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시간 플레이한 게임의 악당이 되어 버렸다
1만 시간 플레이한 게임의 악당이 되어 버렸다
1만 시간 플레이한 게임의 악당이 되어 버렸다
지은이 : SLV
발행인 : 서경석
전자책 발행일 : 2023-08-27
출판사 : 도서출판 청어람
등록번호 : 제387-1999-000006호
본사 : 경기도 부천시 부일로 483번길 40 서경B/D 3F (우) 14640
편집부 : 서울특별시 구로구 디지털로 272 한신IT타워 404호 (우) 08389
전화번호 : 02-6956-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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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시간 플레이한 게임의 악당이 되어 버렸다
1화
[루아 대륙을 호령하던 제국의 질서는 무너졌습니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질서와 혼돈.
그 속에서 당신이 한 수많은 선택과 행동이 당신의 삶, 나아가 대륙 전체의 운명을 바꿀 것입니다.]
“…….”
블랙 앤 화이트 사가.
역대 최고의 오픈 월드 RPG 게임.
본편과 2개의 확장팩이 발매되었고, 예정보다 발매가 3년이나 늦어진 최종 확장팩이 발매를 코앞에 뒀다.
뭐 하나 좋은 것 없던 인생에서 이 게임은 내 인생 자체가 되었다.
일하는 시간보다, 잠자는 시간보다 게임을 즐긴 시간이 더 많다.
게임에 쓴 시간을 다 합치면 1만 시간은 되지 않을까.
게임에 쏟은 정열과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시간.
문제의 최종 확장팩을 앞두고 죽은 건 내 인생 최악의 불행.
그렇게 최종 확장팩을 앞두고 죽은 난 되살아났다.
블랙 앤 화이트 사가의 무대인 루아 대륙에서.
주인공으로? 주인공 동료로? 듣보잡 마을 사람으로?
아니.
…주인공에게 깝치다나 쫓겨나거나, 죽을 뻔하거나, 칼 맞거나 고문당하고, 이후로도 정신 못 차리고 깝치다 죽는 병신 같은 악역으로.
이런 씨발.
* * *
[루아 대륙을 통일하고 대륙 전체를 지배하던 레반드 제국은 내우외환으로 과거의 위용을 잃어버렸습니다.]
[현재 대륙에서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토는 3할 정도에 불과하며, 나머지 영토 대부분은 9명의 영주들이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가르시아 가문 영지는 무엇 하나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농촌입니다. 또한, 어느 이름 없는 쌍둥이 남매가 자란 곳이기도 합니다.]
“…….”
크리스티안은 머릿속에 뛰어다니는 정보들을 되새기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역시 꿈이 아니야.”
역시 이 몸은 가르시아 가문의 젊은 영주, 크리스티안 가르시아가 틀림없다.
꿈일지 몰라 몇십 번 볼을 꼬집느라 볼이 얼얼하다 못해 마비되었다.
확실히 꿈은 아니었다.
꼬집을 때마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거니와, 느껴지는 감각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눈에 보이는 풍경도 모니터나 TV 화면으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생생했다.
말 그대로 현실이었다.
크리스티안의 시선이 거울을 향했다.
갈색 머리에 못생긴 건 아니지만 그렇게 잘생기지도 않은 청년의 얼굴이 비쳤다.
머리도 잘 정돈되어 있고, 호화스러운 평상복 차림이다.
병석에 누워 있다 얼마 전 일어난 몸이지만, 주변에서 잘 관리해 준 티가 났다.
당연한 일이다.
크리스티안은 가르시아 가문의 하나뿐인 계승자였고, 이젠 영주니까.
크리스티안은 거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유민규.”
이곳에서 눈을 뜨기 직전까지 사용했던 이름.
예정보다 몇 년이나 늦게 발매된 ‘블랙 앤 화이트 사가’ 마지막 확장팩을 즐기겠다는 기대감에 들떠 집으로 가는 길을 서둘렀는데… 사고를 당했다.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트럭, 그것도 트레일러트럭과 정면에서 부딪친 것까지 기억났다.
초대형 트럭과 정면충돌한 순간 기억이 끊겼는데, 아마 즉사하지 않았을까.
그때 유민규는 죽고, 크리스티안 가르시아로 되살아난 것인가.
생각을 많이 한 탓인지, 사고의 후유증인지 머리가 아파 왔다.
유민규가 당한 사고가 아닌, 크리스티안이 당한 사고의 후유증인 듯했다.
부모님과 함께 뱃놀이를 하다가 배가 뒤집혀 부모님은 모두 사망, 자신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한 달 넘게 의식 불명 상태였다가, 얼마 전 정신을 차렸다.
분명 게임 설정은 그랬다.
“그러니까…….”
크리스티안은 시선을 돌렸다.
방문이 열린 가운데, 하인과 하녀들이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격 지랄 맞은 소영주의 눈치를 보는 것이리라.
지랄 맞은 소영주, 아니, 이젠 영주인 크리스티안.
크리스티안이라면 이 상황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성질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랄 맞은 소영주가 아니다.
“저는… 괜찮아요.”
말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망나니로 소문난 자신이 하인이나 하녀에게 존댓말을 하다니.
자신의 생각을 증명하듯, 고용인들이 난리를 쳤다.
“세상에! 아직 몸이 편찮으신가 봐!”
“어서 침대에 눕혀 드려!”
* * *
반강제로 침대에 눕혀진 크리스티안은 다시 한번 지금 상황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했다.
중세인지 근세인지 모를 아무튼 옛날 유럽 분위기의, 정확히 말하자면 판타지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실보다 미화된 유럽 분위기의 세계.
그중에서도 상류층에 속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화려한 문물들.
그 모든 것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다.
크리스티안은 손을 다소곳이 모은 채 곁에 서 있던 집사를 보았다.
자신이 크리스티안이라면 저 집사의 이름은 분명…….
“세바스찬.”
“네, 영주님.”
크리스티안은 속으로 안도했다.
‘역시 그런가.’
이곳은 루아 대륙 중 레반드 제국의 가르시안 영지.
그중에서도 가르시안 영주의 저택이 틀림없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풍경들, 보이는 사람들까지 게임에서 수없이 보아 온 화면과 일치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 모르겠지만, 당장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유민규가 아니라 크리스티안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크리스티안답게 행동해야 한다.
다행히 크리스티안으로서의 기억, 그리고 게임 블랙 앤 화이트 사가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크리스티안처럼 행동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조금 전에는 내가 정신이 없었어.”
세바스찬은 조금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일을 겪으셨으니까요. 하루빨리 몸을 회복시키셔야 합니다.”
마음을 다잡은 크리스티안은 지금 상황에서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을 물어보았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그, 그게…….”
세바스찬은 망설였지만, 대답을 재촉하는 크리스티안의 눈빛에 천천히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두 분 다 신의 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군.”
영주 부부와 하나뿐인 후계자가 함께 뱃놀이를 하다 사고가 나 부모는 사망하고, 신분값, 나잇값 못 하고 철없던 크리스티안이 갑자기 영주 자리에 오른다.
그것이 블랙 앤 화이트 사가 도입부의 한 축이었다.
“알았어. 일단 물러가.”
“아, 알겠습니다.”
망나니 소리까지 듣는 소영주, 아니, 전 영주의 유일한 상속인으로서 이제 영주인 크리스티안의 말에 세바스찬은 물러갔다.
방 안에 홀로 남은 크리스티안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씨발,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눈떠 보니 1만 시간 가까이 플레이한 게임 속 세계다.
그것만으로도 기막힌 일이지만, 더 기막힌 일은 따로 있었다.
“왜 하필 크병신이냐고…….”
크병신.
크리스티안의 별명이다.
‘크리스티안 가르시아’는 블랙 앤 화이트 사가의 주인공이 아니다.
하다못해 선역이거나, 악역이라도 성공하거나 어떻게 잘 살 만한 캐릭터도 아니다.
굉장히 자유도가 높아, 수많은 캐릭터들이 다양한 운명을 맞이할 수 있는 이 게임에서, 손꼽힐 만큼 비참한 악역이었다.
블랙 앤 화이트 사가의 등장인물들은 주인공인 세인과 세라, 일명 ‘선택하는 자’의 선택에 따라 인생의 꽃길이 열리기도 하고, 끔찍한 꼴을 당하기도 한다.
그중에는 주인공이 어떻게 행동하든 끔찍한 꼴을 당하는 캐릭터가 몇 있다.
크리스티안 가르시아도 그런 유형의 캐릭터였다.
크리스티안은 예정된 자신의 미래를 떠올려 보았다.
1. 주인공이 선 성향대로 행동할 시, 머잖아 크리스티안은 자신의 악행 때문에 주인공에게 죽을 뻔한다.
죽기 직전의 상황에서 머리를 땅에 박으며 목숨을 구걸한 덕분에 살아남지만 이후 정신 못 차리고 자신에게 모욕감을 주었다는 이유로 주인공에게 복수하려다 결국 죽는다.
2. 주인공이 중립 성향대로 행동할 시, 머잖아 크리스티안은 자신의 악행 때문에 주인공에게 죽을 뻔한다.
창칼이나 마법에 맞고 정말 죽을 뻔하지만, 요행히 목숨을 건진다.
이후 정신 못 차리고 주인공에게 복수하려다 결국 죽는다.
3. 주인공이 악 성향대로 행동할 시, 머잖아 크리스티안은 자신의 악행 때문에 주인공에게 고문당한다.
주인공은 먼저 크리스티안을 거세하고, 이목구비까지 모조리 도려 낸다.
이후 주인공은 살아서 고통받으라라며 크리스티안을 살려 주고, 크리스티안은 당연히 원한을 품고 주인공을 죽이려 한다.
하지만 결국 죽는 건 크리스티안이다.
주인공이 선인이 되든, 중립이 되든, 악당이 되든 망하는 게 크리스티안이다.
그 모든 게 자업자득이고, 또 행보가 워낙 비루한 탓에 블랙 앤 화이트 사가를 즐기는 플레이어들은 크리스티안을 이렇게 불렀다.
‘크병신’.
심지어 블랙 앤 화이트 사가 커뮤니티에서 병신이라고 하면 곧 크리스티안을 뜻할 만큼 이래저래 평판이 바닥인 캐릭터였다.
“…….”
생각만 해도 크리스티안은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되던 죽을 운명인 데다, 최악의 경우에는 고자에 장님, 귀머거리까지 되어 고통받다가 죽을 운명이라니.
블랙 앤 화이트 사가의 마지막 확장팩을 못 하고 교통사고로 죽은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이젠 게임 속 세계에서 비명횡사할 운명이라니.
“그럴 수는 없지.”
크리스티안은 결심했다.
이 개 같은 운명에서 벗어나기로.
* * *
‘크병신’이 필연적으로 맞이할 끔찍한 최후를 피한다.
목적을 정한 크리스티안은 먼저 자신이 눈 뜬 세상을 다시 한번 살폈다.
이 세계가 게임 속 세상인지.
정말 그렇다면 만에 하나 벗어나 현실, 아니, 다른 세계라 불러야 할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아보았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 이 세상은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동시에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지구’에 관련된 어떤 것도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은 크리스티안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약 보름 후.
크리스티안은 부모의 사망 후 뒤늦게 눈을 뜬 자신을 위해 열린 부모의 추모식에 참여했다.
“…….”
크리스티안은 추모식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을 보며 게임 속 정보를 떠올렸다.
블랙 앤 화이트 사가 게임 정보를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로딩 화면에서 여러 정보들을 알려 주었고, 게임 속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책이나 일지 등을 읽을 수도 있었다.
좀 더 정보에 관심이 많다면 위키 등을 찾으며 각종 세세한 설정을 알아보고 공부할 수도 있었다.
그중 영주의 위상은 게임 로딩 화면에서도 자주 언급하는 기본 정보였다.
[레반드 제국이 힘을 잃으며 제국 직할령을 제외한 나머지 제국 영토 대부분은 영주나 부족장들이 사실상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현재 제국에는 총 9명의 영주가 있으며, 자신들의 영지 내에서는 왕이나 다름없는 위치입니다.]
로딩 화면에 나온 대로 현재 이 세계에서 영주는 자신의 영지에서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영주가 별로 힘을 못 쓰는 특이한 영지도 있긴 하지만, 가르시아 영지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아무튼 크리스티안은 이 가르시아 영지의 영주가 되었다.
영지 안에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높은 지위와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었다.
그런 크리스티안이 참석하는 추모식에 사람이 몰려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분명 크리스티안, 아니, 내 아버지는 좋은 영주는 아니었지만 나쁜 영주도 아니었지.’
전 영주, 곧 크리스티안의 아버지는 현상 유지를 하는 수준에서 만족한 사람이었다.
자신 또한 그 정도만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이 가르시아 영지는 별 볼 일 없지만, 평화로운 곳이니까.
‘하지만 게임 스토리대로라면…….’
크리스티안은 블랙 앤 화이트 사가의 스토리를 떠올렸다.
이 가르시아 영지는 블랙 앤 화이트 사가의 주인공인 세인과 세라가 자란 곳이다.
플레이어가 원하면 이름을 바꿀 순 있지만, 디폴트 네임은 그렇다.
자애로운 의붓어머니 밑에서 사냥꾼 노릇을 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그들은 크리스티안의 횡포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분명 ‘그 일’은 영주가 바뀌고 얼마 뒤에 시작되었어. 그렇다면 내가 새 영주가 된 시점에서 이미 톱니바퀴가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