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정해
관정 지음 / 알아차림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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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대승경전은 참으로 어렵다. 반야심경도 마찬가지다. 일반인들 입장에서 보면 문자 너머에 알 수 없는 비의가 숨겨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그 결과 수많은 해설서가 등장했다. 그런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것이, 새로운 해설서가 나와도 모르기는 매 한가지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일은 반야심경이 뭇사람들 앞에 등장한 이래 계속되어온 현상일 것이다.

 

여기 토굴에서 15년간 반야심경을 연구하신 관정 스님이 또 한권의 반야심경 풀이를 내놓았다. 산스크리트 원문과 기존 번역서 8종을 정밀 분석해서 바른 해석(정해)을 내놓았다는 것이 저자인 관정 스님의 입장이다. 아마도 기존에 나와있는 해설서 중에서는 가장 친절한 번역인 동시에 해설서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관정 스님은 기본적으로 한국불교의 기본 노선인 선불교에 대해 대단히 불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불교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부처님 불교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차이로 이른바 무아와 자성을 들어 설명한다. 즉 부처님 불교는 무아를 가르치는데 반하여 선불교에서는 자성을 봐서 견성성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부처님은 나라고 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선불교의 창시자 육조 혜능은 참나가 있으니 그걸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 가르침이 과연 상반되는 것일까? 나는 좀 관점을 달리 한다. 무아는 불교의 근본정신이다. 삼법인 중 하나인 제법무아가 그걸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육조 혜능은 진짜 나라는 것이 있어서 참나(진여)를 찾으라고 한 것일까?

 

나는 그런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육조가 말하는 진여는 곧 무아다. 즉 관정 스님 주장대로 진짜 나가 있으니 그걸 찾으라는 뜻이 아니라 무아를 제대로 보라는 뜻이란 것이다. 진여를 찾다보면 결국 무아를 만나게 되고 그걸 체험하면(見性) 부처의 경지에 도달한다(成佛)는 뜻이다.

 

관정 스님은 육조나 선불교에서 말하는 진여가 결국에는 무아라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계신 듯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아를 가르치시는데 선불교는 그와 달리 진여를 전제로 하여야 하므로 반야심경도 의도적으로 왜곡 번역하였고 그 당연한 결과로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이 훼손되었으며 알 수 없는 내용이 되었다는 것이다.

 

현장이 번역한 반야심경을 봐도 오온개공이라고 했다. 사람 즉 나라는 존재는 색수상행식 즉 오온이 인연에 따라 결합되어 형성된 것이다. 그게 공하다는 것이다. 즉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즉 무아의 가르침이다. 이게 왜 왜곡이고 잘못되었다는 것일까?

 

선불교인 조계종의 기본경전인 금강경에도 무아의 가르침이 핵심을 이룬다.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아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만일 관정 스님 주장대로 선불교가 참나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걸 찾아야 한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아상을 부정하는 금강경을 근본경전으로 채택했을까?

 

관정 스님의 시각에 따르면 적어도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채택하지 않았거나 번역시 그런 문구는 삭제하지 않았을까? 어찌하여 선불교의 실질적 창시자인 혜능 스님은 아상을 부정하고 무아를 가르치는 금강경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질까?

 

나 역시 선불교는 지극히 중국화된 불교라고 생각한다. 돈오돈수가 과연 가능한지 나같은 범인 수준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나는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 다시 말해서 무상정등각으로 가는 길이 부처님이 가셨던(수행했던) 바로 그 길만이 유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견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의 경지를 이해하기 쉽게 공간적으로 서울에 가는 것에 비유한다면 어찌 한 길만 있겠는가? 걸어가는 방법도 있고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고 KTX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으며 비행기를 타고 갈 수도 있다. 앞으로 전혀 새로운 이동수단이 등장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선불교는 중국 사람들이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방법을 인도와는 다르게 자신들에게 맞도록 개량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종교는 어차피 믿는 사람들이 몸담고 있는 지역의 문화와 결합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의 수행도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이 아니다. 기존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많이 답습한 것이다.

 

힌두교라는 종교적 배경 없이 어떻게 불교가 배태되었겠는가. 부처님이 기존 종교와 문화적 배경을 수단으로 자신의 방식을 개발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듯이 중국의 선사들은 자기들 방식을 적절히 가미하여 부처의 경지 즉 불지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이다. 그게 바로 선불교 아니겠나?

 

중국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이른바 도를 찾아 헤멘 수많은 선대 스승들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노자와 장자다. 특히 장자의 내편을 읽어보면 부처님이 말씀하는 깨달음의 경지와 비슷한 가르침이 놀라울 정도로 많다. 어쩌면 장자가 이른 경지도 부처님의 깨달음과 거의 같을 수 있다.

 

중국인들은 부처님의 경지에 가기 위해 자기들에게 대단히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노자와 장자의 방식을 적절히 혼합하여 수백년에 걸쳐 선불교를 형성한 것이다. 그걸 마치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문제가 있는 시각이 아닐 수 없다.

 

부처님은 그분 스스로 자신의 가르침을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 즉 뗏목에 비유하셨다. 강을 건넜다면 즉 정각을 얻었으면 수단에 불과한 뗏목은 버리라는 것이다.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물며 중국의 선사들이 피안으로 건너가기 위해 중국인들인 자기들 몸에 맞게 배를 개량했다면 그게 왜 문제가 된다는 것인가?

 

지금 관정 스님의 주장은 부처님이 만든 뗏목만 옳다는 것과 같다고 본다. 나는 오히려 그게 더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천태의 방식이든 혜능의 방식이든 임제의 방식이든, 도피안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송나라때 육조가 하지 않았던, 화두를 드는 간화선이 등장한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 뗏목에 다른 기구를 더 단 것에 불과하다.

 

선사들이 해보니 화두를 들면 말이지, 저쪽 깨달음의 세계로 좀 더 용이하게 갈 수 있으니 제자들에게 그걸 권유한 것이다. 물론 일부에는 그렇게 해서 정말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이른 선사가 있는지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반대의 항변도 가능하다. 부처님 이후 소위 여래선으로 무상정등각을 성취한 수행자가 과연 있는가?

 

지금 태국이나 미안마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스님들은 과연 불지에 간 것인가? 그걸 누가 보장하는가. 어차피 애매하고 확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여래선이나 조사선이나 마찬가지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하면 확실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실제 그런 아라한들이 배출되었다면 어찌하여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했겠는가?

 

그런 방법으로 득도하는 것이 힘들었거나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인도불교가 쇠퇴한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보시라. 부처님이 계속해서 등장했다면 어찌하며 인도땅에서 불교가 그렇게 쇠락했겠는가 말이다. 이게 바로 여래선만이 유일한 뗏목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의 맹점이다.

 

요즘 들어 한국불교에서는 니까야, 아함경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점차 세를 얻고 있다. 지나치게 중국에 편중된 수행론에 대한 반성이다. 긍정적인 면도 있다. 본래 부처님의 가르침, 원음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른바 여래선으로 무상정등각을 얻는 수행자가 실제로 나와야 한다. 그 자리 근처에 가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이론만 읊조리는 것...그것이 바로 진짜 구두선이자 부처님이 경계하신 것 아닌가. 깨달음이란 문자 자체가 아니다. 문자를 뗏목으로 삼아 실제 분별과 집착, 탐진치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해야 한다.

 

아함경이든 대승경전이든 그건 뗏목이다. 저 깨달음의 세계로 가기 위한 수단이자 도구라는 뜻이다.

 

물론 나도 선불교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무문관, 벽암록 등을 보면 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는데 좀 안다는 사람들은(큰스님들 포함) 깨달음을 얻으면 저절로 이해가 된다고 한다. 선어록을 탓하지 말고 당신의 무지를 반성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수긍하기 어렵다.

 

나는 중국의 선어록은 부처님께서 봐도 이해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또 다른 시각으로 보면 선사들이 주고받는 선문답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전도된 망상을 끊게 하여 팔정도의 출발점인 바른 견해 즉 정견을 확립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일 지도 모른다. 부처님은 선문답을 접하셨다면 어떤 반응이실까?

 

나는 그런 헛소리는 가르친 적이 없다고 하실까 아니면 여시여시 하면서 내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기가 막한 정견 습득법이 개발됐구나 하셨을까?

 

여래선이든 조사선이든 이건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수단일 뿐이다. 어느 것이 옳은지, 둘다 옳은지 둘다 잘못된 것인지는 가봐야 아는 것이다. 문제는 가본 사람이 이쪽 저쪽 다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관정 스님은 유투브 강연에서 돈오돈수를 비판하면서 그렇게 해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누구냐고 질타했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그건 여래선도 마찬가지다. 여래선을 통해 탐진치를 완전히 벗어나서 분별과 집착을 그리고 고를 여의고 삶과 죽음을 정말 체험적으로 하나로 보는 그런 경지에 이른 수행자, 과연 있을까? 조사선을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입장을 가진 분들은 이런 분을 알고 계시면 좀 알려주시기 바란다.

 

여래선이든 조사선이든 수단이다. 궁극적 목표는 부처님의 경지에 가는 것이다. 백가지 이론적 다툼이 필요 없다. 빨리어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술술 읽히게 즉 가독성 높게 완역하고 또 그걸 지침으로 삼아 수행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지 않는다.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 정각자가 나와야 한다.

 

그래야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뭐가 빠르고 뭐가 더딘지 알 수 있다. 서울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서울 가는 방법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부처님 이후 불교의 현실 아닐까? 이 시대, 한국불교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제2의 부처님의 등장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자리에 가본 사람, 부처님만이 답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 아는가? 여래선이 말을 타고 가는 것이라면 조사선은 KTX를 타고 가는 것인지. 오늘날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땅에 태어나셔서 다시 수행하신다면 자신이 남긴 가르침보다는 선불교 방식을 택하실지,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다. 뭐니뭐니 해도 부처님과 같은 무상정등각에 이른 진짜 선지식만이 답을 줄 수 있다.

 

그런 경지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백가쟁명을 해볼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끝으로 우리가 성철, 탄허, 송담, 진제 등 이른바 큰스님의 가르침을 나름대로 평가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서울(정각)에 도달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가장 서울 근처에 도달한 분들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물론 이건 주관적이다. 적어도 불교에 관한 한 어떤 정교한 이론과 문헌학적 지식을 갖춘 학자의 말보다 성철의 주장에 무게를 두는 이유는 경복궁에 도달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과천 근처에 와서 남태령은 바라봤다는 신뢰 때문 아니겠는가?

 

부산에서 출발해서 경주 근처에 오다가 맴도는 사람보다는 그래도 경기도 땅에 발을 들여본 사람의 말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물론 성철 스님이 과천에는 도달하셨는지 그것도 또 다른 논란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여간 선불교가 무아를 부정한다거나 육조단경의 가르침이 반불교적이라는 관정 스님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선불교에서 참나(진여)를 찾으라는 말은 아무리 찾아봐도 결국 無我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참선을 통해 무아를 체험하는 것이 바로 참나를 보는 것이고 그게 견성성불의 핵심 내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래선의 무아와 선불교의 견성은 궁극적으로 같은 말이라는 뜻이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가르침은 이 점에 있어서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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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차이콥스키 & 힉던 : 바이올린 협주곡
차이콥스키 (Pyotr Ilyich Tchaikovsky) 외 작곡, 페트렌코 (Vasil / DG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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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반에 잠실 롯데홀에서 힐러리한으로부터 사인을 받았습니다. 파보 에르비와 함께 상냥한 표정으로 사인을 해주던 모습이 생각나네요.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좋습니다.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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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모차르트 & 베버 : 클라리넷 협주곡 - Inspiration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외 작곡, 본크 (Hans Vonk / Warner Classics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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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을 들으려고 샀다가 덤으로 베버의 작품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되는 앨범...자비네 마이어의 연주력은 말할 것도 없고 SKD의 유려한 반주 역시 곡의 매력을 최대로 끌어 올리는 앨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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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찬 - 쇼팽 : 연습곡 Op.10 & 25
쇼팽 (Frederic Chopin) 작곡, 임윤찬 (Yunchan Lim) 연주 / 유니버설(Universal)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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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20년 전, 임윤찬보다 18살 선배인 손열음이 쇼팽의 연습곡 음반을 내놨습니다. 손열음에겐 첫번째 앨범이었지요. 18세 손열음과 20세 임윤찬의 연주를 비교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습니다. 둘다 앞으로 오랫 동안 한국 클래식계를 책임질 뛰어난 음악인들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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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모차르트 : 클라리넷 협주곡 K622, 케겔슈타트 트리오 K.498 & 알레그로 [SACD Hybrid]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작곡가, 안스네스 (Leif Ove / BIS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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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연주의 SACD 음반을 단돈 9,400원에 구매할 수 있다니, 정말 매력적이지요.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은 명반들이 많은데, 이 음반은 칼뵘 지휘 음반에 비해 속도감이 있고 경쾌해서 봄다운 느낌이 물씬 배어납니다. 같이 수록된 실내악 2곡도 듣기에 편안합니다.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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