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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때 소년병으로 서부전선 고랑포 104고지전선에 참전한 적 있으며 1964년 경향신문 기자 입문 이후 경향신문 대구.경북취재팀장, 부산취재팀장, 경기일보 정치.경제부장 및 편집국장, 중부일보 편집국장 등을 두루 거치며 기자로 평생을 살아 온 윤오병 저자가 기자로서 취재해 온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편린들을 풀어낸다.

윤오병 저자의 인생을 간략하게 풀어낸 1~2부를 지나 3부 '판문점, 서부전선, 그리고 1.21사태'에서는 휴전 직후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과 교전, 대한항공 KAL기 납북사건,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무장간첩 김신조 일당의 서울 침투 사건 등을 다루며 전시와 별 다를 것 없이 긴박했던 당시의 남북대치상황을 되새길 수 있게 해준다.

박정진 (문화인류학박사, 세계일보평화연구소장)
: 기자정신으로 똘똘 뭉친 일대기에 고개 숙여져

대선배의 일대기에 추천사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송구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청에 쾌히 응한 것은 선배가 베풀어준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필자가 처음 윤오병(尹五柄) 국장을 만난 것은 (주)문화방송경향신문 지방기자공채 시험을 거쳐 대구지사에 발령을 받고서이다. 당시를 회고해보면 햇병아리 기자에게 윤 국장님은 취재반장으로서 큰형님 같은 존재였다. 전형적인 미남형에다 인심 좋아 보이는 그가 한때 ‘판문점 출입기자’로서 휴전선 일대에 명성을 날린 무용담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함께 근무한지 한 달쯤 되어서였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솔선수범하는 모습, 신문사 깃발을 휘날리면서 취재현장을 누비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대구서문시장(1975년 11월 20일)에 큰불이 났을 때 신출내기 기자였던 필자도 함께 뛰어다녔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는 선배의 모습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로부터 은연중에 기자의 여러 모습을 배우려고 애썼던 자신을 회고하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이번 일대기 원고를 보면서 선배님이 6.25 때 ‘소년병’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접하고 놀랐다. 제1부 화보에 따르면 “윤오병은 101사단 103연대 소속 문서통신 연락병(messenger)으로 임진강 북방서부전선 고랑포 104고지 전투에 참전하여 6·25종군기장(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을 수령했다. 휴전되기 직전 연령 미달로 귀가조치 됐다. 소년병 윤오병은 왼쪽 가슴에는 6·25종군기장을 달고 왼쪽 팔에는 문서통신연락병 완장을 차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가 후일 판문점, 종군기자가 되는 것은 운명처럼 느껴진다. 아, 타고난 기자였구나! 요즘 총알이 비 오듯 하는 전장에서, 휴전선 일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경쟁을 벌일 기자들이 몇이나 될까를 생각하면 “나는 참 훌륭한 선배를 두었구나.”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수많은 특종의 소유자라는 것을 여기서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해 남파된 무장공비 김신조(金新朝) 일당의 1.21사태(1968년 1월21일)를 비롯하여 휴전선과 서울북부 일대는 항상 북괴병의 기습이나 무장공비·간첩사건으로 남북이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미함(美艦) 푸에블로호 납북사건(1968년 1월23일)도 빼놓을 수 없다. 판문점 북한군 도끼만행사건도 있었으며(1976년 8월 18일), 가장 최근의 사건으로는 판문점 JSA 북한군 귀순사건(2017년 11월 13일)이 있다.
윤 국장이 일대기의 제목을 ‘지방기자의 종군기’로 정한 것과 함께 본문에 해당하는 제3부 ‘판문점, 서부전선, 그리고 1.21사태’를 정한 까닭은 아마도 기자생활에서 가장 추억에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영남지방의 새마을운동과 주요사건’을 제4부로 정한 것은 새마을운동이 전후의 대한민국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전기를 마련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새마을운동은 그가 대구경북취재팀장을 하고 있을 무렵에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일이었다.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는 경북 청도 신도리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8월 수해복구 확인차 부산으로 가던 중 청도 신도마을 주민들의 제방보수 현장을 보고 열차를 세워 살핀 후 1970년 4월 22일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지붕을 개량하고 안길들을 잘 가꾼 신도1동을 본보기로 ‘새마을 운동’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신도리에는 ‘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관’이 있다. 지금 한국은 국민소득 3만 달러로 세계 10위권의 잘사는 나라이다. 5.16때인 61년도만 해도 한국이 국민소득 80달러, 북한이 2백 40달러, 필리핀이 8백 달러였다.
그 후 필자는 문화부전문기자로서 서울에서 기자생활을 하게 되었고, 경향신문에서 세계일보 문화부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한동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으로 해서 윤 국장님과 소원하게 되었다. 윤국장님은 대구, 부산 취재 반장과 경기일보 정경부장, 중부일보 편집국장을 4번이나 역임하는 등 타고난 기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삶을 영위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황해도 옹진군이 고향인 그는 누구보다도 평화와 통일을 바랄 것이다. 지금은 남북한이 평화무드 속에서 화합과 통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이 시점에서 그가 종군기자로서의 삶의 일대기를 화보를 곁들여 발간하는 것은 북한에 대한 어떤 경각심과 함께 만전을 기할 것을 촉구하고 웅변하는 듯한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100세 시대의 인생 3모작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훌륭한 선배님을 모셨다는 자부심으로 필을 놓는다.

최근작 :<지방기자의 종군기>
소개 :

윤오병 (지은이)의 말
어느덧 새해가 또 시작됐다. 눈보라가 휘날리고 살이 에일 듯 차디찬 바람이 닥치는 산 능선을 오르내리던 從軍記者의 취재 활동이 주마등처럼 어렴풋이 생각난다.

청와대를 쳐부수고 요인 암살을 하겠다고 남파된 북괴 124군부대 金新朝 일당 31명이 서울 자하문 고개를 넘었으나 경찰 검문에 걸려 총격전이 벌어지고 鐘路警察暑長 故 崔圭植 警務官 등이 전사한 1·21사태. 記者는 1·21사태 하루 전인 1968년 1월 20일 오후 武裝 怪漢들이 나무꾼 4명을 인질로 삼고 숙영하던 坡州군 泉峴면 法院리 초리골 삼봉산 정상에 올라가 현장 취재하여 송고했으나 報道管制.
土曜日 오후 3판 마감을 준비하던 京鄕新聞 編輯局 데스크는 “무장공비 30명이 넘어왔다”는 전화를 받고 깜짝 놀라 記者의 前任 鄭志園 記者에게 전화를 넘겼으며 鄭 선배는“야! 3명도 아니고 30명이 어떻게 넘어올 수 있느냐. 왕년에 西部 戰線 취재 안 해본 사람 없어!”하며 우격다짐하여 공비들의 인질에서 풀려나 신고한 나무꾼 禹 모 씨(20) 형제와 현장을 답사하고 신고할 때까지의 경위를 상세히 설명했으나 믿지 못하는 눈치. 결국 30명을 20명으로 줄여서 마감했지만 특종은 물 건너가고....1.21사태를 전후하여 臨津江 북방 板門店 부근과 西部戰線 非武裝地帶(DMZ) 내에서의 北傀 蠻行은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무장공비 소탕작전을 진두지휘하던 陸軍 第1師團 15聯隊長 故 李益秀 將軍이 전사한 노고산 전투와 京鄕新聞 사진부 周弘行 記者가 총상을 입은 坡平山 토끼몰이 작전 현장에도 記者는 함께 종군 중이었다. 그리고 공비토벌작전이 끝나 일상을 되찾으려 애쓰는 基地村 분위기로 마무리하기도 했다.

30대 겁 없이 날뛰던 젊음이 이제 80대 늙은이로 경로당 신세가 되어 주마등처럼 어렴풋이 생각나는 반세기 전 그때 그 시절 그 사연을 엮어 보았다. 이름하여 『地方記者의 從軍記』 는 60연대 臨津江 북방 西部戰線 非武裝地帶와 板門店에서 일어난 北傀 蠻行과 큰 사건들을 중점으로 다루고. 70연대 嶺南地方의 새마을운동과 主要事件, 그리고 先進國 대열에서 당당하게 발전하는 20세기 세계 속의 우뚝 선 大韓民國. 附錄으로 “記者가 만난 사람들”의 사진과 짤막한 소개를 넣어 보았다. 『地方記者의 從軍記』를 펴 낼 수 있도록 도와 준 京鄕新聞과 京畿日報, 京仁日報, 中部日報 그리고 出版社 행복에너지에 감사드린다.
글 솜씨 없는 事件記者가 보고 느낀 점을 미련하게 생각대로 펴낸 점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그때 그 시절, 중앙지 8면 시대 북한을 북괴, 만행 등 거칠게 한 일부표기와 발간이 늦어진 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