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의 이단자들 - 호크니, 프로이트, 베이컨 그리고 런던의 화가들
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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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미술관련 책들을 읽어보려 한다. 몇권을 읽었지만 목표 대비 한참 모자란다. 마침 을유문화사에서 현대미술의 호크니, 프로이드, 베이컨과 런던의 화가들에 관한 책이 나와서 읽어봤다.

 

대부분의 책은 한 사건 또는 한 사람에 대해 서술하는 편이다. 아르테에서 나온 '뭉크'의 경우는 뭉크의 그림과 그의 삶에 대해 기술했다. 민음사의 '시대를 훔친 미술'은 그림이 그려진 시대상을 읽기 쉽게 풀었다. 허나 현대미술의 이단자들은 chapter간의 개연성을 느낄 수 없었다. 각 chapter가 따로 존재하는 것 같고, 한 chapter안에서도 문단의 단절이 느껴진다. 이 책은 현대 미술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 읽어야 하는 수준이다. 나처럼 미술 전시만 보던 사람은 읽기 매우 어려운 책이었다.

 

대표적인 호크니, 프로이드, 베이컨에 대해 책에서 언급한 부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베이컨

 

"전후 영국 회화는 1945년 4월 런던 르페브르 갤러리Lefevre Gallery에서 열린 단체전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베이컨은 이 전시에 두 점을 출품"했다고 한다. 베이컨이 영향을 받은 대상은 피카소였다고 한다. 책에 있는 '십자가 책형 발치에 있는 형상을 위한 세 개의 습작'을 보면 베이컨의 성향을 대략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다. 그림을 보면' 피카소의 영향을 받았구나'라고 짐작할만하다.
 

베이컨은 "진정한 그림은 우연과의 불가사의한 끝없는 고투"라고 했다. 1946년 본인 스스로 환결됐다고 한 최초의 완성작을 제시했는데 '회화1946'이 그것이다. '회화1946'은 무척 난해하다. 그림은 보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니 해석은 그림을 보는 사람의 입장에 맡기는 게 맞다.

 

책에는 '회화1946'에 대한 이런 설명은 없다. 허나 내 주관적으로 보면 1946년은 세계 2차 대전이 끝났을 때이다. 전후 세계는 살육의 연장선위에 있다. "삶의 총체적인 공포, 다른 생명체를 뜯어먹고 사는 생의 공포"를 상기시켰다는 대목은 나의 삶은 너를 잡아 먹고 살아야 하는 전쟁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프로이트

 

 

"프로이트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삶 자체'를 주제로 다루는, 삶을 '거의 문자 그대로' 미술로 옮기는 미술가로 규정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대상의 '오라aura'를 포함했다. 그에게 '오라'란 대상이 주변 공간에 미치는 영향을 의미했다."

 

프로이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작가들 존스, 호크니, 스미스 등은 화려하고 자유로운 미국을 동경했는데, 프로이트는 런던 서쪽의 작은 동네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를 낡고 몰락해 가는 장소로 이동하게 만든 것은 역설적이게도 현대성이라고 한다. 프로이트가 거주한 곳은 정부에서 철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독한 미술가로 뚜렷한 경제적, 사회적 가치가 없는 존재였던 프로이트는 철저가 예정된 건물에 자리 잡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책에서 "프로이트는 이후 세상에서 잊히는 것이 자신에게 적절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잊힌 채 거의 지하에 묻혀 작업하는 것에는 아주 즐거운 측면도 있었습니다. 나는 결코 관심을 바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금도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한 인터뷰 대목은 프로트드를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 아닐까 한다.

 

프로이트의 '벌거벗은 소녀'를 보면 프로이트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프로이트는 늘 고전 전통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그가 이탈리아 미술보다 프랑스 미술을 좋아한 것도 이 이유였다."고 한다.

 

"나는 내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누드라기보다 벌거벗은 것이라고생각한다. '누드'라는 개념은 어떤 측면에서는 자의식적인 예술적 느낌을 갖고 있고, '벌거벗은' 것은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와 보다 관계가 깊다. 옷을 입고 있지 않은 사람을 그릴 때 나는 초상화법에 대해, 개인의 특유한 형태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라고 했다.

 
호크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3월 22일부터 8월 4일까지 '데이비드 호크니' 전이 열렸다. 누적관람객 30만명이라고 하니 성공적인 전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호크니가 왕립예술학교에 다닐 때, 교수들은 유별난 입학생들이 오랜 경험 중 최악이라고 했다고 한다.

 

호크니는 학교에 적응하면서 추상표현주의 양식으로 크고 느스한 그림을 그렸다. 자칭 "데이비 겸 풀록 겸 힐턴"양식이라고 했다. 무슨 양식인지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호크니가 그랬다고 한다.

 

호크니가 앞으로 나갈 수 없을 때, "정치, 채식 등 다양한 것들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왜 그것을 그리자 않냐고 지적"을 받았고, 호크니는 "'옳은 지적이야. 그게 바로 내가 불만을 느끼는 바야. 나는 결코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있어.' 호크니는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다루는 그림을 그려야 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미술은 전시 위주로 봤고, 미술사를 읽은 것도 현대 미술은 읽지 않아 책을 접하는데 아주 큰 어려움이 있었다. 책 또한 한 사건의 서술이 아닌, 서사적 구조라 현대 미술과 영국의 미술을 아는 분이 읽어야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책이었다. 쉽게 덤비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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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아르테 미스터리 1
후지마루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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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봤다. 그리고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을 읽었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을 읽고 보다 보니 예전에 본 너의 이름은이란 영화가 생각났다. 엊비슷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찾아보니, 이런 소설을 라이트 노블(Light Novel)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뭉글뭉글한 느낌을 주는 라이트 노블. 연애세포가 지워진 중년에게 라이트 노블이 지대로 먹혔다.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은 봄철의 소나기와도 같았다. 봄은 잊었던 새 생명이 피어난다. 그냥 이렇게 황무지 같은 세상이 지속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쯤,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았지?’라며 지난날의 기억을 소환하고, 다시금 우리의 앞날은 화창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의 원제는 시급 300엔의 사신이다. 제목에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사신도 돈을 받고 하는 일이었다. 산자가 죽은 자를 위해 노동을 하기에 일정 금액을 준다.

 

죽은 사람 중 미련이 남은 사람이 사자가 된다. ‘사자는 자신이 죽었던 때부터 이른바 추가시간을 얻어 미련을 해소한다. 이 추가시간이 얼마가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끝은 반드시 존재한다.

 

사자의 미련을 풀어주는 사람이 사신이다. 사신은 특별한 능력은 없다. 다만 죽은 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역할만 할 뿐이다. 미련이 남은 사자가 되면, 사자와 사신만 기억할 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 ‘사자중에서도 사신이 되기도 한다. 이게 이 소설의 포인트이다.

 

사쿠라()는 하나모리에게 사신 아르바이트를 제안받는다. 그러고 처음 만난 사자가 아사쓰키다. 아사쓰키와 사쿠라는 좋아하는 사이였다. 사쿠라는 아사쓰키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아사쓰키와 이야기를 나눈다. 며칠이 지나고 아사쓰키 집을 찾았을 때, 아사쓰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쿠라는 하나모리에게 왜 사실을 알리지 않았느냐고 화를 낸다. 어젯밤 아사쓰키와 이야기를 할 때 대답하지 못한 게 맘에 걸렸다.

 

아사쓰키가 떠나고 나면, 아사쓰키가 추가시간에 했던 말과 행동은 오로지 사신만 기억할 수 있다. 사신 아르바이트는 6개월이면 종료된다. 사쿠라는 아사쓰키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다. 6개월 후면 이 역시 잊겠지만.

 

하나모리와 사쿠라는 이후 여러 사자를 만난다. 사쿠라가 만난 사자 중, 마지막은 하나모리였다. 사자는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는데, 하나모리가 갖게 된 능력은 시간을 멈추는 능력이다.

 

하나모리는 사쿠라를 만나려고 하지 않다가 사쿠라를 받아들이고 마지막 추가시간까지 행복한 추억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둘은 세상이 정지된 시간 속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이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겠지만.

 

하나모리가 떠나는 날, 둘은 멈춘 시간 속에서 손을 잡는다. 이 시간이 멈춰지길 바랬던 것처럼. 하지만 하나모리가 떠나고 시간은 다시 흐른다.

 

우린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한다. 행복에 취해 더 기쁜 감정을 바라기 때문이다. 반면, ‘시간이 빨리 흘렀으면 좋겠어.’라는 말도 한다. 지금의 어려움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것이다. 둘은 멈춘 시간 속에서 행복을, 아쉬움을, 연민을, 사랑을 느끼며, 시간 속에서 이별을 했다.

 

라이트 노블은 무거운 주제를 설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잠시 놓고 살았던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명제를 다시 기억하게 해준다. 중년의 심장을 뛰게 한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이었다.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난 그 사람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 속에서 기억되고 있을까?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나는 너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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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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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는 고갱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라고 한다. 꼭 고갱이라고는 말 못한다고 하지만, 서머셋 몸이 타이티를 가면서 고갱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글을 썼으니 고갱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고갱을 말하면 고흐가 따라온다. 둘은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고갱과 고흐는 아를에서 함께 지내기도 한다. 고흐의 '아를의 포룸 광장의 카페테라스'를 보면 한적한 아를의 거리를 느낄 수 있다. 


▲ (왼쪽) 반 고흐, 아를의 지누부인, (오른쪽) 고갱, 아를의 밤의 카페 : 지누부인

고갱과 고흐를 이야기하면 '지누부인'을 빼놓을 수 없다. 선술집을 운영하는 지누부인은 고갱의 그림이 더 사실적이다. 허나, 고흐는 지누부인이 원하는 삶을 그려 지누부인이 더 좋아했다고 한다. 사실을 그리냐 대상자의 이상을 그리냐는 온전히 화가의 몫이다. 누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는 아니다. 난 고흐와 고갱을 말하면 '지누부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다시 달과 6펜스로 돌아오자. 달과 6펜스의 제목을 예전부터 들어봤다. 그런데 왜 달과 6펜스일까?라는 고민은 그리 하지 않았다. 좀 멋져 보이는 제목이긴했다. 책의 해설에서 달은 영혼과 관능의 세계, 본원적감성의 삶을 의미하고, 6펜스는 돈과 물질의 세계, 천박한 세속적인 삶을 가리키며 사람을 문명과 인습에 묶어두는 견고한 타성적 욕망을 암시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럴까? 뭐 의미가 그렇다면 그렇다고 하자.

찰스 스트릭랜드는 잘나가는 중권 중개인이다. 그런데 어느날 아내에게 이별을 선고한다. 여자가 생긴 것도 빚이 있는 것도 아닌, 요즘 표현대로 하면 졸혼을 이야기한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스트릭랜드는 영국을 떠나 프랑스로갔다. 프랑스에서 어렵게 생활하며 그림을 그린다. 스트릭랜드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가족과 이별을 택했다. 

보편적으로 인간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건 가족이다. 가족을 버린다는 건 자신의 모든 소중한 것을 버리고서도 그림을 향한 욕망이 강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돈잘버는 직업,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스트릭랜드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다.

프랑스에서 건강이 악화된 스트릭랜드. 정이 많은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온다. 스트로브의 아내 볼란치는 스트릭랜드를 싫어했다. 하지만 스트로브의 간청으로 셋은 한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건강을 찾은 스트릭랜드.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에게 집에서 나가 달라고 한다. 이를 어쩐다. 스트로브의 아내 볼란치가 스트릭랜드와 함께 나간다고 한다. 바보같은 스트로브는 둘이 집에 있으라 하고 자신이 집을 나간다.

스트릭랜드와 볼란치의 미묘한 동거는 오래가지 않았다. 가족까지 버린 스트릭랜드는 볼란치를 그린 후 그녀를 떠난다. 볼란치는 괴로워한 나머지 음독자살을 시도한다. 바보같은 스트로브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허나 볼란치는 약물로 인해 식도가 녹아버렸고, 병원에서 쓸쓸하게 죽는다.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가 떠난 자신의 집에서 그림을 하나 발견한다. 스트릭랜드가 그린 아내 볼란치다. 그림을 찢어버리려고 했지만 그림에 감탄하고, 모든 짐을 싸서 고향인 네덜란드로 돌아간다.

스트릭랜드는 행방이 묘연했다. 수소문한 결과 타히티로 갔다는 이야기를 전해듣는다. 타히티에서 스트릭랜드는 현지인 소녀 아타와 함께 산다. 문둥병에 걸린 스트릭랜드는 자신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린다. 죽음이 가까워져 왔을 때 눈까지 먼 스트릭랜드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스트릭랜드는 죽을 때 아타에게 부탁을 한다. 자신이 그린 그림과 함께 태워달라고. 탁터 쿠트라가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보고 명작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아타는 스트릭랜드의 유언에 따라 모든 그림을 태워버렸다.

스트릭랜드 사후 그의 그림은 모든 이들에게 찬사를 받는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담담하게 맞이한다. 유명화가의 부인의 모습으로. 

고갱과 스트릭랜드는 정확히 매치하지 않는다. 허나 그림을 사랑한 두 사람의 일생은 엇비슷하다. 예술은 제정신으로 못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예술인의 삶이 평범하면 작품에 나타나는 심묘함이 떨어진다. 굴곡적인 삶이 있어야 작품도 명성을 얻는다. 삶의 가시가 누군가에겐 일상의 스크래치처럼 깊이 남으니.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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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와 선비 - 오늘의 동양과 서양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백승종 지음 / 사우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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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환영 그리고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 
기사도라고 하면 예와 충절, 약자에 대한 연민이 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의 근저는 만들어진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사는 일종의 폭력집단이었다고 한다. 무기와 갑옷을 독점적으로 소유했기에 편민들을 약탈하고 잔학행위를 일삼았던 부랑배나 다름 없던 기사들. 기사들은 전쟁이 있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기사들은 중앙정부의 도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기술이 발달한 16세기가 되면서 기사는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졌다. 총과 대포의 위력 앞에서 칼과 방패는 무력했기 때문이다.

중세는 기사의 시대였다. 기사의 시대 기사문학이 빠질 수 없다. 기사문학은 서정시와 서사시로 나눴는데, 서정시는 프랑스 남부비장에서 발전했고 주제는 연애였다. 연애시 작가를 트루바두르(troubadour : 음유시인)이라 불렀다. 프랑스 북부에서는 서사시가 유행했다고 무공을 서술한 작품이 많았다. 프랑스 북부 기사문학의 작가들을 트루베르(trouvere : 음유시인)이라 불렀다. 

독일 기사문학을 대표하는 서사시는 니벨룽의 노래이다. 영국은 아서왕의 전설, 스페인은 로드리고 다아스 데 비바르의 일대기다. 또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빼놓을 수 없다.

기사도 사회의 한 구성원이다.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기사, 즉 젠트리의 역할은 지대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일까? 작가는 젠트리를 이유로 꼽는다. 젠트리는 지주였다. 따라서 경제적 자유주의를 추구했다. 영지 규모에 따라 젠트리는 네 가지 계층으로 구분했다. 준남작(baronet), 기사(knight), 향사(esquire), 신사(gentleman)이다. 젠트리는 지주이기에 자본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종교개혁을 지지했고, 인클로저 운동을 주도했다. 

기사는 평민에게 폭력을 가했다. 세월이 지나고 자본주의를 추구한 젠트리(기사). 그럼 기사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기사도는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일까? 이는 사회의 변화와 연관이 된다. 책에서는 기사도라고 하지 않고 신사도라고 하기에 신사도라고 하겠다.

신사도는 18세기에 다시 떠오른다. 봉건질서가 무너지도 새 질서가 확립되지 않은 시기이다. 시민의 교양을 강조하는데 스포츠를 이용했다. 스포츠맨십의 핵심은 세가지다. 첫째, 경기자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줄 알아야 한다. 둘째, 상대방을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대한다. 셋째, 승부에 관계없이 페어플레이를 펼친다. 

요즘에도 이런 스포츠맨십을 강조한다. 페어플레이상도 이런 맥락이다. 영국의 퍼블릭스쿨은  스포츠맨십을 강조한다. 퍼블릭스쿨은 젠트리 자녀들이 나니는 학교였다. 영국의 미래를 짊어질 지도자를 양성하는 학교에서 기사도를 구현하라고 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럼 우리나라 선비는 어땠을까? 선비라고 하면 당쟁이 떠오른다. 치고 박고 너죽고 나 살자며 당쟁을 펼치는 사람들. 허나, 선비가 꼭 그런 사람들만을 지칭하는 건 아니다. 

선비는 성현의 글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성현은 성인 공자와 현인 맹자를 말한다. 수기치인()이 선비가 나아가야 할 바를 말한다. 선비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회복하는 것에 가장 관심을 가졌다. 허나 선비도 세상 살아가는 한 인간이다. 모든 인간이 가르침에 만족할까?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수가 있지?", "이런 행동을 하다니, 사람도 아냐!!!" 

사람이기에 가장 잔악하고 악랄하다. 우리나라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육식동물을 결코 다른 동물을 재미삼아 죽이지 않는다. 자신이 먹고 살려는 생명 연장으로 먹이를 죽인다. 하지만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살인을 한다. 인간종은 그렇다. 그러니 "사람이 어떻게 저럴수가 있지?"라는 말은 모순이다. 

조선에선 서얼 차별이 있었다. 차별을 하려면 씨를 퍼트린 놈을 차별해야지 외 서얼을 차별했을까 싶다. 여튼 양반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위해 서얼 차별을 공고히 했다. 공자, 맹자의 윤리 도덕을 내새웠지만, 공자 맹자는 서얼차별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선비가 언급했던 공자는 서얼 출신이었다. 

조선의 선비는 마을을 주 활동무대로 했다. 서당이 많았던 것도 선비가 마을에서 역할을 했던 걸 증명한다. 이후 항일 운동에서도 선비의 역할이 있었다. 1927년 청주에는 총 202개의 서당이 운영됐다. 마을 계몽에도 선비의 역할이 있었던 것이다.

기사도, 부시도, 선비. 세상을 살았던 문화적, 시대적 배경이 조금 다르기도 했고, 같기도 했다. 나라를 나누기 보다 사상적 기반과 시대상을 살았던 여러 사람들의 시대정신이라고 보면 옳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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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민의 한양읽기 : 궁궐 하 홍순민의 한양읽기
홍순민 지음 / 눌와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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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하

상권에서는 전체적인 역사와 궁궐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봤다면, 하권에서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다. 목차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이 경복궁과 창덕궁에 대한 이야기다.

조선시대의 궁궐이 온전히 남아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태조 초년에 세워져서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기까지 줄곧 그랬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 만나는 경복궁은 그 경복궁이 아니다. 임진왜란 이후 270여 년이나 지난 고종 초년에 중건한 경복궁, 또 그것마저도 이리저리 헐리고 왜곡된 끝에 남은 경복궁이다. 복원한다고 하면서 다시 지은 부분도 적지 않지만, 여전히 옛 분위기는 느끼기 어려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p 32~33)”

32에서 33페이지에 나오는 경복궁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는 다르다. 궁궐 내 건물이 빼곡히 들어찬 모습이다. 지금의 경복궁은 텅 빈 공간이 많다. 현대적으로 지어진 깔끔한 궁궐을 보면,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다. 조선시대가 아닌 2017년의 경복궁의 모습을 세월을 온전히 담고 있기 보단, 세월을 빗겨간 경복궁의 모습이다.

경복궁을 들어가다 보면 금천이 있고, 다리를 놓아 금천교가 있었다고 한다. 경복궁의 금천교 이름은 영제교. 옛날에는 서입동출이라고 해서 서쪽에서 들어와 동쪽으로 물이 흘러가는 것이 좋았다고 여겼다고 한다. 허나, 지금의 경복궁에서는 볼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가 얼마나 엉망인가를 절실히 느낄 수 있다.

경복궁 근정전 천장에는 쌍룡이 있다고 한다. 들어갈 수 없으니 직접 보긴 힘들 것이다. 용은 발톱을 봐야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용의 발가락이 대개 다섯개라고 한다. 이를 오조룡이라고 한다. 7개는 황제를 말하고 격이 높을 것을 상징한다. 근데 근정전 용의 발톱은 7개다.

고종 초년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계조당을 지었다고 한다. 왕세자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허나, 일제에 의해 왕비가 살해 된 후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간 후 경복궁에 임어하지 않았다. 왕세자 역시 임금을 따라 가야 했기에 경복궁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주인을 잃은 계조당은 사라졌다. 안타까운 부분이다.

책의 많은 부분이 경복궁을 담고 있다. 법궁이기 때문이겠지만, 경복궁 이야기만 할 수 없으니 창덕궁으로 넘어가보자.

창덕궁 하면 떠오르는 게 비원이다. 허나, 비원으로 부르면 안된다. 이 역시 일제 남긴 역사 왜곡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창덕궁의 후원은 익히 들었을 것이다. 산자락을 가꾸어 만든 숲을 원유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후원, 북원 금원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창덕궁 후원을 관리하는 부서의 명칭이 비원이었다. 일제가 창덕궁과 창경궁 후원을 비원이라고 불렀고, 일반인도 관람할 수 있게 개방했다고 한다. 벤또 먹고 사쿠라 구경하고 동물원 식물원을 구경하게 되어 버리면서 비원이란 말이 됐다고 한다. 해방이후 지금까지 비원이라고 불리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나 역시 비원이라고 불렀다. 일제 식민지 기간에 우리의 문화와 정신은 말살에 가까운 유린을 당했다. 지금도 그렇다. 아직도 비원이라고 부르는 이가 많기 때문이다.. 용어 하나 하나가 문화고 역사인데.

창덕궁에 갔을 때, 금천교와 진선문이 삐뚤어져서 이상했었다. 책을 보니 제대로 된 것이 아니었다. 이 역시 일제시대때 위치와 방향, 모양이 바뀐 것이라고 한다. 해방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니 한심하다.

창덕궁에 갔을 때 인정전을 자세히 보지 않았다. 그런데 책에서 보니 인정전에 샹들리에가 달려 있고, 전돌마루, 커튼이 달려 있다. 일제가 조정을 연회장으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대한제국을 부정하고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제의 의도였던 것이다. 역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의미에서 그대로 남겨둔 것이겠지.

창덕궁 후원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는데, 후원은 직접 가보는 것이 좋다. 고궁 통합관람권이 1만원이다. 후원관람비용도 포함된다. 1달 내 궁궐과 종묘까지 관람이 가능하니 직접 가보는 것도 좋겠다.

청경궁은 그리 자세히 관람한 적이 없다. 창덕궁에 갔을 때, ~익 돌아본 정도다. 창경궁은 창경원이라고 불렸다. 나 역시 어렸을 적 창경원이라고 불렀다.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 궁궐이 동물원이 됐었다.

창경궁 후원에는 온실이 있다. 창덕궁 후원을 관람하고 창경궁에 갔을 때, 셀카를 찍는 이들을 많이 봤다. 창덕궁 온실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온실이다. 참 아이러니하게 일제가 지은 건물이 창경궁의 명소가 되다니. 허나, 잘 모르는 이들도 많다. 조선시대가 아닌 현대에 지어진 온실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이 보았다.

창경궁 내 춘당지도 그렇다. 임금이 농사에 관심을 갖고 살펴보기 위해 논을 만들었는데, 일제가 논을 파서 춘당지로 만들어 버렸다. 작은 호수여서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왜곡된 모습이 아름다운 모습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이다. 청덕궁 후원에도 벼를 심은 곳이 있다. 조선은 농업국가였다. 당연히 논농사가 어떤지 궁금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이 아닌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 뒤에 있는 경희궁. 난 경희궁에 한 번도 가본적이 없다. 책의 내용만 봐서는 경희궁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조만간 다녀온 후에 책을 다시 봐야겠다.

다음으로 경운궁이다. 경운궁은 지금 덕수궁으로 불린다. “덕수궁은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난 후 전 황제로서 살게 된 곳의 이름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덕수궁은 궁궐의 이름이 아니다. 이곳을 덕수궁으로 부르면 그 이전 대한제국 광무 연간의 궁궐이라는 뜻이 실종될 우려가 있다.(p 481)”

저자는 덕수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불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궁궐이름을 우리가 불러야지, 일제 시대 때 붙여진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것이 말이 되는가?

경운궁 주변에는 미국, 프랑스, 영국, 러시아 영사관이 있었다. 지금도 있다. 경운궁이 궁궐의 모양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것은 당시 이 영사관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동야행에서 처음으로 중명전을 관람했었다. 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 그렇게 정동을 다니면서도 중면전이 있는 줄 몰랐다. 중명전은 한동안 민간 사무실로 사용됐었다고 한다. 이 무슨 말도 안되는 행정이란 말인가?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상, 하권을 읽다 보면 참으로 답답한 부분이 많다. 나 또한 잘못 알고 있던 부분이 많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말을 참 많이 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도 제대로 모르고, 궁궐의 명칭도 일제 시대의 명칭을 사용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어느 정도 이해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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