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탄 괴담에 너무 잘 적응했다
나폴리탄 괴담에 너무 잘 적응했다
1화
0. 본 지침은 우연, 또는 고의로 영원마을에 도착하게 된 분들을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본 지침서는 가능한 한 귀하에게 많은 정보를 알려 드리는 것이 목표이므로 안내사항이 다소 많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아닌 존재와 마주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굳이 전부 외우지는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침을 외우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지침 불이행으로 인한 불상사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무사히 탈출하셨다면, 근처에 기다리고 있을 이상공간 조사/처리 전문업체 ‘가온나래’의 사원으로부터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0-1.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서 마을을 빠져나올 수는 없습니다. 이 방법을 시도한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습니다.
0-2. 영원마을 내의 모든 존재는 사람이 보기에 불쾌할 수 있는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동요하는 경우 그것들은 당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것입니다. 최대한 익숙한 듯이 행동해야 합니다.
1. 영원마을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마을입니다. 귀하가 인간인 걸 들켜서는 안 됩니다.
크게 심호흡하거나 지나치게 불안해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이 알아차릴 겁니다.
2. 영원마을에서는 환청을 겪을 가능성이 큽니다.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인 것 같다면 그냥 무시하셔야 합니다.
3. 영원마을 입구에 도착하면 매번 다른 주민과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만나게 될 주민은 언제나 이 세 명 중 하나입니다.
3-1. 회색 피부의 어린아이를 마주친다면, 그 아이는 당신에게 놀자고 권할 것입니다. 아이가 만족할 만큼 놀아 준다면 영원마을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이가 만족할 만큼 놀아 주지 못할 경우, 귀하의 신체는 아이의 장난감으로 쓰이게 될 것입니다.
↳20■■.■■.■■ 추가
아이가 ‘언니’를 언급하며 신체 부위 전부가 아니라 신체 일부만을 가져가는 현상이 확인되었습니다.
아이가 가져가는 신체 부위는 주로 손가락이나 발가락 등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이가 말하는 ‘언니’ 는 후술할 항목에 나오는 존재로 추정 중입니다.
“아니, 그거 아냐!”
나는 지침서를 읽다 말고 그대로 내던져 버렸다. 저 ‘언니’ 는 내가 맞기는 하지만, 나는 인간이다!
나폴리탄 괴담 같은 지침서가 있는 마을에 들어온 지 몇 년째, 나는 지금 인간이 아니라는 오해를 받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지침서에 등장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의심스럽게 행동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대체 어디부터 문제지?’
끝까지 읽어야 왜 이런 오해가 생겼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다른 존재들에 대한 설명을 읽었다.
3-2. 검은색과 붉은색이 섞인 가면을 쓰고 원피스를 입은 존재를 마주쳤을 경우, 최대한 웃으며 응대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이야기를 끝내지 않을 것이며, 대화가 만족스러웠다면 귀하를 보내 줄 것입니다.
만족스럽지 못했다면 그것은 귀하를 최근에 새로 구매한 전기톱의 실험체로 사용할 것입니다.
3-3. 모자를 쓴 노인과 마주치는 경우 최선을 다해 노인의 모자를 칭찬해야 합니다. 표현이 과장될수록 좋습니다.
노인이 만족했다면 그것은 귀하를 보내 줄 것입니다. 불만족스러웠을 경우, 그것은 귀하의 머리를 모자의 장식으로 사용할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이해가 되는데.’
위험해 보이고, 위험한 존재가 맞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나에 대한 설명이다.
3-4. 완벽하게 사람 같은 존재가 귀하를 도와주겠다며 접근하는 경우, 즉시 도망치십시오.
사람을 닮은 존재는 가장 위험한 존재 중 하나입니다.
‘사람 같은 게 아니라 사람이라고!’
내가 진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무도 안 했던 걸까?
지침서의 확신에 찬 말투 탓에 더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까지 오해받을 일을 했던 기억은 없는데.
‘다른 데는 뭐라고 적어 뒀는지나 보자.’
4. 무사히 마을 안으로 들어갔을 경우, 귀하는 세 종류의 가게 중 하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4-1. 식료품점이 보이면 들어가서 제품을 보더라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품을 구매해서는 안 됩니다. 대가가 무엇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운이 좋다면 구석에서 붉은 장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져가면 도움이 될 겁니다.
이 음식점에서는 낮은 확률로 음식점 주인과 마주칠 수 있습니다. 주인과 마주친 경우, 그는 귀하에게 맛있는 냄새가 난다는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반드시 방금 식사를 하고 왔다는 말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부위를 먹었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주인은 당신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인육이라고만 답하는 경우, 주인은 당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것입니다.
4-2. 옷 가게가 보일 경우, 들어가지 않는 것을 권장합니다. 옷 가게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으면 그곳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사라질 것입니다.
만일 들어갔다면 마네킹 쪽으로는 시선을 두지 않고 오로지 가게 주인의 얼굴만을 보면서 대화해야 합니다.
주인의 말에 적당히 반응만 하는 정도로 대화를 이어 가십시오. 가게 주인은 십 분가량 대화한 후 귀하를 보내 줄 것입니다.
주인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면 귀하에게 붉은 장미를 서비스로 줄 수도 있습니다. 장미는 분명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만일 마네킹을 본 경우, 그것이 사람의 시체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귀하가 다음 마네킹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20■■.■■.■ 마네킹이 평범한 마네킹으로 변경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가게 주인은 이에 대해 ‘친구’를 언급했습니다.
현재 회색 피부를 가진 어린아이가 언급한 ‘언니’와 동일한 존재로 추정 중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건 맞긴 하지.’
옷 가게 주인을 설득한 게 나니까. 지나갈 때마다 인간의 시체를 봐야 하는 게 괴로웠던 탓이다.
4-3. 평범한 회색 주택이 보일 경우, 절대로 100m 내로 접근하지 마십시오. 가장 위험한 존재가 거주하는 공간입니다.
만일 회색 주택에 이미 가까워졌다면 낮은 확률로 주택의 주인을 만나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주택의 주인을 만난 경우, 행운을 빕니다.
‘왜?’
나는 진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어쩐지 요즘 다들 나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더라니.
‘이거 다 읽어야 하나.’
읽다 보니 어이가 없어져서 나에 대한 언급이 있는 부분만 눈으로 빠르게 훑어봤다.
5-1. 분수대 근처에서 완벽하게 사람 같은 존재가 말을 거는 경우 당장 그 근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 존재와 마주하고서 생존해 나온 경우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죽인 적 없는데?’
잘못된 게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바로잡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6-3. 아까와 똑같은 회색 주택이 나타난 경우, 최선을 다해 도망치셔야 합니다.
집의 주인이 나와서 탈출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하더라도 믿지 마십시오. 인간같이 생겼어도 인간이 아닙니다.
명심하십시오, 영원마을에는 인간이 거주할 수 없습니다.
‘거주한다고!’
7-3. 사람같이 생겼고 트레이닝복을 입은 존재가 보이면 즉시 도망쳐야 합니다. 영원마을에 거주하는 존재 중 가장 위험합니다.
그것이 당신을 도와주겠다며 사람 같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도 넘어가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그것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생존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계속 말을 걸더라도 무시하고 지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곧 당신과 대화하기를 포기할 것입니다.
해당 존재는 ‘3-1’의 ‘언니’, ‘4-2’의 ‘친구’와 동일한 존재로 추정됩니다.
‘그건 맞지만!’
어쨌든 지침서는 생각보다 영원마을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나에 대한 것만 빼고!
‘돌아버리겠네!’
어디부터 문제였을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문제였다.
그날따라 잠이 너무 안 와서 운동이라도 할 생각으로 밖에 나간 참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걷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그때 돌아갔어야 하는 건데.
나는 멍청하게도 폐가와 흉가와 음침하고 어두운 숲을 지나칠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주변을 살펴보니 이 마을에 들어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지침서를 제때 발견해서 거기 적힌 대로 따라 할 수 있었다는 거다.
다행이 아닌 사실은, 지침서를 너무 잘 따라 해서 인간이 아닌 척을 너무 제대로 해 버렸다는 거고.
‘진짜 끔찍했지…….’
생각해 보면 여기 있는 그것들이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정말로 다행이었다.
거짓말을 잘했다면 지금쯤 내가 누구에게 속아서 시체가 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지침서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지.’
예전에는 지침서에 ‘영원마을의 주민들은 거짓말을 하지 못합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 구절이 없어진 건 아마 나 때문일 것이다. 마을에 들어온 사람을 도와주려다가 내가 이 마을 주민이라는 걸 들켰으니까.
대충 그때부터 지침서를 작성하는 사람들이 나를 ‘가장 위험한 존재’로 분류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새삼스럽게 억울해졌다. 나도 이런 마을에서 매일 불안해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단 말이다.
영원마을 밖에서 살 때보다 나은 게 있다면 내 집이 있다는 사실뿐이다. 친절히 회색 집으로 안내해 주더라고.
다른 존재들도 생각보다 친절하다. 내가 인간인 걸 들키지만 않으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내가 ‘인간을 모방할 수 있는 존재’라는 오해 덕분에 지금까지는 편하게 살고 있다.
내가 가장 강한 존재라는 오해는 필요 없었을 것 같지만 말이다. 이건 정말로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목 없는 그놈을 패서 그런가. 솔직히 나도 그놈이 그렇게 얻어맞고만 있을 줄 몰랐다.
‘아니, 근데.’
침대에 드러누운 채 다른 생각을 해 보려고 했지만 결국 지침서에 관한 생각으로 돌아와 버렸다.
내가 무사히 나가도록 도와준 사람이 꽤 되는데 왜 자꾸 나랑 마주치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나랑 마주친 사람들의 생존이 확인되지 않는 건 그냥 생존자의 기억이 없어져서 그런 거라고!
내가 안내해 주는 출구로 가면 이 마을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잊어버리게 되니까!
‘근데 좀 이상하지 않나?’
죄다 영원마을에 대해서는 잊어버렸을 텐데, 나랑 마주쳤다는 건 또 어떻게 기억하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내가 풀 수 없는 의문이다. 지침서를 만드는 회사에 일하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또 몰라.
‘나는 출구를 아는데도 못 나가는데!’
생각하다 보니 새삼스럽게 억울해졌다.
마을이 주민으로 인식한 탓에 나는 다른 공간에 하루 이상 못 머무는데 다른 인간들은 출구를 알려 줘도 그걸 믿지 못한다니.
“…됐어.”
안 좋은 생각은 그만두고 다른 생각을 하려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그레아일 것이다.
지침서에 쓰여 있는 회색 피부의 어린아이를 말하는 거다. 문을 열자 그레아가 나를 빤히 봤다.
나폴리탄 괴담에 너무 잘 적응했다
나폴리탄 괴담에 너무 잘 적응했다
지은이 : 루로레
발행인 : 서경석
전자책 발행일 : 2024-08-30
출판사 : 도서출판 청어람
등록번호 : 제387-1999-0000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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