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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평점 :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에 책의 강점은 과거를 다루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5.18을 다룬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나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마음에 멍이 들도록 그 시대의 쓰라림을 느꼈던 것 같다. 이 책은 '다름을 느낄 새 없는 단체생활'을 해나갔던 시절을 선명하게 다뤄내 우리의 향수를 자극한다. 1970년대에 학생이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단체생활에 대한 머나먼 기억들을 끄집어냈다. 타인을 파악하기 위한 눈치싸움, 끝없는 자기검열, 적당히 다르면서 적당히 같고자 하는 마음 같은 것들.. 그리고 그 이후에 어른이 되어 겪은 긴 긴 사춘기 시절에 대해 자연스레 떠올렸다.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갈지, 나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지, 난 무얼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지. 정체성에 관한 질문들을 나를 여전히 괴롭히고 있다. 그게 "남과 다른 것이 그대로 결격사유가 되는 단체 생활에서 내가 누군지 따위를 고민할 기회는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27p)는 문장으로 서술되어 있을 때부터 나는 이 책에 이입하게 되었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으로부터 나의 정체성에 다가가는 일은 나의 일상에도 넘쳤으니까.
1970년대 말, 억압이 팽배한 어느 여자대학교 기숙사의 이야기라는 것만으로 나는 그 안에 실타래처럼 얽혀 있을 관계들에 대해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여고를 다니던 시절 즐거움으로 착각하던 기분엔 오묘한 감정싸움이 숨어 있었던 것 같다. 또 이렇게 관계에 예민한 환경에서는 나의 약점이 쉽게 드러난다. 은희경 작가는 이 약점이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요즘 하는 온갖 생각들의 접점을 만났다. 백인 남성이 동양인 여성과 동일한 방식으로 세상을 읽지 못하는 것, 위축되어 있는 사람이 자존감이 넘치는 사람과 만났을 때 나타나는 충돌 등. 결국 이 약점을 어떻게 다루고 해결하며 살아가냐가 나를 완성하는 게 아닐까. 서로 다른 관점으로 자신들의 과거를 돌아보는 두 인물의 방식을 우리는 '약점'이라는 잣대로 살펴볼 수 있다. 또 우리가 평생 안고 살아온 약점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고민할 수 있다.
은희경 작가는 에필로그에 반박하는 시선이 반대 방향의 장력으로 잡아당겨야만 이야기라는 평면이 펼쳐진다고 말한다. <새의 선물>에서도 만났던 작품 속 날카로운 시선은 하나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내 주위에 있던 시간, 공간, 역사, 인물들의 경우의 수로 계산되는 수많은 관점의 존재를 부각한다. 그러니 인생에는 나를 반박하는 시선이 어딘가엔 반드시 있는거다. 끝난 소설은 무조건 해피엔드라는 작가의 에필로그 마지막 줄이 씁쓸했다. 소설과 달리 인생의 엔딩은 누구도 모르는거고, 돌아보고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할 과거는 나에겐 빛일 지언정 타인에겐 어둠일 수 있는 거고.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과거가 미래까지 망치지 않게 계속해 빛의 과거를 만들어내는 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