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원수에게 고한다
처음에는 울분으로 인한 비명과 울음이 그치질 않았다.
도대체 내가 무얼 잘못했기에 이런 끔찍한 비극과 영겁의 고통을 안긴단 말인가.
항상 협의를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작금의 비참한 몰골이 그 결과라니.
이 세상에 정의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저 푸른 하늘은 눈과 귀를 가리고 지상을 방관하고 있는 것일까.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어차피 운명이었음을.
저 원수들은 나를 노리고 있었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든지 잡아먹었을 것이다.
내가 협객이든, 악인이든. 아니면 무인이든, 서생이든.
그들은 내 살과 뼈를 찢고, 내 명예와 긍지를 짓밟았을 것이다.
그리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 안에 ‘암흑’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똬리를 틀고 있었음을.
언제 어디서든, 어떤 계기가 되었든 간에.
그 ‘암흑’은 부화하여 줄기를 뻗어 개화(開花)했을 것이다.
어두운 복수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그러니 운명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나의 이름은 ‘단목현(壇木賢)’이었다.
항주의 명문, 단목세가 방계 출신으로 집안에 상재가 있어 금수저로 식사하고 비단 금침을 덮고 자랐다.
아버님은 나에게 비범한 무재(武才)가 있음을 재빨리 알아채셨다고 했다.
4살 때 장난감 목검으로 본가의 상승 검술 초식을 펼쳐냈다고 하니, 그걸 모를 수가 없지.
부를 이루었지만, 무가로서의 자존심을 되찾고 싶었던 부친.
나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하기로 결심, 재산을 아끼지 않고 온갖 영약을 복용시켰고, 뛰어난 절세 고수들을 초빙하여 가르치게 하셨다.
나는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불과 12살에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의 누구도 내 상대가 되질 못했고, 15살에 단목세가 검술 대전에서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무림맹에서 개최한, 후지기수 최고 기량자를 뽑는 용봉지회(龍鳳之會)에서 최종 우승을 차지했다.
그 당시의 광경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소림, 무당, 화산, 구파 일방, 오대세가의 쟁쟁한 젊은 고수들이 소년에 불과한 나에게 나가떨어질 때마다 광활한 무림맹 연무장이 환호성으로 가득 차곤 했었다.
강호 명숙 어른들의 진심 어린 감탄과 칭찬이 끊이지 않았고, 부러움과 시기, 질투의 시선이 끊임없이 내리꽂혔다.
아버님은 그날 밤에 용봉지회 우승장을 끌어안고 펑펑 우셨다.
홀로 계셔서 아무도 모를 거라 여기셨지만, 내가 방 너머에서 똑똑히 듣고 있었다.
무림인들이 나에게 ‘유성검(流星劍)’이라고 부르며 칭송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곧, 나는 절강성 남부로 가서 흑도, 사파, 마도와의 투쟁에 참여했다.
흑수궁의 궁주, 녹림맹의 장로, 무슨 놈의 귀(鬼), 무슨 놈의 마(魔).
셀 수 없는 악인들이 내 검에 무릎 꿇었다.
왜구가 해안가를 침범하여 약탈하자, 지체하지 않고 검대와 동지들을 이끌고 참전했다.
그들의 수장을 세 명이나 베었고, 왜선 다섯 척을 침몰시켰으며, 왜구의 뜨거운 피로 바닥을 질펀하게 적셨다.
이후에 왜구는 나만 보면 ‘검귀(劍鬼)’라고 비명을 지르며 꽁지를 뺐다.
극마혈교(極魔血敎).
그렇게 천하제일협객의 자리를 향해 나아가던 차에 우연히 발견한 사교 무리다.
그동안 사악한 집단을 여럿 봐왔지만, 이들은 그중에서도 단연코 최악이었다.
피와 마(魔)를 숭상하며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끔찍한 살육과 인신 공양, 온갖 잔인한 행위를 서슴지 않고 행하는 자들이었다.
더욱 무서운 점은 철저히 자신들의 정체를 감추고 있어서 누가 교인인지, 세력이 정확히 얼마나 거대한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극마혈교야말로 평생 숙적이 될 것임을.
나는 강호 투쟁의 경험으로 어떤 조직이든 돈줄을 먼저 쥐어 틀어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었다.
재물이 없으면 숨겨진 몸통을 드러낼 수밖에 없으리라.
눈에 불을 켠 나는 그들의 지원금을 추적했고, 거대 상단과 연관이 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이제 너희의 꼬리를 잡는 건 시간문제다.
정체만 드러나면.
사악한 마인(魔人)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베어버릴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 나이 이제 23살.
어리다면 어린 나이지만, 나는 남들이 한평생 노력해도 이루지 못하는 업적을 이루었고, 광영을 누리고 있었다.
단목세가 최강의 검대, ‘폭우대(暴雨隊)’의 대주였고, 방계 출신임에도 소가주 후보로 강력하게 거론되었다.
아버님의 꿈인 가문의 대권을 차지할 날이 다가온 것이다.
천하십대검객에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그 별호를 올렸으며, 무림맹에서 간부직을 계속해서 권고받았다.
태풍이 불기 전에 밤하늘이 가장 고요하다고 했던가.
당시의 나는 성공 가도에 올라타 행복과 영광이 내 손아귀에 잡힐 거라 여겼다.
그런데 ‘그날’이 닥치고 말았다.
* * *
너무 하찮은 문제여서 별거 아니라고 여겼다.
신고가 들어와 무림맹에서 몇 가지를 조사한다고 같이 가자고 했다.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저 극마혈교에 대한 추적이 지연되어 짜증이 잠깐 날 뿐이었다.
그렇게 따라간 방에는 무림맹 최고 고수들이 잠복해 있었고, 무방비였던 나는 무기력하게 검을 빼앗기고 점혈당하고 말았다.
“유성검 단목현! 가증스러운 극마혈교의 혈마(血魔)! 거기다가 관동대협을 살해해? 너를 추포하여 벌하겠노라!”
청천벽력(靑天霹靂).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관동대협(關東大俠) 조인(曺引)’은 나와 함께 극마혈교를 추격하는 선배이자 동지였다.
게다가 나를 극마혈교의 장로 격인 혈마라고 지칭하다니.
만년한철에 묶여 호송되는 와중에 차츰 내막을 알게 되었다.
조인이 살해된 현장에 나의 유성검의 흔적이 뚜렷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목격자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는데.
그 신분이 경악할 만했다.
나의 의형제이자 협객인 ‘철검비룡(鐵劍飛龍)’과 사랑하는 약혼녀 ‘수영’ 소저가 내가 살해하는 현장을 목격했다고 했다.
내 혐의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단목세가에서는 내가 가문의 재물을 횡령하고 시녀들을 정기적으로 강간했으며, 하인들을 이유 없이 살해하는 것을 즐겼다고 폭로했다.
항주 장가상단에서는 내가 비밀리에 극마혈교의 혈마가 되었으며, 자신들을 협박하여 교에 재물을 공급했다고 고발했단다.
고발과 폭로는 조인의 암살 뒤에 곧바로 이어져서 숨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아주 잘 짜인 함정.
그물이 어찌나 촘촘한지 도무지 빠져나갈 틈이 보이질 않았다.
호송 마차에 실려 가는 와중에 나는 곱씹고 또 곱씹어봤다.
도대체 왜.
장가상단이야 극마혈교와 관련이 있으니 그랬다고 치자.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나의 의형제는 어째서 나를 배신했는가.
백옥보다 아름답고, 선녀보다 착하던 나의 약혼자는 왜.
본가인 단목세가는 어째서 거짓 폭로를 해서 그들을 도왔을까.
약혼자의 가문인 남궁세가와 백도의 연합인 무림맹도 나를 돕기는커녕 구렁텅이로 더욱 세차게 밀어 넣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왜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합심하여 나를 지옥으로 떨어트리고 있는가.
어째서일까.
호송 마차에서 나를 구한 사람은 아버님이었다.
그분은 그동안 모은 모든 재물과 전투 인원을 동원하여 호송대를 습격했고, 천신만고 끝에 나를 구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를 위해 치른 대가는 처참했다.
전력을 다했기에 아버님은 물론 우리 집이 거의 멸문에 이르는 결정적 타격을 받은 것이다.
하늘나라로 떠나시기 전, 아버님은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유언을 남기셨다.
―살아남아야 한다! 생존! 그것을 최우선으로 두어라!
걱정으로 인해 아버님은 끝내 눈을 감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저들은 나에게 부친을 살해한 패륜아라는 누명까지 씌웠다.
하루아침에 나는 강호 최고 기린아이자 영웅호걸에서, 인륜마저 더럽힌 천하에서 가장 악독한 짐승이자, 잔인한 혈마가 되었다.
온 세상이 나를 비난하고 증오하고 쫓아왔다.
무림맹은 나를 무림공적으로 선언하고 황금 백이십 냥의 현상금을 걸었으며, 추격 부대를 다수 파견했다.
단목세가와 남궁세가는 오대세가의 고수들과 함께 가문의 패륜아를 처단해야 한다면서 이를 악물고 추격해왔다.
극마혈교는 끊임없이 자객을 보냈고.
현상금을 노린 사냥꾼들은 나에게 밥 먹는 시간도, 잠잘 시간도 허락지 않았다.
도망자가 된 나는 처절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긍지도, 명예도 필요 없었다.
아버님 말씀이 옳았다.
생존이 최우선이었다.
살아남아야 오해를 풀 수 있고, 복수를 할 수 있고, 재기할 수 있었다.
우선 살아남아야 했다.
진흙탕을 지렁이처럼 기어다녔고, 시궁창과 거름통에 숨기도 했고, 나병 환자들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돼지 밥을 훔쳐 먹으면서 배를 채웠고, 썩은 물로 갈증을 채웠으며, 차가운 구덩이에서 웅크려 잤다.
그렇게 보낸 8개월.
나는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폐인이 되어갔다.
왜 살아야 하는가.
아니,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가.
차라리 자신을 끝장내는 것이 깔끔하지 않을까.
이런 끔찍한 고통은 그만 끝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내가 행한 것은 아닐까.
내가 관동대협을 살해하고, 친부를 해친, 극마혈교의 장로였던 것일까.
기억이 나지 않을 뿐.
나는 진정한 악인은 아니었을까.
뇌가 망가지다 보니.
이런 망상까지 들었다.
어느 날, 꿈을 꾸었다.
나를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트린 자들이 한곳에 모여 즐겁게 담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의 정확한 형상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표정이 덧없이 밝고 행복했던 건 기억난다.
웃고 떠들고 서로를 칭찬했다.
값비싼 의복, 목걸이, 반지, 귀걸이는 번쩍거렸고 부푼 배때기에는 기름기가 줄줄 흘렀다.
나의 약혼녀는 다른 사내들과 시시덕거리며 사통했고.
본가와 백도인들은 극마혈교 마인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이런 개자식들.
이것이 나의 몰락으로 너희가 얻은 달콤한 과실이더냐.
아아…….
눈을 뜬 나는 이제 생존의 목적을 찾았다.
나는 그들을 하나하나 남김없이 모조리 다 찾아낼 것이다.
그 재수 없는 상판대기를 찢어발겨 주겠다.
너희가 가진 모든 걸, 희망과 야망, 욕망까지 모두 파괴해주겠다.
너희들의 피를 뽑아 마시고, 껍질을 벗겨서 튀겨버리겠다.
너희들의 입에서 나온 비명을 악기 삼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겠다.
그렇게 다짐하고 일어선 나는 더 이상 단목세가의 공자였던 유성검이 아니었다.
내 안에 있던 ‘암흑’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천하의 누구도 믿을 수 없었고, 누구도 나를 반기지 않았다.
오로지 단 한 곳만이 나를 받아주리라.
악인곡(惡人谷).
이름만 들어도 침을 뱉는다는 희대의 악인 넷이 다스린다는, 무림 공적들이 모여 사는 그 계곡.
거기라면 마두에 혈마가 된 나를 받아줄 수도 있겠지.
원수들에게 고한다.
이제 나는 협객이 아니다.
백도도 아니고, 정식 무인도 아니다.
너희가 나를 ‘암흑’으로 만들었다.
내가 흘린 피눈물은 더 이상 나를 다치게 하지 않는다. 나를 나락으로 이끌지 않는다.
그 눈물은 날카로운 날붙이가 되어 너희들의 심장을 후벼팔 것이다.
절망에 물들었던 나의 비명은 영원토록 울려 너희들의 뇌수를 파먹을 것이다.
너희에게 내일이 있다고 보는가.
그렇담 오늘을 즐겨라.
다음 날 아침엔 증오의 안개가 너희를 감싸안을 테니.
각오하라.
암흑이 다가온다.
너희들의 지저분한 인생에서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 거대하고 잔혹한 암흑이 너희를 덮치리라.
허언이 아니다.
이건 예언이다.
운명의 순간이 오면.
나는 너희들을 위해.
진혼곡을 부르고 춤을 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각오이니라.
죄지은 영혼을 감상하는 나의 진혼곡이니라.
암흑진혼곡 (연재)
지은이 l 취설
발행일 l 2025.02.24
펴낸곳 l (주)디엘미디어
출판등록 l 제 2023-000094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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