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원짜리 재벌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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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원짜리 재벌


0화




[파이낸셜 투데이 우서인 기자


대한민국 경제의 신화 격인 RL그룹 홍건익 회장이 사재 1조 950억 원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져 연일 화제다.

특히나, 일반적인 기업들과 같은 재단을 통한 사회 환원이 아니라 ‘사재’를 각 기관에 ‘기부’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더하고 있다.

이와 같은 행보에 대해 한규철 총리는 이례적으로 담화문을 내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각계각층에서도 찬사가 이어지고……(후략)…….


“홍 회장님! 누적 기부액이 1조 5천억 원 넘어 기부의 신으로 불리고 계신데, 소감 한 말씀 해 주시죠!”

“이 시대의 선한 기업인 1위에 선정된 소감이 어떠십니까?”

“동시에 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에도 꼽히셨는데 한 말씀 해 주시죠!”

“이번 기부에 총리가 담화문을 냈는데 알고 계십니까?”

“왜 굳이 1조 원이 아니라 1조 950억입니까?”

내가 기부했다는 기사가 나가자마자 내 집 앞에는 수많은 기자들과 나를 보러 온 사람들로 아침부터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은 내게 기부의 신이니 선한 기업인이니 하고 치켜세워 주고 있었지만, 정작 내 속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어느 미친놈이 사재로 1조 원을 넘게 기부하면서 기분 좋을 수가 있냐고.

하지만 나는 이런 감정을 숨긴 채 만면엔 미소를 띠며 인자하게 말했다.

“필요한 곳에 필요한 도움을 주었을 뿐인데 이런 과도한 관심을 받게 되어 부끄럽습니다. 이번 기부는 과거부터 이어져 온 지속적인 기부의 일환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입니다.”

“홍 회장님! 조금만 더 말씀해 주십쇼!”

“일각에서는 이번 기부가 정계 진출의 일환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데, 사실입니까?”

“1조 950억이라는 숫자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정계 진출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언에 순간 내 인상이 찌푸려질 뻔했지만, 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내가 왜 기부를 했는지 알면 저런 차마 저런 개소리는 하지 못할 텐데.

“이번 기부는 정계 진출과 전혀 상관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보도 자료를 통해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말씀 좀 해 주십쇼! 1조 950억이라는 숫자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자, 지나가겠습니다!”

“물러서 주십쇼!”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차에 오르는 내 등 뒤로 집요하게 들려오는 물음. 나는 결국 뒷좌석 시트에 몸을 묻으며 피식 웃고 말았다.

“1조 950억이라…….”

사실 뭐, 1조 950억이란 숫자에 딱히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회장님?”

“아닙니다. 출발하시죠.”

“예, 회장님.”

굳이 파고들자면 1조 950억이 아니라 1095라는 숫자 자체에 의미가 있긴 하지.

1095.

일수로 따지면 딱 3년이라는 숫자.

띠링♬


[1,095,000,000,000원 입금이 확인되었습니다. 홍건익 님의 남은 수명은 1,095일입니다. 현재 수명 연장 금액은 1,000,000,000원/일입니다. ★기부 천사★]


그래, 나는 오늘 3년의 시간을 샀다.


천 원짜리 재벌


1화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내 가슴 한편에 남아 있던 시 한 구절.

딱히 시에 관심이 있던 것도, 시험에 나오니 외워야겠다고 다짐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내 가슴을 파고들었던 한 구절.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그 시의 제목이 <가난한 사랑 노래>였던 것도, 그 시를 지은 시인이 신경림 시인인 것도 몰랐지만 왜 그 시 한 구절이 가슴에 박혔는지 나중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그 시의 주인공이 나였거든.

가난했기에 모든 걸 버려야 했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젊은 사람이 오래된 시를 아는구만. 시를 좋아하나?”

“아뇨. 아는 시라곤 이게 전붑니다.”

“그래?”

“예, 다른 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이 시는 마음에 들더라고요.”

“사람마다 다 자기에게 맞는 게 있지. 자네는 어째서 그 시가 마음에 들었나?”

“글쎄요…….”

오늘 처음 봤지만, 손에 들린 빵빵한 검은 봉지에 홀랑 넘어가 동석을 허락한 노인의 물음.

난 노인의 물음에 달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냥 제 모습 같아서요.”

“뭐가? 가난한 게?”

“예, 가난한 게 똑 절 닮았네요.”

“자네도 기구한 삶을 살았나 보구만.”

가난.

내가 태어나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한 주박.

“아우, 말도 마십쇼. 대한민국에서 저보다 더 기구한 사람은 손에 꼽을 겁니다.”

“그래? 그럼 어디 한번 썰 좀 풀어 보게. 내가 먹는 술안주를 사 왔으니 자네가 듣는 술안주를 풀어놓으면 딱이겠군.”

“지금요? 좀 쪽팔린데.”

“뭐 어떤가, 오늘이 지나면 서로 만날 일도 없을 사인데.”

“예. 뭐 까짓거, 그러시죠. 근데 사실 별 얘기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또 어떤가. 한 잔 술에 털어 넘기면 그만인 것을. 자, 여기 한 잔 받고 어서 풀어 보게.”

노인의 채근에 나는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소주를 한 잔 마시고 입을 열었다.

“음…… 어디부터 얘길 해야 하나. 아! 저는 부모님이 안 계십니다.”

“처음부터?”

“아뇨. 고등학교 올라가는 날 두 분이 야반도주하셨습니다.”

“어이구야.”

좋은 대학에 가서 가난을 벗어나고자 했던 고등학교 시절에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니 집과 부모가 사라진 일. 악착같이 돈을 모아 처음 내 집 마련의 꿈을 꾸었을 때 전세 사기를 당했던 일.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니 좋지 않은 기억들뿐이었지만,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나는 이 생면부지의 노인에게 모든 걸 술술 털어놓았다.

“……뭐, 대충 이런 인생이었습니다.”

“……고생했구만. 한잔하게.”

“하하하, 당시엔 진짜 죽을 것같이 힘들었는데 이제 와서 다시 보니 별거 없네요.”

“별거 없기는. 보통 사람이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거야. 정말 고생 많았어.”

속을 따뜻하게 덥혀 주는 술기운 때문일 수도 있겠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게 오랜만인 탓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마도 내가 많이 외로웠던 것일지도 모르지.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는 건 아닐 테니까.

“그런데 영감님께서는 날도 추운데 왜 이 밤중에 혼자 나오셨습니까?”

“나? 허허허. 이젠 내 차례인가?”

“뭐 어떻습니까. 영감님 말씀대로 내일이면 안 볼 사이인데요. 술도 많이 남았고.”

“허허허, 다 늙어서 이제 쓸모가 없어진 인간의 걱정이야 뻔하지.”

“뭡니까, 그게?”

“하, 자식 걱정밖에 더 있겠나.”

“아하.”

그리고 이 영감님도 외로웠던 것 같다.

외로움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공평하니까.

“애가 좀 덜떨어집니까?”

“아니, 이 사람이? 우리 애가 어디가 어때서?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야!”

“아니면 사람을 들들 볶아요? 유산 미리 달라고?”

“들들 볶았으면 차라리 좋겠네. 걔는 나한테 뭐 바라는 게 없어.”

“어유, 남 부끄럽지 않고 유산 달라고 징징거리지도 않으면 뭐가 걱정인데요? 설마 지금 자식 자랑을 돌려서 하시는 겁니까?”

“아닐세, 아니야. 후우…….”

노인의 깊은 한숨에서 난 단박에 그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의 한숨은…… 내 한숨과 닮아 있었다.

“미안해서 그러지.”

“뭐가 그렇게 미안하십니까?”

“안아 줘야 할 때 안아 주지 못했고, 지켜 줘야 할 때 지켜 주지 못했네.”

“…….”

“하루만. 그래서 단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신께 빌었네.”

“…….”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보잘것없는 내 영혼이라도 바치겠다고. 다 부질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영감님 자식도 영감님 마음을 다 이해할 겁니다.”

그런 그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비어 버린 잔을 채워 주는 일뿐이었다.

“정말 그럴까?”

“그럼요. 부모 자식 간의 일이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다 이해하게 돼 있습니다. 뭐, 달리 천륜이겠습니까?”

“……자네도 그래? 자네 부모를 다 이해할 수 있나?”

“뭐, 저도 처음엔 진짜 원망 많이 했는데요. 지금 와서 보니까 아예 이해 못 할 건 또 아니더라고요.”

“정말인가?”

“예, 그 사람들도 그 사람들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죠. 그때 당시에 몇 살이야? 서른……다섯? 여섯? 아무튼 지금 저보다도 한참 어린 나이였는데요. 많이 힘들었겠죠, 도망치고 싶을 만큼.”

“…….”

“그렇게 생각하니까 넘어가지더라고요. 사실 제가 먹고사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했고요.”

“……고맙네.”

“그게 사람 아니겠습니까. 죽을 만큼 힘들어도 그 시간만 지나가면 좀 살 만해지는 거. 그러니까 영감님도 너무 자책하지 마시고 한잔 더 받으…… 에이 씨. 술이 다 떨어졌네.”

당장 내일이라도 하직할 것처럼 침울해져 있는 노인을 달래려 술병을 들었는데, 꽉 차 있던 술병은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하필 이럴 때 술이 떨어지네. 에잉.”

“술도 눈치가 있는 게지, 허허.”

“에이~ 눈치가 있었으면 지가 알아서 적당히 리필했어야죠. 흐름 끊기게, 쯧.”

“핫핫핫핫, 술이 사람인가? 자기가 알아서 리필하게? 핫핫핫핫.”

내 노력이 통한 건지 아니면 개드립이 잘 먹힌 건지 노인은 웃음을 터트렸고, 나는 그런 노인을 보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는 잠시 이 눈치 없는 술을 보충하러 좀 다녀오겠습니다. 영감님은 잠깐 달 좀 보고 계세요. 오늘 보름이라 그런지 달이 좋네요.”

“더 마시게? 내일 출근 안 해?”

“예, 오늘은 공기도 좋고 달도 좋고 사람도 좋네요. 이런 날 좀 더 마셔야죠. 어차피 내일 노는 날이기도 하고요. 아, 영감님은 들어가셔야 합니까?”

“예끼. 들어가긴 뭘 벌써 들어가나, 아직 초저녁인데. 난 걱정 말고 이걸로 술이나 더 사 와. 안주도 좀 더 사 오고.”

“아유, 제가 가난하긴 해도 술 살 돈 정돈 있습니다. 넣어 두세요, 영감님.”

“예끼, 이 사람아. 어른이 주는 건 고맙습니다. 하고 받는 거야. 자네 지금 나 무시하나?”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그럼 어서 받게. 아, 어서 받으래도? 애먼 데 기운 빼지 말고 얼른 가서 술이나 사 와.”

이미 받아먹은 술도 있고 기분도 여느 때와 달리 상쾌해서 2차는 내가 사고 싶었지만, 노인은 완강하게 내 손에 3만 원을 쥐여 주었다.

근데 돈이 좀 이상하네?

“이거 구권입니까? 와~ 이게 아직도 있네요?”

“아직도 있지. 그럼.”

“이거 쓸 수는 있습니까?”

“안 받아 주면 어쩔 거야. 그것도 다 돈인데.”

“맞네요. 안 받아 주면 제가 나중에 은행 가서 바꾸면 되죠. 이것도 다 돈인데. 아니면 묵혀 뒀다가 나중에 팔아 보든가.”

“그럼 그럼. 다 쓸데가 있으니 갖고 있어.”

“알겠습니다. 그럼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거의 10년 전에 마지막으로 본 만 원짜리 구권에 신기해하는 내 등 뒤로 노인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난 괜찮으니 서두르지 말고 조심히, 아주 조심히. 그리고 천천히 다녀오게.”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딘 순간 내 세상이 일그러지며 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흐어어억?”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느낌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비비고 둘러봐도 주변은 불빛 한 점 없이 어둡기만 했다.

“하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하지만 냉기나 바람이 느껴지지 않고 손바닥에 느껴지는 적당한 쿠션감으로 봐선 내 방인 것 같았기에 나는 다시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음?”

그런데…… 내가 이렇게 몸이 좋았었나?

돌려 누우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둔 배에는 푸짐했던 술배 대신 언제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복근이 느껴졌다.

순간, 잠이 확 깼다.

이어서 코골이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튕기듯 몸을 다시 일으켰다.

“크크컥, 크헉. 푸후우…….”

“끄으으응, 큽. 쩝쩝.”

그러자 어둠에 조금 익숙해진 눈에 주변의 모습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조금은 헐렁한, 땀에 전 반팔 티와 내 오른발에 채워져 있는 로커 키. 여긴 찜질방이었다.

“찜질방? 내가 찜질방에 왔다고? 진짜 많이 취했나?”

보통 사람들에겐 술 먹고 찜질방 오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겐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더운물에 몸을 불리는 행위는 내겐 매우 사치스러운 일이었기에 불가피한 일이 아니면 절대로 오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그랬기에 난 바로 수면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내 배에서 느껴지는 이질감과 지금 이 상황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우우웅~.

그렇게 허겁지겁 욕탕 입구에 있는 거울에서 내 모습을 확인했을 때, 난 혼이 빠져나가는 듯 느낌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뭐야? 이게 누구야?”

거기에는 삶에 찌든 아저씨가 아니라,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는 까까머리의 청년이 서 있었다.

우우웅~ 우우웅~.

그리고 빠져나간 혼이 돌아올 틈도 없이 미친 듯이 울려 대는 내 주머니.

그 속에는 꼬깃꼬깃한 구권 지폐 3만 원과 믿을 수 없는 메시지를 품고 있는 휴대폰이 있었다.


[2005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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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익 님의 남은 수명은 1일입니다. 현재 등급의 수명 연장 금액은 1,000원/일입니다. 승급 유예권이 2장 있습니다.]


[입금 계좌 1004-012486-17171771 예금주 기부 천사]


믿을 수 없었지만 나는 아마도.

20년의 세월을 거슬러 돌아온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