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역에서 ㅣ정호승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 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 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 산에서
저녁 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

사랑이 타고 남은 자리엔 슬픔이 떨어져 있다.
어쩌면 시작했을 때부터 슬픔은 배태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와 처음 만났을 때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가 살며시 겹쳐졌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도입부의 느낌은 영 반대였는데도 이 시가 떠올랐다.
사랑시에 담긴 느낌 때문인지 기시감마저 들었다.
아마 기다린다는 말이 중심어여서 그랬던 듯하다.

하지만 황지우의 시와 정호승의 시는 다르다.

황지우의 시는 초반 기다림의 설렘과 조바심을 드러낸다.
그러다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불안함을 너를 맞으러 가는 마음의 길로 치환하여 적극적으로 그린다.
반면 정호승의 시는 이별의 아픔과 재회를 염원하는 마음을 곡진하게 그리고 있다.

사랑은 어쩌면 슬픔과 이란성 쌍동이인지도 모르겠다.
헤어지고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마음은 화자를 강변역으로 부른다.
태어나고 자라며 성숙하고 쇠퇴해 마침내 스러지는 인생처럼, 사랑도 그렇다는 걸 화자는 간과했다.
그토록 생명력으로 충만했던 사랑이 시들어버린 꽃잎처럼 버려지게 될 걸 상상이나 했으랴.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을 어쩌지 못해 화자는 또 강변역으로 간다.
<행복>이라는 시에서 유치환이 말한 것처럼 화자는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까.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어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런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에서 그녀를 떠나보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강변역에서의 화자는 오늘도 여전한 사랑으로 그녀와의 재회를 기다린다.
어쩌면 그의 사랑은 그의 인생과 같을 것이므로.
설령 뜻대로 되지 않아도 여전히 생이 이어지는 것처럼 그의 사랑도 그럴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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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12월 31일
김준수 지음 / 밀라드(구 북센)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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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이었을 때 나는 두려웠고 세상은 어수선했다. 매스컴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종말을 언급했고, 컴퓨터의 인식 오류로 비행기 사고가 날 수 있다며 경고등을 깜빡거렸다. 사람들은 징후에 더 겁을 먹었다. 모든 재산을 처분해 가족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자칭 예수라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개중에는 세를 불려 집단으로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밀레니엄의 마지막 해인 1999년 당시 나는, 아니 우리는 말세 중에서도 말세의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몰랐기에 잠시 시간의 유랑자가 되어야만 했던 그 시절, 그 긴박하고 무거웠던 이야기를 작가 김준수가 들려준다.


개인이나 역사의 사실을 개변하지 않으면서 비어있는 시간 속에 허구를 넣어 직조하는 소설을 팩션이라 한다. 김진명의 소설들이나 이정명의 『바람의 화원』, 김훈의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 같은 책들이 이런 갈래다. 그렇기에 팩션은 다른 문학 장르보다 작가의 상상력이 더 요구된다. 사실과 허구가 씨실과 날실로 정교히 짜여지지 않으면 제한된 시간안의 작은 공간을 채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 12월 31일』은 김준수 작가가 처음 지은 소설이다. 그간 에세이와 신학 서적을 출간했던 그가 오랜 시간 가슴에 품어온 이야기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토하듯 써 내려간 후 내놓은 것이다.


이 소설엔 3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전직 신문 기자이자 서술자인 현수와 그의 여자 친구이자 고고학자인 희재, 현수의 영적 스승이자 전직 대학 교수인 이필선이 그러하다.


이야기는 1인칭 주인공 시점과 관찰자 시점을 오가며 펼쳐진다. 이필선을 만나기 전까지 현수의 삶은 부초처럼 떠돌았다.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했지만 감정에 서툴던 현수는 희재를 떠나보내야 했다.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그에게 이필선과의 만남은 가뭄 끝의 단비 같았다.


이필선은 작은 공동체를 이끌며 종말을 준비하는 집단의 교주다. 대학교 교수였던 아내와 같은 날 정년 퇴직한 후 이들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로지 종말의 그날을 고대하며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지낸다. 이필선의 행적이 현수의 삶과 이어지면서 서사는 긴박하게 돌아간다.


이필선 부부와 현수는 1년 넘게 함께 지내다 종말의 비밀을 쥔 이스라엘을 찾아 도움을 줄 사람을 구한다. 그러다 현수의 옛 여자 친구이자 이스라엘 국립박물관의 교환교수로 있는 희재와 재회하게 된다. 이들은 희재의 도움으로 전 지구적 종말의 비밀을 풀어줄 다윗의 열쇠를 찾기 위해 쿰란 동굴에 간다.





이필선은 1999년 12월 31일 예수가 재림하면서 지구와 인류 문명은 끝이 나고 지상에 천년왕국이 건설될 것이라 확신하는 사람이다. 이는 이필선 부부가 강하게 붙잡고 있는 유일한 소망이다.


현수는 지지부진한 자신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필선을 따라 나선다. 현수는 유토피아가 저 멀리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우리가 누리며 살아야할 어떤 것이라 깨달으며 이필선과 갈등을 겪는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는 점점 뜨거워진다. 반면 내 마음은 조금씩 서늘해지는데 어떤 질문으로 인함이다. 이필선과 현수의 이야기가 결국은 지구의 종말이 아닌 한 개인의 종말을 네가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질문으로 귀착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네가 종말론적 관점으로 살고 있느냐는 더 깊은 질문으로 나를 찔러서이다.


댄 브라운의 『다 빈치 코드』를 읽었을 때, 내용엔 다 동의하지 않았지만 독자를 견인하는 튼튼하고 풍부한 서사와 탄탄한 구성력에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 댄 브라운의 책을 찾아 읽었는데 그 중 『천사와 악마』라는 책은 전율이 일 정도로 캐릭터를 생생히 구현해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김준수의 소설도 그랬다. 성경에 단 한번 언급됐다는 다윗의 열쇠를 찾아 행군하는 인물들의 심리와 상황 묘사가 빼어났다. 개연성이나 아귀가 맞지 않으면 팩션의 재미는 반감되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더 흥미를 자아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히 흥미만 유발하지 않는다. 다윗의 열쇠를 찾는 여정을 통해 사랑과 신뢰, 삶과 죽음, 신앙과 이성, 희생과 헌신 같은 묵중한 주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게 한다.


삶에서 어떤 시간은 짧고 어떤 시간은 길다. 모든 시간의 의미가 같을 수 없어서이다. 이 소설은 2천 년보다 길었던 1999년 12월 31일,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당신도 그 여행에 함께 하기를 권한다. 내가 이미 함께 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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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사랑이다
황해남 지음 / 늘영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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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죽음이란 언제나 낯설다. 지근거리에서 한 인생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목사라할지라도 죽음은 마음을 흔든다. 삶의 성찰이라는 진지한 물음을 선사함에도 죽음은 편치 않고 서걱대며 여전히 유예하고 싶은 어떤 것이다.

그런 죽음이 느닷없이 찾아오게 될 때의 당혹스러움은 어쩌면 목사이기에 더할 수 있다. 병상에 누워 힘겨운 싸움을 하는 교우를 위로하고 격려하던 사람에서, 하루아침에 위로 받으며 도움을 구하는 사람으로 자리바꿈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곤혹스러움은,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지탱해 왔던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사라진 것 같은 혼란스러운 감정에 빠질 때이다. 다른 건 몰라도 건강만큼은 지켜주실 거라 믿었던 마음이 흔들리는 때, 그런 순간이 아닐까 싶다.

2020년 12월의 어느 날, 저자 황해남 목사는 한 해가 가기 전 건강 검진이나 받아 보자며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던 검진에서 위암 4기를 선고 받는다. 담당의는 잔여 수명이 불과 6개월이라 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투병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암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어서 몸의 상태에 따라 감정이 위 아래를 오갔다. 때로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미안하고 사랑한다'며 죄스럽게 말하는 자신에게 '사랑한다면 죽지 말고 살라'는 아내의 말이 화인처럼 가슴에 남았기 때문이다. 앞만 보고 달리던 그에게 암은 제동을 걸었다. 매사에 거침 없고 한번 마음 먹은 것은 이뤄내고야 마는 그에게 암은 일상의 단절과 함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했다.

두 아들을 사랑한다 하면서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목회를 우선했던 것이 떠올랐고, 아내의 소중함은 날이 갈수록 사무쳤으며,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당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됐다.

자신이 내린 커피를 자신을 쏟아부은 카페이자 교회인 그리심에서 한 모금이라도 마실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숨 쉴 수 있는 건강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그는 온 몸으로 배우게 된다.

마음이 가난할 때 인간은 빛난다. 자랑거리가 부질없는 것임을 자각하며 자신의 민낯을 직면하게 될 때 그렇다. 회한으로 가슴은 찢기지만 존재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지는 역설 속에서 황해남은 더 깊이 자신을 만나고 은혜 안에 잠긴다.

6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았다고 주치의는 예상했지만 그는 현재 1년 3개월을 더 살고 있다. 자신이 무력하고 무능한 자임을 자인하면서 하나님께 더 깊숙히 안기고 새로워지며 풍요 속에 거하고 있다.

그에게 이제 암은 넘어야 할 산이 아니다. 삶도 죽음도 하나님께로 가는 여정임을 체감하면서 그는 누린 은혜를 지체들과 나누고 있다. 사랑하는 이들과 오래 함께 하기를 바라지만 설사 그렇지 못한다할지라도 그 또한 은혜임을 안다. 그래서 황해남은 오늘도 사랑이라는 떨림을 안고 하루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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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전에도, 이후에도 오직 인터뷰어로 『그녀에게 말하다』의 김혜리

<씨네 21>의 기자 김혜리는 내게 떨리는 그대다. 김혜리가 부르는 설레임은 인터뷰이에 대한 그녀의 한시적이고도 온전한 짝사랑처럼 내게도 그렇다. 인터뷰이를 대하는 정중하고도 진지한 자세, 주도면밀한 준비, 섬세하고도 결이 다른 그녀의 언어 감각은 독자인 내게 큰 만족을 선사한다.

조심스럽지만 용감하고, 따뜻하지만 간혹 무미한 그녀의 글은 피상과 안일을 거부하며 조용히 도발한다. 그녀의 글은 또한 인터뷰이와 읽는 이를 매혹하며 긴장케 하는데, 이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터뷰이가 속한 직업적 환경에 대한 식견에서 비롯된다.

​김혜리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녀는 인터뷰이의 가장 열성적인 팬마저도 몰랐던 면모를 발견하려 애를 쓴다. 그 부분이 다른 인터뷰와 차별되는 지점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책의 앞날개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인터뷰어로서의 붙임성과 순발력은 좋지 않지만, 어딘가 '절박해' 보이는 인상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자평한다. 새로운 약속 장소로 향할 때마다 팔뚝에 잔소름이 돋을 만큼 긴장하면서도, 언젠가 한번쯤 대화하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을 수첩 한 페이지에 남몰래 적어 넣고 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김혜리를 그답게 만드는 특질이다. 그녀의 인터뷰 기사의 특징은 전체를 아우르면서 부분에도 구체적 특별성을 띈 독특함에 있다. 그녀는 인터뷰이를 전문(前文)으로 소개한 다음 Q&A로 문답을 정리하는데, 도입부의 글은 따로 떼어 그 부분만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만큼 독창적이며 이미 그 자체로 충분하다.

"십 수 년 전, <댕기>라는 잡지에서 만화가 김진이 어두운 고교 시절을 회고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증오도 향수도 풍화된 그 문장에 나는 크게 위로받았다.
김진과 그녀의 만화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일부러 위안하려고 애쓰지 않음으로써 위로했고, 꽃 속같이 천진한 영혼들이 기어코 심연을 들여다보게 하는 가혹한 성장담을 통해 살아갈 기운을 주었다." 만화가 김진 77쪽

​"언제인가부터 나는 소심한 사람들의 괴력을 눈치채게 되었다. 대범한 사람들이 세계를 들썩들썩 움직이는 동안 소심한 사람들은 주섬주섬 세상을 해석한다. 살아남기 위해 예민해질 도리밖에 없는 초식동물처럼 그들은 누가 힘을 가졌는지 계절이 언제쯤 변하는지 민첩하고 정확하게 읽어낸다. " PD 김병욱 115쪽

소설가 정이현은 추천사에서 "이 책을 내가 읽은 최고의 인터뷰집이라고 감히 말한다"고 했다. 동감이다. 이 책은 2008년도에 나왔다. 햇수로 15년이 됐는데도 여전히 산뜻한 느낌을 전한다. 모든 좋은 것들은 늘 젊다.

2. 김혜리의 두 번째 인터뷰집 『진심의 탐닉』
제목이 이렇게 매혹적이어도 되나 싶다. '나는 내가 만난 사람들에 관한 기억의 총합'이라는 격언이 있다. 이 책은 이 말의 방증이다.



"한국 문학의 사려 깊은 연인ㅡ 문학평론가 신형철

예술은 인어공주의 숙명을 지녔다. 예술은 돌려 말해야 한다. 욕망과 사랑을 대놓고 발설하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태생이 벙어리 냉가슴일 수밖에 없는 예술을 통역하고 위무하기 위해 비평가가 존재한다...최근 읽은 문학비평 에세이 가운데에서는 밀란 쿤데라의 <커튼>과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글이 그러했다. 그들의 글이 유혹적인 까닭은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식의 극찬을 감각적 비유를 동원해 나열해서가 아니다. 명쾌한 동시에 관능적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이 왜 좋은지와 어떻게 좋은지를 두루 알고 싶어 하는 독자의 요구에 이들은 화답한다.

신형철이 "시에는 시의 이름으로 시 아닌 것들을 솎아내는 야금술의 길이 있고 시 아닌 것을 모아 시를 만드는 연금술의 길이 있다"고 썼을 때 나는 그가 명쾌하다고 생각했고,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을 가리켜 "타인의 취향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연립주택 같다"고 직유했을 때 소설의 온도를 감각할 수 있었다."

김혜리는 인터뷰를 통해 타인의 내면 세계를 가져오는 것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녀는 인터뷰이의 모호하거나 파편화된 생각들이 답변을 통해 형태를 갖춰 배열되도록 돕는다. 그리하여 인터뷰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고 내밀한 진실의 영역까지 도달하게 된다.

김혜리는 그밖에도 적잖은 책들을 출간했는데 나는 그녀의 전문 분야인 영화에 관한 책보다 인터뷰집이 훨씬 마음에 든다. 그녀가 봉인해 놓은채 발견해 주기를 기다리는 이야기들의 속삭임을 듣고 싶고, 두고두고 읽어도 물리지 않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서이다. 세상엔 내로라 하는 인터뷰어들이 있고 그들의 글 또한 나를 끌어당기지만, 이전에도 이후에도 내게 최고의 인터뷰어는 김혜리이다.

3. 뻔한 것의 지겨움과 새로움 『열정과 결핍』의 이나리

김혜리를 한껏 흠모하지만 내가 김혜리보다 먼저 만난 인터뷰어는 이나리이다.
2003년 출간된 그녀의 데뷔작 『열정과 결핍』을 나는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읽게 됐는데, 사람들은 가고 시대적 상황도 달라졌지만 시간의 변화를 뛰어넘는 글의 생명력은 어이없을만큼 대단했다.

이 책에는 지금은 지상에 없는 고 이윤기 선생과 시대를 온 몸으로 살아낸 타고난 글장이 황석영, 당시에는 불타는 중년으로 불렸던 자유인 조영남과 초미의 관심사를 불러일으켰던 미래에셋의 박현주, 교과서적 삶을 살았던 국회의원 조순형과, 영원한 천재 고 이어령 교수, 좌충우돌 최고의 논객 진중권과 낯가리는 페르소나 설경구, 통기타 세대의 향수인 이장희와 JYP의 박진영, 시사 만화가 박재동과 가슴을 휘젓는 소리꾼 장사익과의 만남이 이나리표 글로 깔끔하게 버무러져 소개돼 있다.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람을 인터뷰 하는 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인터뷰어나 인터뷰이 양 쪽 다 뻔한 말이 오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나리는 같은 말이 반복될 식상함과 지루함을 예상하고도 뛰어들었는데, 그들의 일상적인 모습과 콤플렉스, 상처와 위선 때로 위악까지 복원해 그들의 삶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서였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이나리는 인터뷰가 단순히 말과 말이 아닌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고 부딪침이며 기싸움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보여줄 듯하면서 결코 속내를 보여주지 않았던 문학청년 황석영과의 치열한 전쟁, 첫 단추였던 고 이윤기와의 긴장된 만남,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정직함이 아직도 있는 듯한 선비 조순형, 갈데 없는 충청도 사람 장사익과의 만남을 그녀는 오래도록 기억한다.

책을 읽다 보면 냉정과 열정, 속도와 밀도처럼 공존하기 힘든 속성들이 한 사람 안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제어되며, 세상과의 불화와 화해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다.

덧) 김혜리의 인터뷰와 비교하며 읽으면 말랑하고 쫄깃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둘 다 완성도 높아 시간 가는 줄 모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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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날마다 새벽일기 - 걷고 느끼고 쓰다!
김일곤 / 페스트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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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아닌 살아내야 하는 날이 있다.

매 순간이 힘에 겨워 간신히 하루를 버티는 날 말이다.

숨쉬는 것조차 고역이라 느껴져 자신마저 돌볼 수 없는 그런, 그런 날 말이다.

그와 같은 날들을 견디고 견뎌 마침내 평안을 찾은 사람이 있다.

이 책의 저자 김일곤이 그러하다.

김일곤은 목회자로 일찌감치 결혼해 아내와 35 년을 함께 했다.

그에게 아내는 동역자이자 좋은 친구였다.

이런 아내에게 4년 전 악성 뇌종양이 찾아 왔다.

뇌종양은 뇌출혈로 이어졌고 편마비를 불렀다.

그는 목회를 친구 목사에게 맡기다시피하고 2 년여 동안 아내 곁을 지켰다.

아내는 손재간이 뛰어났다.

무언가를 만들어 선물하길 좋아했고 자그마한 가게를 열길 원했다.

아내의 바람을 들어주려 계약까지 마쳤는데 그 무렵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이제 오순도순 살아 보려던 참이었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 그와 두 딸은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럼에도 병은 악화되었고 더이상의 치료가 의미를 잃게 되자 그는 추억 여행을 위해 가족을 차에 태우고 자연을 찾았다.

그러던 작년 4월 부활 주일에 아내는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날마다 새벽일기』는 아내를 떠나보낸 후 살기 위해 쓴 그의 생존 분투기이자 고백록이며 수상록이다.

마음으로 읽고 가슴으로 공명해야 하는 책으로 여기는 이유이다.

"투병 중 아픔을 호소하던 당신 생각날 땐

난 숨이 멎는 것 같습니다.

내 곁을 떠날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며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눈물 흘립니다.

연약한 몸 이끌고

살고자 걷고자 하루하루 애쓰며 힘겹게 생활하던

당신의 뒷모습 비추일 땐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살도록 걷도록 도와주지 못한 나의 무능함에 고개를 떨굽니다.

내 옆에 당신 부재한 현실에 눈뜰 땐

홀로 남은 외로움 그리움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웁니다.

사별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알지요.

하늘은 내게

남은 자는 떠난 자의 몫까지 다하고

쓰라린 상처 안고 사랑의 통로되라 토닥입니다.

내게 주어진 생명 있는 날 동안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53 쪽)

목회자로 살며 다른 이들을 돌보느라 아내는 늘 뒷전이었다.

사무치는 미안함과 그리움으로 한동안 그는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두 딸도 아빠를 걱정할 정도였다.

그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김일곤은 자신의 심정을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그 글 모음이 바로 이 책이다.

그의 마음은 짙은 시와 아픈 글로, 때론 생명의 경외를 속삭이거나 외치는 찬연한 삶의 찬가로 빚어져

공감을 부르는 노래와 사진에 담겨 읽은 이의 마음을 두드렸다.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 걷기라 했던가.

아내가 떠난 후 그는 두 발로 곳곳을 다니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더 깊이 하나님 곁으로 다가갔다.

숲 사이를 소요하며 사유하고 그 속에서 새롭게 만난 생명과 소중한 이웃들로 인해 큰 위로를 받고 마음의 평강도 되찾았다.

걷기와 쓰기는 그에게 치유와 해방을 안겨주었다.

자신에게 깊이 들어가면서 자신의 상처를 깨닫고 보듬게 되었으며, 다른 이를 더 세심히 배려하게 되었다.

버릴수록 채워지는 경이를 한층 실감하게 되었고 만남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길을 선명히 보게 되었다.

아내의 부재는 여전히 슬프고 또한 자신이 원했던 생의 그림도 아니었지만,

절대자이신 그분의 인도하심을 믿기에 그는 이제 벅차도록 빛나는 생명의 아름다움마저 누리고 있다.

천 근도 더 되는 시간의 무게를 감당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혼자였다 둘이 되었고 다시 혼자가 되었지만 이제 그의 곁에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힘이 되었던

소중한 두 딸과 사위, 사랑스런 손자가 있다.

더하여 친구라는 이름의 새로운 연대와 인생의 3막을 열 뚜렷한 소망도 생겼다.

그 길을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잘 걸어가길 바란다.

내겐 이 책이 마치 인생 3막을 여는 시작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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