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를 하나로 정의하는 것, 그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인간 그 자체를 포함하여 인간을 둘러싼 모든 삼라만상은 본질적으로 입체적이다. 하나의 측면만 과장되게 보는 것은 사물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사물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는 측면을 함께 안고 있다. 인간의 두 눈은 어차피 등 뒤를 볼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물은 모두 변화한다. 변화하지 않는 사물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보는 모든 사물은 내일 더 이상 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전제해야만 한다. 사물은 이처럼 우리가 완전하게 볼 수 없는 입체적인 이면을 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이는 면조차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세상을 본다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자본>을 읽고 받아들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은 그에 대한 이유를 적어도 두 가지 정도 스스로 말해주고 있다. 하나는 방법론과 관련된 문제이다. <자본>은 경제문제를 산꼭대기에서 바라본 다음 집필된 책이다. 마르크스가 올라간 산의 높이가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자본>에 담긴 얘기를 모두 이해했다는 말은 결코 진실이 되기 어렵다. 그 산꼭대기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경제구조에 대해 어느 정도의 입체적인 모습을 제공했는지는 런던의 대영박물관 도서실에서 거기에 도달했던 마르크스만이 가장 정확하게 알 뿐이다. 따라서 <자본>을 읽는 사람은 모두 산을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각자 자신이 올라간 높이에서 <자본>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산을 올라간 위치도 다를 것이고 각자가 다다른 높이도 전부 다를 것이다. 따라서 <자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고, 그 다양성은 모두 맞으면서도 모두 틀린 것이기도 하다. 그것들이 입체적인 구조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맞고 전부로서는 틀린 것이다. |
다른 하나의 문제는 <자본>이 미완성의 저작이라는 점이다. <자본>은 제1권만 마르크스가 출판용으로 완성했을 뿐 제2권과 제3권은 초고로 남겨진 노트를 엥겔스가 정리한 것이다. 그것이 완결되지 못한 저작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아직도 '진행 중'일 수 있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그것은 이후에 진행되는 모든 변화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은 이처럼 입체적인 성격과 변화를 향해 열려 있는 구조 덕분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 생명력의 원천은 역시 이 책이 제기한 문제 - 가난과 노동의 불일치, 다시 말해 노동을 하면서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 - 가 아직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르크스가 올라갔던 산은 여전히 거기에 있고, 우리 눈앞에는 올라갈 과제가 놓여 있다. 마르크스가 산을 올라갔던 자취는 <자본>을 통해서 남았으며,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산을 올라가야 할 이유와 방법을 여전히 알려주고 있다.(강신준,<자본>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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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꿈꾸던 사회는 아직 세계 어디에서도 실현된 적이 없습니다. 단지 그것이 지향하던 방향, 즉 타인을 위한 노동을 멈추고 여가시간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다가선 사회가 있을 뿐입니다. 경제 양극화가 쟁점이 된 2012년 대선에서 복지 모델로 주목받은 북유럽 사회가 그것이지요. <자본> 제1권이 출판된 지 이미 150년이 되어가는데 그것이 꿈꾸던 사회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 꿈은 혹시 실현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자본>은 실현될 수도 없는 허황된 꿈을 얘기하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자본>을 다시 읽어야 할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요? 먼저 떠올려야 할 것은 <자본>의 안내판입니다. 여러분에게 저는 마르크스가 <자본> 을 집필한 동기를 1848년 혁명의 발발과 그 실패의 원인이라고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그 발발 원인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는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가 현실에서 뒤집혔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 |
지금도 여전히 이 이상한 수수께끼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노동 빈곤이라는 이 수수께끼가 말 그대로 '세계화'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국 폭스콘 공장의 참상에서 드러났듯이 선진 자본주의의 노동 빈곤은 1980년대 이후 대거 후진국에 수출되었으며, 1950~60년대 잠깐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선진국의 노동 빈곤도 지금은 미국의 맥잡이나 일본의 프리터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도로 살아나서 계속 확대되고 있습니다. 혁명의 실패 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오큐파이 운동'은 단 1퍼센트의 자본가들이 99퍼센트의 일반 국민을 희생시킨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운동에도 불구하고 2008년 공황의 거의 모든 사회적 비용은 국민이 치르고 있으며 공황 발발 이후 지금까지 자본주의는 아직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자본>이 쓰인 당시에 비해 자본주의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고 따라서 이들 두 물음에 대한 <자본>의 답은 여전히 유효한 것입니다. 2008년 공황 이후 마르크스와 <자본>이 다시 전 세게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강신준, <오늘 '자본'을 읽다>) |
여전히 유효한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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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살인사건 추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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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핵심 텍스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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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마르크스의 참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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