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학 (시인) : 여기 가족(들)을 필경해야만 하는 권리가 있다. 시집은 온통 할머니, 엄마, 남동생, 자신의 아이, 심지어 계모와 이복언니까지 등장하는 나무형(Tree Structure)이라는 가계도의 형식을 따라간다. “찢어지거나 구겨지거나 버려지는”(「철거 통지문」) 가족사는 시인에게 “그렁그렁 괴어 있는”(「숨바꼭질」) 유일한 방법이다. ‘자정이 있는가?’라는 의문이 품는 울음을 담는 욕조, 그게 “손과 발을 만들고 외로움을 만들었”(「욕조에서」)다. 물의 외로움이라는 깊이에 엄마가 있다. 시인의 탄생은 “엄마가 만들어내는 가장 슬픈 자리”, 이것은 발명일까. 차라리 “엄마를 지목하”고 “엄마를 의심”하고픈 욕망이다. “세상에서 내 대답을/ 가장 믿지 못하는 사람”(「죽은 신부의 얼굴」)이기에 엄마를 떠나 ‘새로운 얼굴’을 꽃피우고자 한다. 엄마에의 투영은 “나는 죽어서도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살아 있는 독백을 반복하면서, “낮에도 죽은 사람들을 보고 다”(「꽃놀이」)닌다. 엄마 대신 등장하는 할머니가 ‘검은색 세월’로 이미 ‘죽은 할머니’인 것조차 놀랍지 않다. “늬 엄마가 너를 몇 번이나 흘릴 뻔 했단다”(「공기놀이」)라는 할머니 말을 믿으면서, “얼굴보다 손바닥이 먼저 늙는”(「손금」) 유년기가 지나갔다. 엄마가 되려 하고 엄마가 된 가족사에서 태어난 벚꽃의 아이들은 “내가 나를 지나면서 두고 온 아이들”(「가임기의 나를 지나는 아이들」) 또는 “우리는 하나이거나 둘”이다. 너/ 아이 속에서 나/ 엄마를 보는 나무형 가계도가 다시 자란다. 때로 “발 하나 들어 있지 않”(「신발」)다는 신발, 때로 “나는/ 나를 만신창이로 만들 수 있는”(「가위바위보」) 놀이, 때로 “집을 보러 다니듯 나무들을 보러 다”(「나는 죽어서도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니는 나무, 때로 “꽃잎이 커다란 아홉 송이 홍작약은/ 수백 번 내 손에 포개지던 손”(「죽은 신부의 얼굴」)들처럼 몸을 통과하는 것들은 죄다 가족이라는 얼굴/ 기억을 가졌다. 스스로 위로하는 몸의 다른 의무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 마음껏 파괴되었던 무릎의 문양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