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START UP!
죽음, 그 후 (1)
숨이 턱까지 차다 못해서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저쪽이다, 쫓아라!”
“허…… 헉헉……. 제길…….”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면서 이제 조금 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쓰러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째서 쫓기게 된 것일까.
완벽……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누구도 찾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귓가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어김없이 자신의 발밑을 허물었다.
“찾았다. 전前 승상 유승한柳承翰의 자子, 유벽현柳碧玄. 큭큭,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유 승상의 아들이 이런 시궁창에 숨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군.”
“크윽…… 대체, 어떻게 안 거지?”
그나마 목소리가 떨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덜덜 떨리고 있는 온몸이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렸다.
아마도 죽을 것이다.
살아남았다고 생각했지만 이 흑의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자는 이제까지 내가 도망쳐 온 자들과 달랐다.
사지가 묶이더라도 살아 나갈 자신이 있었는데 이자에게서는 그 어떤 빈틈도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나를 무기력하게 옭아매는 공포뿐.
“시궁창에 제법 잘 적응해서 산 모양이지만 큭큭, 그 고운 손은 누가 봐도 거슬려.”
“손……?”
흑의인의 말에 손을 보았다.
흙투성이에 때 묻은 손이었지만 흑의인의 말대로였다.
한때 나의 자랑이었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붓을 쥐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손은 이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흙투성이가 되어도 볕에 타지 않은 하얀 살결은 감추기 힘들었고, 가지런하게 정리된 손톱도 그러했다.
그들처럼 얼굴을 꾸미고, 그들처럼 말하고 먹고 자고, 그들처럼 가장 바닥에서 숨 쉬었다.
내 몸에 뱄던 고상한 예의와 내가 지켰던 신념, 내가 믿었던 모든 기반을 없애고 짐승 같다 생각했던 그들의 방식에 따라 욕하고 낄낄대고, 살기 위해 속이고 훔치고 때리고 배신하고, 죽였다.
그런데 고작 손이라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하하하! 세월마저 속일 수는 없었던 건가. 하…….”
나는 그럴듯하게 연기했지만 결국 오랜 세월 만들어져 온 나란 인간의 본질마저 바꾸지는 못했던 것이다.
뭐가, 뭐가 천고의 기재 유벽현이란 말인가!
결국 우매하다 여겼던 그들조차 속이지 못해 이렇게 꼬리를 밟혔는데.
죽기 직전에 몰려오는 자괴감과 분노는, 평생을 지켜 왔던 얼굴의 가면을 깨 놓기에 충분했다.
“자! 공자, 이제 시간이 되었다. 네 목을 기다리는 분들이 꽤 계신단 말이다.”
나의 죽음을 선고하면서도 일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그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나도 이제 그들 곁으로 가는 건가.
더러운 옷이 축축이 젖어 오고 입안이 바짝 말랐다. 덜덜 떨리는 몸이 수치스러워 그것을 찝찝해할 여력도 없었다.
이것이 죽음의 공포라는 걸까.
이제까지 나는 내가 이런 공포를 알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다. 분명 나 또한 인간이니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적어도 나만은 이 죽음이란 놈 앞에서도 의연하리라 믿었다.
‘큭큭. 이 얼마나 오만하고 겁 없는 인간이었던가.’
스스로 비웃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내 자신이 우스워졌다.
오만傲慢.
천고의 기재 유벽현.
나는 내 이름 석 자 앞에 붙은 ‘천고의 기재’라는 수식어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던 인간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 높은 개국 공신이자 천하의 명재상이라는 유승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내가 누리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집안의 장자가 있었지만 나는 그보다 단연 우수했다. 어머니는 차디찬 나보다 다정한 형을 친애하였으나 아버지와 집안 어른들은 내가 차남인 것을 안타까워했다. 나는 황자들과 여타 귀족 자제들과 함께 국학國學에 들어 대당제국의 태학들에게 고금 제일의 교육을 받았고, 사람들은 나태한 황태자와 승냥이 같은 그의 형제들을 대신하여 ‘나’를 제국의 신성新星이라 칭송했다.
언제나 스승님의 맞은편 앞자리는 나의 지정석처럼 비어 있었다. 그래, 그렇게 믿었다. 비어 있는 지정석처럼 나의 지위도 확고하고 탄탄할 것이라고.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아버님의 손에서 날로 번창해 가는 제국을 보면서 나 또한 저들을 내려다보며 승승장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곧, 내 발밑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알았어야 했다.
그때쯤 고조高祖는 이미 늙고 나중에는 병까지 들어 더 이상 나라를 지탱할 그릇이 되지 못했고 장성한 아들들은 비좁은 황제의 품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승승장구하던 현문유가玄門柳家는 황제의 비호를 잃고 다음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첫째 황태자 건성을 정통성은 있으나 나태하다 말했고, 둘째 세민은 문무에 빠지는 것이 없었으나 어미가 오랑캐 출신이었으며, 넷째 원길은 강한 장수지만 무식하고 흉포하다 평했다. 아버님은 그 셋을 두고 고민에 빠졌고, 세 황자들은 모두 유가를 끌어들이기 위해 사람을 보내고 서신을 보내왔다.
그러다 한 번 아버님께서 우리에게 의견을 물으셨을 때, 매사 다정하기 짝이 없는 형님은 실없이 웃으면서 그저 따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형님을 비웃으며 ‘첫째를 밀 거면 둘째를 죽여야 하고, 둘째를 밀 거면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 뒤, 아버진 다 죽어 가며 제 몸밖에 모르는 황제의 부탁으로 황태자 건성을 택했다.
그 결과 이세민이 숨겨 두었던 독니를 드러내었다.
천년만년 영화를 누릴 듯하던 집안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나고, 역적이라 칭해지며 주변의 모든 사람 심지어 키우던 마소도 죽임 당했다. 늘 거대해 보였던 아버지는 비쩍 마른 몰골로 아직도 성벽에 그 목이 효시되어 있고, 그 옆에는 내게 눌려 제 자리조차 위태로웠던 멍청한 나의 형이 나를 대신하고 있었다.
멍청한……!
썩어 빠진 황제의 피 따윌 믿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런 피를 신봉하던 아비를 그냥 두는 것이 아니었다. 비대한 몸에 비해 비루하기 짝이 없는 머리를 가진 황태자 따위에게 굽실거리는 것이 내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것을 그냥 지나친 나의 무심이 내 발목, 아니 내 명줄을 잡은 것이다.
“한 가지만. 그분은…… 그분도 죽었나?”
내 질문에 흑의인은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한 듯 거만하게 웃었다.
“호! 역시 천고의 충신 유가로고. 이 와중에도 그가 걱정되나? 황태자가 죽었냐고? 큭, 죽었지. 그 비둥비둥한 몸뚱어리가 미쳐서 연못으로 기어 들어가는 꼴을 봤어야 했는데 말이야, 큭큭큭!”
“죽……었다고? 그래. 그럼, 됐다.”
“……?”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몸이 어느새 가라앉고, 나는 아마도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내 모습에 흑의인이 처음으로 망할 웃음이 아닌 다른 감정을 보였지만 상관없었다.
그래, 황태자가 죽었다고. 속은 조금 풀리는구나. 잔인한 이세민은 그 혈족들도 살려 두지 않았을 테니, 우리 집안의 끔찍함이 그곳에도 닿았겠구나.
“왜 웃지? 충신님이 아니었나?”
“충신? 아아, 충신이었지. 그 멍청한 놈이 우리 목숨을 가져다 바치기 전까진.”
모두 그놈에게 충성한 대가였다.
그놈은 저 하나를 위해 거는 모든 목숨들을…… 아니다, 사실은 그의 탓이 아니다. 이렇듯 죽음의 이유를 그에게서 찾고 그를 탓해 버린다면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는 멍청이들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전부, 제 목숨조차 감당하지 못했던 멍청이에게 아낌없이 목을 걸었던 우리의 잘못이었다.
‘아버님! 한 나라의 그림자로 산다는 것이 그런 것이라 하셨습니까. 모두 죽었습니다! 시궁창에 발을 뻗은 거지도 죽음 후에는 안식하는 법인데 지금 성곽에 걸려 있는 당신의 죽음은 그 공평한 안식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크흐흐흣!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그냥 곱게 뒈질 걸 그랬습니다. 제가 아니었다면…… 혹시 형님은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그 미련 곰퉁이라면 아마 백성들 사이에 섞어 두면 아무도 몰랐을 것을. 참 허망하고 슬픕니다, 아버지……. 달리 선택했다면 이런 비참한 결과는 피할 수 있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가족들이, 겨우 세 살 난 희야마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참수당하는 이 참담함만은 피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뭐가, 대체 뭐가 찬란한 태양의 그림자였단 말입니까!’
개국 공신 유가. 제국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유 승상. 그 이름을 택한 대가가 이런 비극일 줄 알았더라면 나는 결코 그 길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문을 위해 모진 목숨을 이었지만 지금 와서 보면 그 모든 희생과 곧 닥칠 나의 죽음까지도, 모두 개죽음이 아니겠는가. 이런 결과를 알았더라면 절대로 그놈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선택을 하게끔 두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더러운 정치 싸움에 휘말려 내 죽음이 개죽음이 된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그렇게 두었다는 사실이 지독스레 자존심이 상했다. 당장 죽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젠장, 생각해 보면 그놈은 덕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성격 좋은 돼지였어!’
“그림자 따위…….”
사실은 아버지를 닮고 싶었지만 그림자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환한 태양 아래 천지를 아우르는 기상으로 우뚝 솟아 있고 싶었다.
매처럼 비상하고, 고고한 학처럼 추락하고 싶었다.
‘못났네. 이기적이야. 큭!’
나를 대신해서 죽은 형과 우리의 선택으로 비명에 간 어린 것들에 대한 죄책감보다 내 삶에 대한 후회와 그 후회를 하는 자체에 더 상처받는 내 자존심을 보면 나는 원래부터 이다지도 이기적인 인간이었나 보다.
왠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라, 웃어? 죽음을 앞두고 빌고 사정하고 소리 지르고 발악하는 놈들은 여럿 봤지만 웃는 놈은 처음이군. 재밌네, 재밌어. 큭큭, 공자의 비명은 어떨까 궁금하지만 공자는 재밌으니까 편하게 죽여 주지.”
아아, 그거 고맙네……라고 말할 줄 알았나.
죽음이 편한 것이 어디 있나, 지금도 이렇게 불편한데 말이다.
‘변태 같은 놈. 내 몸에 이런 천한 놈의 칼이 닿……!’
쉬익-!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찰나.
“커헉……!”
마지막으로 내 것이 아닌 듯한 소리가 새어 나오고, 나는 그놈이 휘두른 칼을 보지 못했다는 것과 그 변태 같은 놈에게 내 신음 소리를 들려줬다는 것에 또 기분이 상했다.
그렇게 세상이 까맣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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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눈을 뜨고 본 광경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온갖 기묘화초 대신에 고풍스러운 소나무와 시원스러운 잣나무, 하얗고 깨끗한 백사로 이루어진 투박하지만 단아한 미가 일품인 정원이 있었다.
게다가 담백한 정원은 오히려 색색의 문양이 화려하다 싶은 전각들을 더욱 고급스럽게 살려 주니, 처음에는 이곳이 천국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곧 이곳이 현세의 어느 장원임을 알게 되었다. 결코 그런 방식으로 알고 싶진 않았지만……. 지금 그는, 현재의 자신에게 적응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