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왕 엘퀴네스 001화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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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모년 4월 26일. 나는 죽었다.’

……라고 하니까 왠지 분위기 있어 보이는 것이, 얼마 전에 봤던 만화영화의 시작 부분을 따라 해 본 것뿐이지만 꽤나 탁월한 문장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눈앞에 죽은 내 모습이 떡하니 보이고 있었으니까.

“헐…….”

나는 조금 황망한 기분으로 도로 한복판에 널브러진 익숙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숱 많은 시커먼 고수머리와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린 두꺼운 뿔테 안경. 비쩍 마른 몸에 촌스러운 감청색 교복. 분명 오늘 아침 학교를 나오기 전에 거울에서 보았던 내 모습이 확실했다.

“이거…… 정말이야? 진짜? 사실? 리얼리?”

두 눈으로 보고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나는 스스로 뺨을 두드리고 꼬집어 보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눈앞에 벌어진 기이한 현실(그렇다, 이건 틀림없는 현실이었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허공에 떠 있는 내가, 바로 아래에 죽어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바로 이러한 상황 말이다.

“우아악― 미치겠네! 왜 내가 이딴 일을 당해야 하냐고!”

내 이름은 강지훈.

올해로 17살인 대한민국 국적의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난 이제껏 나 자신이 평범하다는 것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운동 실력도 또래 중 보통이고, 성적도 보통, 신체 사이즈며 외모며 그야말로 무엇 하나 남들보다 뛰어난 것 없는 내가 평범하지 않다면 세상의 그 누가 평범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평범한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고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평범함이란 세상의 그 어느 일보다 쉽고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 아니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내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방금 전의 그 ‘사고’를 당하기 전까진.

애초부터 사고의 발단은 별것 아니었다. 한국이란 나라는 워낙에 땅덩어리가 좁은 데다가 교통이 복잡하기 때문에 흔하디흔하게 일어나는 게 교통사고다.

얼마 남지 않은 모의고사 준비 때문에 평소엔 하지도 않던 공부 좀 해 보겠답시고 영어 단어장을 들고 외우며 다닌 게 화근이었다. 신호를 무시한 자동차 한 대에 손도 못 써 보고 그대로 치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허어, 이래서 평소에 안 하던 짓 하면 죽는다는 얘기가 나온 거구나…….’

옛말 틀린 것 하나도 없다. 선조의 지혜란 그저 아무 데서나 꾸며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른들 말씀을 무시한 죄로 받는 형벌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벌치고는 너무 과하다고 생각지 않아?

게다가 심하게 치인 것도 아니고 그저 가볍게 부딪힌 것뿐이다. 물론 가볍다곤 해도 저만치 멀찍이 날아가 버릴 정도로 크게 충격을 받긴 했지만, 외관상 어디 하나 부러지거나 피가 터진 곳도 없었다. 그런데 고작 그 정도에 죽어 버리고 말다니.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그렇고말고.

시체의 겉면이 얼마나 깨끗했던지 나를 친 가해자는 물론, 찾아온 경찰들마저 처음엔 내가 죽은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나조차 다시 육체로 돌아가 보려고 시도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여러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육체는 번번이 내 영혼을 튕겨냈고, 지금은 숨을 안 쉰 지 20분이 넘어간 상태라 나도 포기한 상황이었다.

아아, 나는 정말 이렇게 어이없이 죽어 버리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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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어이없게 짧은 생을 마감해 버린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다. 그러나 내 삶은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교복 차림으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학교 수업에도 참여했으며, 더불어 내 시신이 수습되고 장례가 치러지는 과정까지 구경하고 있었다.

요즘은 내 영정 앞에 서서 문상 온 친구 녀석들에게 아는 척을 하는 중인데, 이게 또 재미가 꽤 쏠쏠했다. 평소엔 알지 못했던 친구들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특히 평소 행실이 가볍거나 과묵해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녀석들이 문상 중에 눈물 콧물 흘리는 광경은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가 여기서 어떤 말 어떤 행동을 하건 저들에게는 전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흔히 만화영화에서 자주 나오던, 죽은 뒤 유령이 되어 살아 있는 사람과 교류하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만화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도 내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다. 심지어 같은 귀신(?)조차 아직 만난 적이 없을 정도다. 전자는 그렇다 치지만 후자의 경우는 좀 이상하긴 했다.

장례식장이라는 곳의 특성상 죽은 사람이 결코 나 혼자일 리는 없다. 그 증거로 지금 이 건물 내에서만 같은 시간에 치러지는 장례가 수두룩했으니까. 심지어 나보다 늦게 시작된 장례도 많았다. 그런데도 정작 다른 사람의 영혼을 본 적은 없다니,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처음 며칠은 언젠가 저승사자가 찾아오겠거니 태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게 벌써 사흘째 지속되니 점점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설마 죽으면 이렇게 혼자 떠도는 건가? 영원히?’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나는 초조한 기분으로 입술을 악물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혼자인 것은 정말 질색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많은 사람 속에 파묻혀 있어도 아무도 나를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은 더욱 껄끄럽다. 이럴 땐 굳이 자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까지 떠오르게 된다. 이를테면, 지금 상주로 있는 사람이 내 가족이 아니라 친구 녀석이라는 현실이라든지.

‘그야…… 그 사람들이 슬퍼해 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조차 낯선 부모님과 형제들. 살아 있을 때도 내게 별로 애정을 보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대외적인 시선을 생각해 형식적인 장례 정도는 치러 줄 줄 알았다.

그러나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들과 형제를 향한 그들의 시선은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장례도 없이 화장해서 불태우고 아무 산에나 재를 뿌리려 했다. 그것을 알고 나서서 말린 것이 지금 상주로 있는 친구인 하태진이다. 치러지는 장례 비용 또한 전부 반 아이들이 모금해서 걷은 돈으로 이뤄진 것이다.

나는 상주의 표식을 단 채 하얗게 굳은 얼굴로 주먹을 움켜쥔 태진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늘 명랑하고 활기찬 것이 장점이다 못해 단점으로 보이던 친구였는데, 그런 녀석의 얼굴이 지금은 사람 하나 잡을 것처럼 살벌하기 그지없다. 저 녀석의 얼굴을 저렇게 만든 것이 나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썩 편하진 않았다.

‘으으, 이러면 안 돼. 긍정적 마인드, 긍정적 마인드!’

나는 머리를 세게 좌우로 흔들며 머릿속에 파고든 잡생각들을 털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죽어서까지 전생의 고민을 끌어오고 싶진 않았다. 나를 위해 울어 주는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소리긴 하지만, 나는 하루라도 빨리 모든 것을 잊고 즐거워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인연이 필요했다.

‘그래! 나가자! 나가서 어떻게든 나와 같은 처지의 동료들을 찾는 거야!’

이미 타인의 영혼이라곤 구경은커녕 그림자조차 찾아보지 못했지만 실망하기엔 아직 일렀다. 이제 죽은 지 고작 사흘 남짓 되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겪은 일들이 앞으로 일어날 전부라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인연이 없으면 만들면 되는 것! 죽고 난 다음의 영혼을 찾기가 힘들다면 이제 곧 죽을 사람 옆에서 영혼이 나오길 죽치고 기다리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다행스럽게도(?) 병원이란 곳은, 그 특성상 하루에도 몇 번씩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곳이다. 곧 죽을 사람 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나는 친구 생겨서 좋고 신참 유령도 외롭지 않아 좋을 테니,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꿩 먹고 알 먹고인 것이다!

‘아무래도 난 천재인가 봐!’

“좋아! 그럼 가 볼까?”

나는 단번에 결정을 내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당당히 돌아서기 전 내 시야에 담기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상주로 서 있는 하태진, 그 녀석이었다.

울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사람은 그 녀석이 유일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가장 가슴 깊이 내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 역시 바로 그 녀석이었다.

“난 행복해질 거야.”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닿지도 않는 태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도 그만 잊어라, 하태진.”

 

* * *

 

누군가 지금 나에게 현재의 심정을 세 가지로 표현해 보라고 한다면 난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황당하고 황당하며 황당하다. 정말 내 평생에 이토록 황당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던가!

종합병동에서 중환자실을 찾는 건 의외로 간단했다. 벽을 자유자재로 통과하는 영혼인 덕분에 계단을 일일이 오르거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중환자실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난 동지(?)를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로 여전히 의욕에 불타오르는 상태였다. 지금도, 아니 앞으로도 나를 황당하게 할 그 일이 생기기 전까지 말이다.

 

중환자실은 평소에 생각해 왔던 이미지 그대로 서늘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었다. 일반 병실과는 달리 이곳의 환자들은 그야말로 생사를 오락가락하는 사람들뿐이라, 척 보기에도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앓는 환자 자신이나 지켜보는 가족이나 괴롭기만 할 뿐인, 온갖 슬픔과 고통의 밀집 장소인 것이다.

대부분의 환자는 의식을 차리지 못한 채 누워 있었고,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거나 그 사용 여부를 심히 의심해 봄 직한 복잡한 장치들을 몸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차마 눈뜨고 볼만한 광경이 아닌지라 나는 가급적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 사람들은 똑바로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비록 기계에 의지해야 생을 연명하는 처지라곤 해도 결국은 살고 싶어서 버티는 것이 틀림없다. 이런 와중에 불순한 목적으로 찾아든 것이 내심 양심에 찔렸지만 나는 애써 당당해지려고 노력했다.

어쨌든 나야말로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 혼자 있기 쓸쓸해서 동료를 찾으러 온 것이 뭐가 나쁘단 말인가. 죽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누군가 죽으면 친분 좀 쌓겠다는 것뿐인데. 죽는 입장에서도 혼자 낯선 환경에 떨어져 불안해하는 것보단 선배(?)를 만나는 편이 적응하기에도 훨씬 좋을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사, 상민아! 안 돼! 눈을 떠, 상민아!”

“오빠!”

내 염원이 너무 컸던 탓일까.

중환자실에 올라온 후 그다지 별로 시간이 흐른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조짐(?)이 보였다. 내 또래로 보이는 한 소년이 산소호흡기를 쓰고 있는데도 거친 호흡을 뱉어내며 온몸을 사정없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소년은 어딘가 크게 다친 모양인지 머리부터 온몸을 붕대로 휘감은 채였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달려와 여러 가지 조치를 시도했지만 소년의 사그라지는 호흡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의학 지식이 전혀 없는 내가 보기에도 그 소년은 이미 가망이 없었다.

왜냐하면, 영혼이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헐…….”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과정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싸늘하게 식어 가는 몸 위로, 그와 똑같이 생긴 또 하나의 투명한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치 공포영화를 보는 것처럼 오싹한 광경이었다.

영혼이 육체에서 완전히 떨어지는 순간, 의사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고 소년의 가족들은 오열하기 시작했다. 녀석이 완전히 죽은 것이다.

“자아, 그럼 면상이나 터 볼까나.”

소년의 가족들에겐 조금 미안했지만, 나름대로 이 순간을 기대했던 만큼 나는 아직 움직이지 않는 영혼에게 반갑게 다가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앗.

“……엉?”

침대의 맞은편 벽면에서 갑자기 새하얀 빛 무리가 터져 나왔다. 울고 있는 사람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을 보면 평범한 빛이 아닌 게 분명했다. 놀란 나는 신참(?)에게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고 곧장 벽면 뒤로 몸을 숨겼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벌인 행동이었다.

숨고 나서야 굳이 이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땐 이미 다시 나서기도 뭐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빛 무리 안에서 무언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뭐야, 사람?’

놀랍게도 그 안에서 걸어 나온 것은 두 명의 남자였다. 그것도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끝내주게 잘생긴 서양인이었다.

그들은 현대의 복식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화려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거기다 머리카락은 어찌나 긴지 엉덩이를 넘어 발끝까지 내려오는 것 같았다. 등 뒤에 날개가 없는 것을 빼면 흡사 사람들이 흔히 묘사하는 천사의 모습 같기도 했다.

그 천사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존재들은 익숙한 듯 아무 거리낌 없이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는 소년을 향해 다가섰다. 그리고 한가운데에 녀석을 두고 자기들끼리 이해하기 힘든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주로 한쪽이 무언가를 설명하고, 다른 한쪽이 질문을 건네는 형식이었다.

“물병자리 생(生) 최상민, 국적 한국. 16세의 고등학생. 사인은 교통사고입니다. 사망부에 기록이 끝났습니다.”

“이동은?”

“내세의 길을 걸어야 할 겁니다. 짊어진 업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면 중앙부 소속이로군. 그렇게 처리하도록 해. 오늘 영혼은 이것으로 마감인가?”

“일단 저희 파트는 그렇습니다.”

보고하던 쪽의 대답에 상대편 남자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아직도 멍하니 앉아 있는 소년을 잡더니 그를 가볍게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그때까지도 소년의 영혼은 주변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이만 가지.”

“예, 프레우니스 님.”

파―앗.

그것이 내가 본 현장의 마지막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땐 이미 그들은 흔적도 없이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나는 한참이나 망연자실해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 내가 본 것이 정말인가 의심스러운 기분부터 들었다.

“……날 데리러 오지 않아서 저승사자 따윈 없는 줄 알았는데.”

그래, 정말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천사건 저승사자건 간에 저들은 분명 소년의 영혼을 데리러 온 존재였다. 비록 나누던 대화 대부분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처음부터 그의 죽음에 맞춰 등장한 것만 보아도 그랬다.

그런데 나는 왜? 어째서 난 데리러 오지 않은 거지?

“뭐야,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