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소설집에는 제45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개교기념일'을 포함, 최근에 발표한 중·단편 여덟 작품이 실려 있다.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에서 쉬임 없이 반복되는 문장은 '아무도 아닌 사람', '한 번도 존재해본 적이 없는 사람', 그래서 '언제나 몸이 되고 싶은 사람', 그 까닭 모를 '아무것도 아님'과 같은 것들이다. 소외와 좌절되는 욕망, 그리고 유일한 진실처럼 보이는 죽음 앞에서의 무력함이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무료함, 존재 증명을 해 보일 길 없는 삶에 대한 회의, 이것은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지닌 내면의 풍경이다.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는 그리 성공하지 못한 30대 후반의 영화감독이 자신의 친구와 아내의 죽음을 지켜보며 자기 안에 깊은 응시의 시선을 던지게 되는 내용이다. 암 선고를 받아 죽음으로 내몰리던 친구 기태는 죽음의 실체를 마주 보며 두려움을 쫓기 위해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달라고 한다.
일면 잔인해 보이는 친구의 청을 받아들이자 이번엔 아내의 암 선고를 받는 주인공 영모. 다른 남자의 애인이기도 했던 아내가 죽음의 순간까지도 놓지 않는 브라스밴드의 환영(幻影)을 추적해가다가 오히려 자기 앞에 놓인 삶의 빛과 일순 마주하게 된다. 삶과 죽음의 강렬한 대비가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