바퀴처럼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직장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거나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김민철 팀장이 이끄는 팀의 회의실 풍경, 일을 대하는 태도는 이상적인 직장 풍경의 정석으로 보이고 매너리즘에 빠진 직장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회사에서는 서로에게 든든한 동료가 되어주는 팀을 이끄는 팀장으로, 회사 밖에서는 윤기 나는 인생을 살아가는 개인으로 '내 일'을 건너고 '내일'을 건너는 과정에서 김민철 작가는 독자 몫의 지속할 수 있는 방법과 성장의 주도권을 넘겨준다. 이제 내 차례다.


이건 비밀인데, 회사 문만 나가도 재미있는 것들은 발에 차인다.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 건 여고생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회사원들도 회사 문 밖으로 나가면 굴러가는 자동차 바퀴에도 웃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p.200




김하나 작가의 『말하기를 말하기』 속에서 선배 김하나 작가가 후배 김민철 작가의 고민 상담을 도와주는 에피소드를 보며 함께 공감하고 위로받았었는데 『내 일로 건너가는 법』에서 7년 차 팀장 김민철 작가를 만나게 되어 넘치게 기분 좋고 뭉클해진다. 김하나 작가를 통해 철군 김민철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이번 『내 일로 건너가는 법』을 통해 표지와 일러스트를 담당한 홍세진 대리님을 알게 된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홍세진 대리님을 홍세진 작가님으로 만나게 되는 날도 조만간 올 것 같다. 김민철 작가의 다음 작품은 어떤 소재일까? 김민철 작가님의 윤기 나는 사생활 속에서 더 다양한 이야기들을 에세이로 오래, 자주 만나길, 그 틈에서 일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도 주기적으로 들려주길 바라게 된다.


 이미 인생은 일로 가득 차 있고, 인생의 빈 부분을 의미로 채우는 건 스스로 할 일이다. 딴짓에서 얻는 즐거움으로 얼굴이 반짝반짝한 팀원이 늘어날수록 좋은 팀장이 되는 것처럼, 딴짓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사회가 건강해지는 것이라 믿는다. 딴짓을 하다 보면 거기서 또 새로운 미래가 피어날지도 모를 일이고. 모를 일이니까, 일단 시작해볼까, 딴짓.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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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터 - 사라지게 해드립니다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김중혁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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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터deleter들이 마음만 먹으면 천지창조도 없었던 걸로 할 수 있다.

작가, 판매순위, 입소문, 유명인의 추천, 광고 등 한 권의 책을 선택하여 읽기 시작하기까지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요소들은 무수히 많다. 그런 의미로 작가와 작품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와 편견 없이 출간 전 블라인드 가제본을 온전한 나만의 시각으로 보고 마치 셜록 홈즈처럼 작가를 추리해보는 이벤트를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자주 접할 수 있는 행사가 아니라 더 귀하게 느끼고 있다. 2022년 여름 자이언트북스 출판사에서 작가의 정체를 비밀로 한 블라인드 가제본 『딜리터 : 사라지게 해드립니다』(이하 『딜리터』)의 서평단을 모집했고 이토록 귀한 행사에 막강한 자이언트북스 출판사 조합은 절대 놓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실로 오랜만에 서평단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얼마후 나에게 『딜리터』 블라인드 가제본과 이 세상 최고의 딜리터 강치우의 명함, 딜리터 의뢰서가 도착했다. 독서 시작도 전부터 감동의 도가니탕이다.

 

 "옷장 안에는 시체가 있어요."

 "네?"

 "삼 년 전에 제가 죽인 사람이 들어 있어요. 아니에요, 미안해요. 거짓말이에요."

 "놀리는 겁니까?" 

 "아뇨.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할 때가 있어요. 반사신경 같은 거예요."

 "신기하네요. 거짓말을 하고 바로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하시네요."

 "그게 차이죠. 제 거짓말에는 목적이 없어요." p.60-61

 

딜리터는 지우는 사람이 아니라 더하는 사람이다. 지움으로써 더하고, 더하면서 지우는 사람이다.

의뢰인이 사라지게 하고 싶은 물건이나 사람을 이 세상에서 지워주는 딜리터. 소설가이자 딜리터인 강치우, 육 개월 전 실종된 강치우의 여자친구 소하윤.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찾는 M&F(Missing & Fining) '배수연 국가 공인 탐정 사무소'가 실종(혹은 증발)된 소하윤을 찾느라 강치우의 뒤를 쫓고 강치우는 출판사 사장 양자인 대표의 소개로 의뢰인의 딜리터 의뢰를 받는다. 그리고 여분의 레이어를 볼 수 있는 픽토르 조이수가 있다. 



 

진실하지 않은 대답으로는 딜리팅이 불가능하다.

신선하고 흥미로운 소재의 이야기에 속도감이 더해져 『딜리터』는 빠른 전개와 흡인력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290여 페이지를 단숨에 읽어내고선 빠른 속도로 읽어내느라 놓친 레이어는 없는지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그러니까 『딜리터』의 독서는 290여 페이지로 끝날 수가 없다. 이건 최소 580여 페이지의 소설이다. 익명의 작가는 매력적인 소재와 인물들의 이야기, 짜임새 있는 구조, 빠른 속도감의 완급조절에 그야말로 능수능란하다. 『딜리터』는 요즘 말로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는)' 소설이다. 가제본엔 수록되지 않은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하다.

 

 "궁금하지 않나? 자신하고 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

 "글쎄요. 어쩐지 만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달까요. 만나면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할 것 같은……"

 "두려운가?"

 "아뇨, 두렵긴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부럽긴 하죠." p.235



 

딜리터 자신을 딜리팅하는 일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책에 대한 정보라곤 『딜리터』라는 제목과 자이언트북스에서 출간 예정될 작품이라는 점밖에 없지만 이제 셜록 홈즈가 되어 작가에 대한 추리를 해 볼 시간이다. 아마 남성 작가일 것이고 신인 작가보다는 기성 작가 쪽에 더 무게가 쏠린다. 짜임새 있는 구조에 빠른 전개와 흡인력으로 독자를 사로잡지만 마지막엔 독자 몫의 여운을 남겨두는 이런 능수능란함은 아무리 봐도 신인 작가의 것은 아니다. 딜리터, 픽토르, 더스트맨, 여분 레이어 등 흥미로운 소재와 뷰욕의 Hidden Place, 티렉스의 코스믹 댄서 등 『딜리터』 속 플레이리스트의 떡밥은 ㄱㅈㅎ작가를 합리적으로 의심(?)하게 만든다. 마침 얼마 전 장편을 완성했다는 소식을 들려주기도 하셨으니 나의 예상은 ㄱㅈㅎ작가님이다.

 

흔한 기회가 아닌 블라인드 가제본 서평단에 출판사에서 전해준 정성 가득한 명함과 의뢰서, 전단지 거기에 높은 기대치를 충족시켜줬던 만족도 높은 독서까지 『딜리터』의 독서 과정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단순 독서를 넘어 하나의 체험과도 같은 경험이었는데 『딜리터』 가제본 서평단 활동과 관련해 가지고 있는 기분 좋은 경험들은 조금도 딜리팅되지 않았으면 한다. 빨리 작가의 존재를 알고 싶고 작가의 말이 너무나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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