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의 3주기를 맞아 펴낸 책이다. 인간 고원중, 의학자 고원중의 삶을 재조명하고 그가 한국의료계에 남기고 간 의미들을 일대기로 되짚어본다. 1장에서는 출생과 학창시절을, 2장에서는 서울의대생 시절의 모습을, 3장에서는 결핵을 전공한 이후 고원중의 삶을, 4장에서는 본격 의학자로서 그리고 교수로서의 업적들을, 5장에서는 국제적 명성을 획득하는 등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는 과정을 그렸다.
마지막 6장과 부록에서는 별세 이후 고원중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추모 글을 실었다. 유족에게도, 고인의 동료 및 후학들에게도, 그의 진료를 받았던 환자들에게도 고인의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하겠지만 고원중의 생애와 업적을 정리한 이 책이 조그마한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최근작 :<호모 사피엔스 씨의 위험한 고민> ,<[큰글자책] 참의사 고원중> ,<참의사 고원중> … 총 34종 (모두보기) 소개 :의료와 생명윤리 분야에서 활발하게 강연과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의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가천의대를 거쳐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교육학교실에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전염병의 문화사》(공저) 《생명 윤리 이야기》 《줄기세포연구자를 위한 생명윤리》 등이 있으며 《도둑 맞은 미래》를 우리말로 옮겼다.
2019년 8월 21일,
의료계는 깊은 탄식에 빠졌다
한 달 뒤면 고원중 교수의 3주기다. 2019년 8월 21일, 결핵·비결핵항상균(NTM) 분야 권위자였던 고 교수는 아내 이윤진 씨에게 “밖에 비가 오는데, 우산 못 갖다 줘서 미안해”라는 말을 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삼성서울병원 호흡기내과가 주관한 환송회를 다녀온 직후였다. 그날, 환송회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6월 30일, MBC <실화탐사대>에서는 고인의 극단적 선택을 담은 ‘버려진 의사’ 편이 방영되었다. 유가족은 2010년부터 고 교수가 동료들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했으며, 인력 충원을 요청한 병원에서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고 토로했다. 사실 고 교수는 삼성서울병원에서 결핵·비결핵항산균 환자를 진료했던 유일한 의사였다. 더군다나 그는 가히 한 사람이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연구 성과도 내고 있었다. 국내의 수많은 환자들이 그에게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매주 80~100시간을 일해야 했고, 인간관계를 위한 회식이나 골프에 참석하는 것은 사치였다. 당시의 고 교수는 상이란 상은 다 휩쓸고 있었으며, 호흡기내과에서 생산되는 연구업적의 상당 부분에 기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동료들은 그를 경원시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갈등은 메르스 사태를 거치며 극대화되었다. 그 결과 고인은 과의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은근히 소외되었고, 그의 주장이나 요구 역시 심심찮게 묵살되었다. 마지막으로 자리했던 환송회라고 다르지 않았다. 당시, 환송회에 함께 자리했었던 전경만 교수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8년간 호흡기 내과의 발전에 기여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긴 분에 대한 존경심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환송회라기보다는 비서 환송회와 겸한 형식적인 모임, 오히려 자리 내내 고원중에게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자리”_181쪽
2022년 7월 현재,
유족은 또 다시 비극을 맞았다
3년 전, 고인의 비보를 가장 안타까워한 이는 유가족과 그의 환자들이었을 테다. 고 교수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이후 ‘비결핵성항산균폐질환모임’과 같은 환우 카페에는 추모글이 넘쳐났고, 곧 3주기가 도래하는 현재에도 여전히 고인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다 최근 몇몇 언론과 미디어에서는 고인의 죽음만큼이나 통탄스러운 소식을 보도했다. 고 교수의 죽음을 ‘직무상 재해’로 인정할 수 없다는 사학연금공단 측의 입장이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고 교수는 매주 100시간가량의 근무를 소화해야 했고, 만성적인 디스크 증상은 악화되어 갔다. 그러나 그를 병들게 한 ‘업무과다’는 디스크 치료에 반드시 필요한 휴식과 운동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진통제에 의존하며 진료와 연구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너져버린 정신과 육체의 틈 속으로 파고든 번아웃과 우울증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건 시간문제였다.
유족은 고 교수가 생전 만성 과로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번아웃 상태에 놓이는 등 정신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의학적 소견이 담긴 심리부검 감정서와 직업환경의학과 의학감정서, 동료 의사들의 진술서 등을 제출, 직무상 유족보상금을 청구했다. 그러나 사학연금공단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고 교수의 죽음을 직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유족은 고 교수의 생전 가치관이었던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라는 뜻을 이어 사학연금공단을 대상으로 한 소송 준비에 있다. 보다 구체적인 자료는 이 책의 5부와 6부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의료윤리 분야 연구의 권위자가 바라본
고원중의 생애
이 책에는 ‘연구와 진료에 매진하다 스러진 어느 의사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있다. 자칫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는 이 한 문장이 사실은 얼마나 많은 비극을 딛고 서 있는지, 책을 펼쳐보기 전까지는 알 길이 없다. 2019년 여름, 동기회로부터 부고 문자 한 통을 받았던 권복규 교수도 그랬을 것이다. 권 교수는 고인의 두 해 후배이자 의료윤리 분야 연구의 권위자로 이 책의 저자다. 서문에 따르면 권 교수는 “고인과는 과히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유족들과는 더더욱 인연이 없었으나 고원중의 죽음 이후 유족들과 연락이 되고 몇 가지 소소한 일을 도우면서 고원중 형을 이렇게 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후 여러 동기들이 뜻을 같이하여 힘을 모아주었던 것이 <참의사 고원중>의 초석이 되었다.
의료윤리 연구자일 뿐만 아니라 의사학자이기도 한 저자는 감정은 최대한 배제한 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고인의 생애를 기술해 나간다. 출생, 유년기, 학창시절을 시작으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의료인으로서 본격적인 삶을 살아가던 시절, 세상에 고원중이라는 이름이 불꽃처럼 타오르던 시간, 끝내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말았던 순간들을 가감 없이 나열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행간에서 한국 의료의 문제점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현재와 같은 의료 상황에서는 훌륭하고 뛰어난 의사일수록 희생당하기 쉬우며,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로부터 의미 있는 진료를 받기 원한다면 전 국민적인 공감과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 말이다. <참의사 고원중>의 어디에도 ‘추모집’이라는 표현이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책은 단순히 고원중의 죽음을 애도하고 기리기 위한 묘비가 아니다. 성격으로 보자면 오히려 ‘평전’에 가깝다. 개인의 일생에 관하여 평론을 곁들여 적은 전기 말이다. 저자는 망인의 어릴 적 친구, 후배, 동기 등 고원중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들려줄 수 있는 지인들을 인터뷰하였고 연관된 자료들을 심도 있게 정리 및 분석했다. 그들로부터 받은 사진 자료는 무채색 텍스트에 생기를 더한다.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2010년 이후의 시점부터는 예리함을 한층 더 높였다.
고원중에 대한 훗날의 평가는 후인들의 몫이 될 테다. 누군가는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그의 생애를 파헤쳐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만큼은 자상한 남편, 존경스러운 아버지, 합리적이고 의리 있는 선배이자 스승으로 기억되고 있다. 업적과 치적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3주기를 앞두고 고인과 유족이 다시 3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가슴 아프다. ‘직무상 재해’를 인정받기 위한 소송 준비에 있기 때문이다. 쉽지 않을 법정공방이 예견되는 현 시점에서 오늘날 존재하는 어떤 자료보다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이 책이 고인의 희생보다 더 밝은 미래로 환원되기를 바란다.
|고원중 약력|
1967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85년 서울대학교 의예과에 진학하였다. 본과에 진입해서는 ‘송촌’ 동아리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청년의사』 발간 편집위원회에서도 활동하였다. 1994년 3월부터 1998년 2월까지 서울대병원 내과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하였고, 1996년 무렵에는 호흡기내과, 그중에서도 결핵을 전공으로 선택하였다. 2004년 삼성서울병원 내과, 성균관의대 내과학교실의 조교수로 임용되면서 본격적인 커리어를 쌓아나갔다. 2002년 10월부터 2004년 9월까지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진폐정도관리 실무위원회 위원을, 2004년부터 2011년까지는 산업재해보상보험심사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냈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는 대한결핵및호흡기학회 보험위원과 결핵퇴치공공민간협력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는 질병관리본부 검진기준 및 질관리반 20대·30대 검진분야 결핵 전문기술분과 위원을 역임했다. 이후에도 질병관리 본부 등에서 결핵과 관련된 위원회에 그의 이름이 빠지는 적은 없었다. 결핵과 관련된 업적으로 국무총리표창을, 제42회 유한의학상 대상과 제12회 화이자의학상을 받았다. 2019년 1월, 53세의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 의학한림원 정회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