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의 주문 - 일터의 여성들에게 필요한 말, 글, 네트워킹
이다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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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운동장과 여성의 한정적인 일자리, 경력단절 등의 문제를 조명하는 글은 많이 봤다. 하지만 때론 문제만을 나열하는 글이 나를 더 힘빠지게 했다. 문제점을 조명하는 것만큼이나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도 그 문제에 가까워지는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다혜 작가는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듯 했다. '당신 자신이 살아갈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이든 주변이든 바꾸어가는 것, 그렇게 나아갈 수 있다는 향상심을 버리지 않는 것'이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단단한 사람이고, 문체와 내용에서도 그 단단함이 여성들의 앞길을 시원하게 비춰준다. 그 같은 상사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 한 번, 그런 상사가 되어야겠다는 다짐 한 번을 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취준생 시절 곧 입사할 회사를 고르는 나의 원칙은 명료했다. 1) 존경할만한 선배가 있는 회사인가 2) 성별 비율을 고려하지 않고 신입을 뽑는 회사인가. 채용 설명회를 가보면 대놓고 "여자는 나이가 중요하지." "남자는 뽑으려고 하는데도 여자가 뽑힌다."는 무례한 말들을 난무하는 인사팀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직무나 산업군의 특성도 중요하고,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을'의 취준생이었지만 나에겐 이 두 가지가 보장 되어 있어야 그 회사를 잘 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취준을 해 다양한 회사들을 만나면서 유리천장은 여전하다는 생각도 했고, 지금 높은 위치에 있는 임원은 대부분 남성이지만, 문제의식이 있는 현직자들도 많고 채용 시 성비를 일체 신경 쓰지 않는 기적적인 인사팀도 있다는 희망적인 면도 알게 된 건 사실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조직이 늘어날수록 일터의 여성들 역시도 변화하며 함께, 길게 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첫 발걸음이 되어주기에 충분해 읽는 동안 괜히 마음이 뜨거워진다. 경쟁자로 살아가며 일터의 수명을 갉아 먹을 필요도 없다. 튼튼하고 단단한 마음가짐으로 나를 지키고 여성들 간의 네트워킹에도 힘쓰고 싶다. 일터로 나아가기 전 이 말을 되새긴다.

"계속해주세요. 거기에 길을 만들어주세요. 시야 안에 머물러주세요."
-프롤로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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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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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에 책의 강점은 과거를 다루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5.18을 다룬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나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마음에 멍이 들도록 그 시대의 쓰라림을 느꼈던 것 같다. 이 책은 '다름을 느낄 새 없는 단체생활'을 해나갔던 시절을 선명하게 다뤄내 우리의 향수를 자극한다. 1970년대에 학생이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단체생활에 대한 머나먼 기억들을 끄집어냈다. 타인을 파악하기 위한 눈치싸움, 끝없는 자기검열, 적당히 다르면서 적당히 같고자 하는 마음 같은 것들.. 그리고 그 이후에 어른이 되어 겪은 긴 긴 사춘기 시절에 대해 자연스레 떠올렸다.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갈지, 나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지, 난 무얼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지. 정체성에 관한 질문들을 나를 여전히 괴롭히고 있다. 그게 "남과 다른 것이 그대로 결격사유가 되는 단체 생활에서 내가 누군지 따위를 고민할 기회는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27p)는 문장으로 서술되어 있을 때부터 나는 이 책에 이입하게 되었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으로부터 나의 정체성에 다가가는 일은 나의 일상에도 넘쳤으니까.

1970년대 말, 억압이 팽배한 어느 여자대학교 기숙사의 이야기라는 것만으로 나는 그 안에 실타래처럼 얽혀 있을 관계들에 대해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여고를 다니던 시절 즐거움으로 착각하던 기분엔 오묘한 감정싸움이 숨어 있었던 것 같다. 또 이렇게 관계에 예민한 환경에서는 나의 약점이 쉽게 드러난다. 은희경 작가는 이 약점이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요즘 하는 온갖 생각들의 접점을 만났다. 백인 남성이 동양인 여성과 동일한 방식으로 세상을 읽지 못하는 것, 위축되어 있는 사람이 자존감이 넘치는 사람과 만났을 때 나타나는 충돌 등. 결국 이 약점을 어떻게 다루고 해결하며 살아가냐가 나를 완성하는 게 아닐까. 서로 다른 관점으로 자신들의 과거를 돌아보는 두 인물의 방식을 우리는 '약점'이라는 잣대로 살펴볼 수 있다. 또 우리가 평생 안고 살아온 약점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고민할 수 있다.

은희경 작가는 에필로그에 반박하는 시선이 반대 방향의 장력으로 잡아당겨야만 이야기라는 평면이 펼쳐진다고 말한다. <새의 선물>에서도 만났던 작품 속 날카로운 시선은 하나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내 주위에 있던 시간, 공간, 역사, 인물들의 경우의 수로 계산되는 수많은 관점의 존재를 부각한다. 그러니 인생에는 나를 반박하는 시선이 어딘가엔 반드시 있는거다. 끝난 소설은 무조건 해피엔드라는 작가의 에필로그 마지막 줄이 씁쓸했다. 소설과 달리 인생의 엔딩은 누구도 모르는거고, 돌아보고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할 과거는 나에겐 빛일 지언정 타인에겐 어둠일 수 있는 거고.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과거가 미래까지 망치지 않게 계속해 빛의 과거를 만들어내는 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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