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블 신소윤
1) 내 인생의 SF를 꼽는다면?
다카노 가즈아키 <제노사이드> : 자기 전에 가볍게 몇 페이지만 읽고 자야지, 하고 이 책을 펼쳤다가 그 날 밤을 새버렸습니다. 7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어요. 지금의 인류보다 진화한 형태의 신인류 ‘누스’가 등장하고요. ‘누스’를 죽이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자들의 이야기예요. ‘제노사이드’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류의 역사에서 반복되어온 학살, 내전, 전쟁 등도 다루고 있고요. 그런 소재들을 통해 인간의 선악을 묻는 작가의 메시지가 묵직합니다. 작가가 일본인임에도 일본 우익을 향한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기도 하고요. 한국인 캐릭터가 주인공의 훌륭한 조력자로 등장합니다. 아무튼 이 책은 엄청난 페이지 터너입니다. 저처럼 자기 전에 읽지 마세요.
2) 가장 만나보고 싶은 SF 작가는?
저는 사실 낯가림이 심한 편이라 작가를 독대하게 된다면 아무 말도 못할 게 뻔합니다… 그래도 만나보고 싶은 작가가 있다면 레이 브래드버리. 그는 고양이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고양이를 스물두 마리나 키웠다고 하는데요. 그의 고양이들과 놀고 싶습니다. 최근에 아작에서 나온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집 <멜랑콜리의 묘약>과 <온 여름을 이 하루에>를 재밌게 읽고 있는데요. 숲에 빗방울이 맺힌 정경을 ‘투명한 구슬 목걸이가 흩뿌려져 있다’고 묘사하기도 하고요. ‘따뜻한 여름 아침의 우유로 빚어진 얼굴’, ‘봄날 얼음처럼 덧없다.’처럼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들이 책 속에 가득해요. 사실 그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는 햇빛 잘 드는 곳에서 그의 메모나 일기장을 훔쳐보고 싶어요. 환하고 빛나는 문장들이 얼마나 가득할지.
3) 휴가 때 완독하고픈 SF는?
류츠신 <삼체> : SF는 아니지만 평소에 중국의 위화나 모옌, 대만의 우밍이 같은 중화권 소설가들을 좋아했고 자주 읽었어요. 그래서 중화권의 SF도 어떨지 궁금해요. 또 장예모의 ‘인생’이나 ‘붉은 수수밭’처럼 중국의 굵직한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도 무척 좋아하는데 중국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어떻게 SF와 엮어냈을지도 기대되고요.
4) 입문자에게 가장 선물하고 싶은 SF는?
켄 리우 <종이 동물원>: SF와 환상문학의 경계, 일상과 환상의 경계를 교묘하게 가로지르고 있는 소설인 것 같아요. 일상의 소품을 이용한 아기자기한 이야기들은 SF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 표제작 『종이 동물원』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성을 건드리는 이야기예요. 「상태 변화」라는 단편도 좋았어요. 누군가의 영혼이 금세 녹아버리는 각얼음이나 금방 태워버릴 수 있는 담배라고 생각한다면 쓸쓸한 기분이 들지 않나요. 또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처럼 한국과 비슷한 역사의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이야기도 있기 때문에, 국내 독자들과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5) 원작을 가장 잘 살린 SF영화, 시리즈 또는 애니메이션은?
[총몽 OVA] (영화 [알리타]가 아니고요. 일본 만화 ‘총몽’의 극초반부 내용을 2화로 엮은 단편 애니메이션입니다) : 사실 원작을 잘 살린, 잘 만든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일단 저에게 ‘총몽’이라는 작품을 접하게 해줬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의미가 깊어요. 상류층이 거주하는 공중도시 자렘과 자렘에서 나오는 쓰레기로 연명하는 고철마을이 존재하는 철저한 계급사회,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서 펼쳐지는 사이보그 소녀 ‘갈리’의 첫사랑 이야기인데요. 갈리의 첫사랑이 너무 비극적으로 끝나서 밤새도록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 하필 자기 전에 우연히 보게 된…) 이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고 나서, 바로 총몽 전권을 찾아 읽었는데 단순히 사이보그 소녀의 첫사랑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던 것이 실은 극초반부의 이야기에 불과했고, 뒤로 갈수록 생각보다 작품 스케일이 어마어마했어요. 사이버펑크 액션도 매우 호쾌했고요. 사이보그와 인간 사이에서 진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주제의식까지 묵직했어요. 제가 접한 최초의 SF가 ‘총몽’이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이 단편 애니메이션은 짧지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6) 재출간, 국내 출간을 고대하는 SF는?
<환상특급 ? 세계환상미스테리> : 1994년에 서울창작에서 나온 오래된 책이고요. 서울SF아카이브의 박상준 대표님이 엮은 SF 앤솔러지인데 수록 작가 라인업이 어마어마해요. 톰 고드윈, 레이 브래드버리, 아서 클라크 등등… 이 책에 수록된 배리 롱이어의 「적과 나」라는 단편이 그렇게 명작이라는데 꼭 읽어보고 싶고요. 지금은 너무 오래된 책이라서 절판되었지만 복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제목과 표지를 꼭 바꿔서요!) 청계천 헌책방을 뒤져보면 이 책을 찾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