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사기가 안 숨겨짐
즉사기가 안 숨겨짐
1화. 방구석 게이머
어둠 속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그야말로 섬광.
사선에 있던 기둥과 벽이 두부처럼 숭덩 잘렸다.
가까스로 몸을 뒤로 젖혀 피했지만, 눈부신 일격은 인간이 반응할 수 있는 속도를 가볍게 웃돌았다.
“피했는가. 그럼 이것도 피해 보아라.”
장검을 쥔 노인이 끌끌 웃으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섬광이 난무한다.
점점 속도는 빨라졌고,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검격은 도저히 숫자를 셀 수가 없었다.
지면을 재빠르게 내달리고, 곡예를 부리듯 몸을 틀었다. 그럼에도 몰아치는 연격이 점점 공감을 좀먹었다.
끝내 더 이상 피할 공간조차 사라졌다.
앞으로 물러나도, 뒤로 도망쳐도 베인다.
선택지 없는 선택을 강요당한 나를 향해 검격이 날아들었다.
“장난하냐! 이걸 어떻게 피……!”
급하게 방패를 꺼냈다.
그리고 섬광은 방패와 함께 나를 반으로 갈랐다.
[YOU DIE]
“아오! 거의 다 깼는데!”
이젠 익숙하다 못해 친근함마저 느껴지는 사망 화면에 VR 기어를 벗어 던졌다.
“방금 그 패턴은 대체 뭐야. 1프레임 단위로 날아드는 즉사기라고? 심지어 방어 관통까지 달려 있잖아!”
현실의 내 육체는 어디 잘리지도 않았지만, 머리끝까지 차오른 아쉬움과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딸깍! 치익!
이젠 생명수나 다름없어진 에너지 드링크를 크게 들이켰다.
내가 지금 열중하고 있는 게임, <아카나이트 온라인>.
글로벌 유저 수 3천만 명을 넘는 이 VR MMORPG는 소위 말하는 갓겜이다.
현실과 거의 차이가 없는 조작감을 자랑하며 탄탄한 세계관과 방대한 컨텐츠로 게이머라면 한 번쯤 상상했을 거의 모든 것이 들어 있는 것이 특징.
오죽하면 별명이 ‘어린 왕자의 상자’겠어.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 있다, 뭐 그런 거지.
“나 같은 게이머가 바라는 하드코어한 보스도 있는 건 좋지만, 즉사기를 난무하는 패턴은 너무한 거 아냐?”
지금 내가 도전하고 있는 건 ‘묘지기 카론’이라는 히든 보스였다.
서버 내에 단 10마리만 존재하는 히든 보스.
게임이 서비스를 개시한 지 3년 차에 접어드는 지금까지 히든 보스는 단 한 번도 토벌된 적 없다.
정신 나간 난이도에 어지간한 공략계 길드도 다 포기했지만…….
“세상에는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불타는 타입이 있지.”
그게 나다.
반절 넘게 단번에 들이켠 에너지 드링크가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카페인에 취한 머리가 팽팽 도는 게 느껴졌다.
“이걸로 78트였나, 79트였나… 아무튼 패턴은 다 봤어. 80트 전에 깬다.”
남은 에너지 드링크 절반을 전부 들이켰다.
게임은 좋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선명하게 보이니까.
그러니 분명.
이번에도 노력한 만큼 반드시 성공하리라.
“에너지 드링크도 이게 마지막인가. 좋아! 깔끔하게 깨고 사러 가자!”
결정했으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바로 VR 기어를 머리에 푹 눌러썼다.
시야가 잠깐 명멸하더니 내가 보는 풍경이 변했다.
좁디좁은 원룸이 아니라 황량한 평야의 다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으로.
“어디 보자, 마지막 패턴을 피하려면 역시 중량 제한이 문제인가.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려면…….”
위태롭게 흔들리는 화톳불 앞에서 시스템을 열어 장비를 변경했다.
탄탄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갑옷을 전부 버리고, 이동이나 회피 계열 스킬이 있는 가벼운 방어구로 대체했다. 필연적으로 무기 역시 가벼운 걸로 바꿨다.
그 결과.
내 캐릭터는 반바지에 상의 탈의라는 전형적인 고인물 룩이 됐다.
“역시 돌고 돌아 순정이지.”
이리저리 몸을 늘려 가며 스트레칭하듯 반응을 확인했다. VR 게임은 순전히 유저 본인의 반응 속도에 따라 움직이는 만큼 이 과정은 필수다.
“좋아. 카페인도 돌기 시작했어. 약빨 떨어지기 전에 이번에야말로 잡아 주마.”
합법적 도핑에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이 게임 속에서도 느껴졌다.
직검 한 자루를 등에 메고 오두막을 나섰다.
다 허물어져 가는 교회에 들어서자, 폐허 한가운데에 선 백발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히든 보스 ‘묘지기 카론’과 조우했습니다.]
시스템의 선언과 함께 카론은 지팡이에서 기다란 검을 뽑았다.
“썩 물러가라. 방해꾼이여.”
“이쪽은 오늘 네 목을 딸 때까지 못 돌아가거든……!”
“그런가. 그럼 그 죄, 목숨으로 청산하도록 하라.”
채앵!
카론이 휘두른 검을 직검으로 받아쳤다.
정확한 타이밍에 패링했으나 카론은 그로기에 걸리기는커녕 연달아 검을 휘둘렀다.
‘역시 크리티컬이 아니면 그로기 판정은 안 뜨나! 서버에 단 10마리밖에 없는 히든 보스다 이거지!’
하지만 그 치세도 오늘까지다.
카론이 몸통에 검을 바짝 붙였다. 날카로운 검 끝이 순식간에 나를 포착했다.
“그 패턴은 질리게 봤어!”
슉!
엇박자로 날아드는 찌르기를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오른발로 카론의 검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쿵!
기세가 꺾인 놈의 검이 지면에 박혔다.
패링과 달리 무기가 봉인되어 생긴 그로기까진 막을 수 없다.
놓치지 않고 품으로 파고들어 직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욕심을 부려선 안 된다.
정확히 3대.
그 뒤엔 아무리 허점이 많아 보여도 공격하지 않고 뒤로 굴러서 빠져나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회수한 카론이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를 베었다.
1초만 더 같은 자리에 있었다면 반으로 갈라져서 죽었으리라.
“역시 이 정도 그로기로는 약점을 때릴 틈은 안 나오겠지!”
“훌륭하다. 경의를 표하지.”
카론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슬슬 올 줄 알았어!”
방금 트라이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패턴이다. 이번엔 미리 자세를 낮춰 안정적으로 피하자, 카론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피했는가. 그럼 이것도 피해 보아라.”
진짜는 지금부터다.
즉사기나 다름없는 섬광이 난무한다.
지면을 구르고, 공중으로 도약하고, 벽까지 걷어차면서 종횡무진 즉사기 난무를 전부 회피했다.
카페인이 조금이라도 부족했다면 차마 반응할 수 없었을 속도의 공세에 전신의 털이 쭈뼛거렸다.
‘피하기만 해선 답이 없어. 방어 관통이라 막는 것도 불가능하고.’
반대로 머릿속은 굉장히 차분했다.
한 번 보았다면 두 번 당할 이유는 없다.
‘회피도, 방어도 불가능하다면 돌파구는 하나로 정해져 있지.’
착실히 피할 공간이 사라져 가는 가운데 검격을 날려 대는 카론을 주시했다.
난무하는 검격에 베인다는 공포를 억누르고 지면을 강하게 박찼다.
목표는 카론.
자살 행위에 가까운 돌진에 카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았는가.”
“그래, 보였어! 난무하는 동안 네 몸통은 훤히 비었잖아!”
채앵!
카론이 휘두른 검과 내 직검이 서로 맞부딪쳤다.
동시에 난무하던 검격이 끊어졌다.
방금 그 발악 패턴의 공략법은 1프레임 단위의 피격 판정을 피할 수 있는 타이밍에 보스에게 달려들 것.
더불어서 카론을 지근거리에서 몰아붙이는 동안 난무는 오지 않는다.
‘그럼 2페이즈 패턴은 이게 끝이겠지만… 이 정도로 끝내진 않겠지?’
상대는 악명 높은 히든 보스다.
아니나 다를까 카론은 크게 검을 휘둘러 나를 밀어내더니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경의를 표하며 내 궁극의 일섬을 보여 주지.”
궁극.
전율이 절로 이는 그 단어와 함께 카론이 검을 높게 들었다.
전에 없을 정도로 큰 동작.
빈틈투성이나 다름없지만, VR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형형한 살기가 내 피부를 찔렀다.
저 공격은, 스킬로 피하거나 막을 수 없다.
카론의 거의 모든 패턴이 그러했으니까.
그렇다면…….
“궁극이고 뭐고……!”
직검을 강하게 움켜쥐고 자세를 낮췄다. 호흡마저 잊을 정도로 극한까지 집중하자 빛을 두른 카론의 검이 느릿하게 보였다.
지금부터는 1프레임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실패하면 죽는다.
압박감이 양어깨를 짓누르지만, 그마저도 잊었다.
지금까지 쌓아 온 게임 경험과 온갖 VR 게임에서 익힌 조작감을 극한으로 발휘하여 감각을 날카롭게 벼린다.
이윽고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각도로, 정확하게 직검을 힘껏 휘둘렀다.
이에 빨려들 듯 직검이 카론의 검 끝에 맞닿았다.
까앙!
한 박자 느리게 금속이 충돌하는 새된 소리가 고막을 때리고.
[크리티컬!]
시스템의 판정과 함께, 검이 튕긴 카론이 크게 주춤거렸다.
‘그로기!’
크리티컬 판정에 의한 그로기.
몸통이 훤히 드러난 녀석을 향해 다시 한번 직검을 휘둘렀다.
서걱!
매끄럽게 질주한 직검이 카론의 목을 베었다.
깊은 상처에서 붉은 도트 이펙트가 피처럼 치솟는다.
[크리티컬!]
다시 한번 발동한 크리티컬과 함께 카론이 무릎부터 무너졌다.
“…훌륭한, 일격이었다. 내 일섬에, 후회는 없나니…….”
멍하니 중얼거린 카론은 그대로 고개를 떨구더니 이내 재로 변해 흩어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폐허에 한 줄기의 달빛이 드리우며 카론이 있던 자리를 비추었다.
[히든 보스, 묘지기 카론이 공략되었습니다.]
[공략자가 기록됩니다.]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후우! 좋았어! 드디어 잡았다!”
그 자리에 대자로 뻗었다.
“크리티컬 시스템 덕분에 살았어. 몇 번이고 그런 공격을 크리티컬 패링할 자신은 없다고.”
이 게임은 확률로 크리티컬이 발생하는 것 외에 약점을 타격하는 것으로도 크리티컬이 발생한다.
목을 치거나 심장을 찌르면 죽는 게 당연하니까.
“그나저나 히든 보스치곤 연출이 밋밋하네.”
설정을 파고들면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루고.
“보상 좀 볼까.”
[일섬]
등급: S
설명: 벤다. 그 일념만으로 묘지기가 단련한 궁극의 일섬. 베고자 한다면, 무엇이든 벤다.
“액티브 스킬인데… 뭐야, 이거. 카론이 난사했던 즉사기 아냐?”
발언 취소.
밋밋하긴 무슨.
“즉사기를 보상으로 주는 보스가 어디 있어!”
이 정도면 충분히 강렬하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운 벽에 대고 검을 휘둘렀다.
“일섬!”
음성인식으로 자동 발동된 스킬과 함께 검이 하얗게 발광했다. 뒤이어 검 끝을 따라 선이 그어지더니 두꺼운 벽이 두부처럼 숭덩 잘렸다.
“오오……!”
위력은 카론이 쓸 때에 비해 조금 약해진 감이 있지만, 그래도 충분하다.
“오……?”
하지만 이내 순수한 감탄은 의아함으로 변했다.
내가 휘두른 직검에 미세한 금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곤 막을 틈도 없이 산산조각 났다.
“갑자기 뭐야……!?”
급하게 스킬 설명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아래로 내리자, 아까는 흥분해서 보지 못했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일섬]
등급: S
설명: 벤다. 그 일념만으로 묘지기가 단련한 궁극의 일섬. 베고자 한다면, 무엇이든 벤다.
※단, 일섬 사용 시 착용 무기의 등급이 낮을 경우 무기가 파괴됩니다.
“…쓰읍, 방금 그것도 제법 등급이 높은 아이템이었다고. 이러면 사실상 일회용이잖아.”
더 등급이 높은 아이템으로 시험해 보고 싶어도 장비가 아까운 것도 사실.
더군다나 카페인 약빨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좋아. 나중에 생각하고 오늘은 끄자.”
바로 로그아웃하고 VR 기기를 벗었다.
“…….”
교회의 폐허보다 좁은 원룸을 보자니 묘하게 마음이 착잡해진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이질적인 감각이 척수를 타고 올라왔다.
뒤이어.
쿵, 쿵, 쿵, 쿵!
심장박동이 기묘하리만치 선명하게 느껴졌다.
눈앞이 번쩍거린다.
세계가 뒤틀리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심장을 부여잡았다.
카페인 중독 부작용인가? 이대로 죽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대상 ‘이도현’의 적합 유무… 확인]
[각성 특전이 지급됩니다.]
[방구석 게이머]
등급: EX
설명: 아! 인간이란 유희를 즐기는 생물입니다! 오직 그 유희에 매진한 당신에게 시스템이 특별한 축복을 선사합니다. 유희에서 얻은 보상은 당신에게도 지급됩니다. 부디 유희를 즐겨 주시길!
“뭐지……?”
새하얗게 물든 눈앞에 어딘가 낯익은 UI가 비처럼 쏟아졌다.
[각성자 특전으로 시스템 접근 권한이 개방되었습니다!]
[상태창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방구석 게이머의 재사용까지 앞으로 71시간 59분…….]
[획득한 보상 1건이 지급 대기 중입니다!]
[보상 ‘일섬’]
[현현 조건… 충족]
그리고.
[스킬 ‘일섬’이 지급되었습니다!]
이 싸움을 끝내러 왔다
즉사기가 안 숨겨짐
지은이 : Hiran
발행인 : 서경석
전자책 발행일 : 2025-08-11
출판사 : 도서출판 청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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