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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점] 서가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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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고민과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지금 그대로도 아름답고 건강한 삶'의 일면을 생생하고 유머러스하게 보여주는 책.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유쾌하게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건강하게 그려낸 동화집이다.
이 세상엔 완벽한 사람도, 완벽한 삶도 없다. 다만 멀쩡하지 않은 세상을 멀쩡하게 살아 내는 '우리'가 있을 뿐임을 일깨운다. 표제작 '멀쩡한 이유정'을 포함 총 다섯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할아버지 숙제 ![]()
: ‘멀쩡하다’는 말을 동화에서 또 읽은 적이 있었던가. 그동안 동화의 빈출 어휘로는 ‘이상한’ ‘신기한’ ‘신나는’ ‘착한’ ‘슬픈’ 같은 낱말이 등장하곤 했지만 ‘멀쩡한’이라는 말을 본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동화의 낱말은 종종 작가가 어떤 눈으로 세상과 어린이를 보는지 가늠하는 유용한 단서가 된다. 그렇게 보면 요즘 부쩍 동화에서 ‘신기한’이라는 말보다는 ‘이상한’이라는 말이 더 자주 나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상한’은 단순한 놀라움의 표현이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예측불허의 질주에 대한 부정적 예감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작가 유은실은 여기에서 성큼 더 나간 낱말 하나를 불쑥 꺼내 든다. 그의 단편동화집 <멀쩡한 이유정>은 묻는다. ‘너는 멀쩡하니?’라고. 이 말은 타자를 향해 던지는 ‘미친 거 아냐?’라는 냉소에서 방향을 바꾼 것이다. 더 진지하고 근원적인 질문이다. “무슨 4학년이 1학년 때부터 다닌 학교도 못 찾냐?”라는 핀잔에, 길치인 유정이는 ‘머릿속에서 사이다 뚜껑이 터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유정이가 길을 더디 찾는 것은 유정이의 잘못이 아니다. 세상에는 길을 잘 찾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문제는 유정이를 둘러싼 소중한 것을 모조리 부수거나 파헤쳐버린 사람들에게 있다. 나무·놀이터·골목 등 유정이가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정든 단서들은 일시에 사라져버렸다. 비슷비슷하고 위압적인 아파트들만이 유정이를 위협한다. 어린이를 온도계에 비유한다면 그들의 수은주는 어른보다 훨씬 민감하게 반응한다. 잔 먼지에도 기침을 하고 열이 오른다. 거짓과 불의가 옹색한 변명 몇 마디로 말짱하게 뒤덮이는 일 따위를 어린이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배운 것과 눈앞에 일어나는 현실이 다를 경우 가차 없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멀쩡한 이유정>에 나오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뒤죽박죽 이상한 세상을 향해 ‘내가 미친 게 아니다’라고 외친다. 어른들은 진작 ‘그러게 말야’ 하면서 포기했던 일이다. 대형 마트의 등장과 함께 우리 읍내에서 새우가 사라져버린 일이나, 할아버지의 재력이나 직업이 내 숙제로 둔갑하는 일 따위 말도 안 되는 기이한 현실이 멀쩡한 주인공 앞에서 몸부림친다. 그걸 본 아빠는 집을 나가버리고 할아버지는 버스를 타고 되돌아가지만 어린이 주인공들은 우뚝 서서 뚫어져라 본다. 세상이 틀렸고 내가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얼음장이지만 동화는, 문학은 역시 씩씩하다. ‘있는 그대로 어린이’인 멀쩡한 주인공들 유은실은 <멀쩡한 이유정>(위)에서 ‘너는 멀쩡하니?’라고 묻는다. 유은실은 전작 <만국기 소년>에서 이미 차분한 재치가 말해주는 경고의 위력을 보여준 바 있다. 그의 동화를 읽으면서 웃지 않았다면 삶의 온도계가 이미 깨어져버린 것은 아닌가 의심해야 한다.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보다 소심하고 민감하며 ‘있는 그대로 어린이’인 그 멀쩡한 주인공들 때문에 책을 덮으면 가슴이 뜨끈하다. <멀쩡한 이유정>이 ‘올해의 동화’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2009년의 한국 사회가 두려워하고 힘겨워하는 일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서사의 매력이 첫째다. 그러나 내일의 심상치 않은 전조 앞에 주인공과 어린이 독자를 당당하게 만드는 주제의 힘 또한 만만치 않다. 누가 뭘 뒤죽박죽으로 파헤치려고 들든, 멀쩡한 것은 유정이고 당신이고 나이고 우리이다. 무엇이 두렵겠는가? (자료협조:시사IN)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 조선일보 Books 북Zine 2008년 12월 6일자 '한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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