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학사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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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1화



휘이잉-.

높다란 벼랑 위.

낯선 듯 낯설지 않은 향의 바람이 따스하게 불어온다.

그리고 그 바람의 길 끝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어언 오십오 년 만인가.’

흰 백발에 흰 수염.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선 나이에 맞지 않는 건장한 몸을 가진 노인은 벼랑 저 밑 아랫마을을 천천히 훑었다.

‘어린 시절엔 그토록 커 보였거늘…… 이리도 작은 곳이었던가.’

말이 작다고 하여 우물 속처럼 작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그가 여태 살며 누벼 온 세상이 너무 커다랬을 뿐.

하나 이제는 그 세상에 환멸이 났다.

그렇게 일각(一刻)이 조금 못 지났을까.

처음 도착했을 때.

냉철하다 못해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던 노인의 눈빛에는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아련하면서도 따스한 기운이 잔잔히 깔려 있었다.

마치 태아가 어머니의 배 속에서 평온함을 느끼듯이 그 속에서 평안을 찾은 듯한 느낌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 일말의 망설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들이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놀라 까무러치겠군.’

이러한 변화를 스스로도 느꼈는지 노인의 입가에 작은 고소(苦笑)가 걸렸다.

그랬다.

무림 맹주 백경(白巠)!

작금 이곳에 서 있는 노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천하를 호령한 현 무림 맹주이자 철혈검신(鐵血劍神)이라 불리는 백경이었던 것이다. 마치 감정이 없는 듯하여 철혈이란 별호까지 붙은 그였으니, 누군가 이 모습을 보고 말한다 한들 아무도 믿지 않을 터였다.

그런 백경이나, 그에게도 처음부터 감정이 없던 게 아니었다.

‘……단지 혈혈단신(孑孑單身) 홀몸으로 이 더럽고 거친 무림의 삶을 살기에는 감정이 필요가 없었을 뿐이었지.’

철없던 어린 시절 그는 맨몸으로 집을 뛰쳐나왔다.

치기 어린 그의 마음으로는 온 세상을 거침없이 누비는 무인들의 삶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하나, 아무것도 없는 어린아이에게는 너무도 가혹하기 그지없는 세상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던 그는 거친 낭인들 사이를 구르고, 약육강식의 무림 세계를 혼자의 몸으로 전전하다 보니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생각에 점점 희(喜), 노(怒), 애(愛), 락(樂)을 하나씩 지워 나간 것뿐이다.

감정이 있으면 정이 생기고 정을 나누면 사람을 믿게 되고 그리되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 일이 수두룩했으니 말이다.

감정은 그만큼 그에게 무쓸모였다.

무림이란 곳은 이토록 험하고 거칠어 무재(武才)와 이 철혈의 가면이 없었으면 백경이 이날 여태껏 살아 있지도 못했을 터였다.

그 지겹고 고단한 삶의 종착지는 무림 맹주였다.

하나 그것마저도 끝이 아니었다.

이름만 번지르르하게 둘러씌운 무림 맹주 자리였다.

시시때때로 자신의 권력과 힘을 이용하여 언제든지 틈을 보이면 뒤통수를 칠 준비를 마친 승냥이 떼로 그득했으니 말이다.

‘더는 지긋지긋하군.’

잔잔하던 그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무림 맹주의 삶은 차라리 하루하루 몸을 굴리며 낭인들 사이에서 살아남던 그때가 더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이골이 난 상태였다.

그래서 한때 이 세계를 너무나 동경했으나,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저 공허함과 지독한 외로움만이 가득할 뿐.

무림이란 곳은 분명 멋과 낭만이 있지만, 그만큼 독한 것들의 천지였다.

혈혈단신으로 이 거대한 무림맹의 꼭대기 자리까지 오른 건 대단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더는 그 감투조차 싫증이 났다.

‘그걸 모르고 어릴 때 가출했었지. ……알았다면 절대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을.’

평생을 외롭게 살았다.

결혼은 했으나 철저한 이해득실(利害得失)을 따진 정략결혼이었다.

아무리 검으로 세상을 평정한 그라도 하루가 멀다고 매일같이 이어지는 암살 시도로부터 무림 세가 출신도 아닌 그가 단 하루라도 편하게 잠을 청하기 위해선 세력의 힘이 필요했고, 그 세력 역시 자신들의 입지를 굳힐 수 있는.

그러나 그 뒷배에 아무도 없는 백경이 필요했다.

서로가 필요에 의한 관계로 형성된 결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큭……. 그렇게 한 결혼이었으나, 아이조차 없었지.’

차라리 아이라도 낳았다면 그 아이를 바라보며 살 힘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나, 마치 하늘이 농간이라도 하듯 그 둘 사이에서는 아이조차 생기지 않았다.

역시 인연이 아니었던 것일까?

‘참으로 지독하리만큼 외로운 삶이었구나. 생각해 보면 공부나 해서 집안을 물려받으라던 고집불통 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살게 될 걸 알고 계셨던 것인가?’

이내 백경이 속으로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당연히 전부 알지는 못하셨겠지. 아버지도 무림인은 아니셨으니. 다만 걱정은 되셨을 터.’

단단한 껍데기 같은 집의 비호를 벗어나는 순간.

세상의 숱한 고생과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계셨을 테니 말이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그의 입가에 걸렸던 고소가 더욱 짙어진다.

그때 아버지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다면 뭐가 달랐을까?

당연히 알지 못한다.

그 삶은 살아 보지 않았으니.

‘다만 지금 가진 명예와 힘은 없을지언정 이보단 훨씬 행복한 삶의 마무리를 향해 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적어도 가족은 곁에 있었을 테니.’

백경.

그는 지금 죽어 가고 있었다.

무림 맹주로서 대부분의 무림인이 우러러보는 정도 무림의 지존이자, 강호 전체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화경의 초강자이지만, 그런 그조차도 하늘이 정해 준 수명의 한계마저 벗어날 수는 없었다.

‘현경에 오른다면 또 다르겠지만…….’

그 마지막의 벽은 너무도 높았다.

어쩔 수 없었다.

백경 스스로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무공을 잘못 익혔다.’

재능이 있어 낭인들 사이에서 구르며 익힌 삼류 무공을 기반으로 삼고도 이 경지까지 올라왔으나, 기초 자체가 잘못되어도 너무 잘못되어 있었다.

수십 년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말했듯 이미 그는 삶의 끝자락에 닿아 있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을 찾아왔는지도 모르지.’

사실 그도 고향을 향해 오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저 죽어 가는 마당에 갑갑한 무림맹이 싫어 한밤중 몰래 떠나왔고, 발길이 닿는 대로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눈앞에 놓인 곳이 바로 이곳.

고향이었다.

투둑-.

그때.

철혈 같던 그의 눈에 굵고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회한이 가득 찬 눈물 한 자락이었다.

지난 세월 고향이 변한 것이 아예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기억 저편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자니 절로 묵혔던 그리움이 터져 나온 것이리라.

“그래…… 난 이곳을 평생 그리워했구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문득 정신이 번뜩 들었다.

억지로 가슴에 묻어 두었던 가족들 생각이 난 것이다.

‘가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당연히 부모님들은 돌아가셨을 테고, 두 동생은? 하연(河娟)이와 하진(河珍)이는?’

어쩌면 동생들마저도 모두 죽었을 수도 있다.

그만큼 오십오 년이란 시간은 인간에게는 참으로 길디긴 세월이었다.

그래도 잘 살다 갔을까?

염치없는 생각일지도 모르겠으나…….

‘만일 죽었다면 묘라도 보고 싶구나.’

고향 집이 코앞이다.

타앗-!

결국, 참지 못한 백경이 몸을 틀어 벼랑 밑으로 내달렸다.

내달렸다고 표현해야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참으로 신묘한 몸놀림이라서일까?

아니면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벼랑 밑 마을에 도착하는 것은 눈 깜짝할 새였다.

하나 그는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렇게 도착한 백경의 앞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 그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몇십 년 만이라고 한들, 집터를 잊을 정도는 아니었다.

한데, 없다.

아무리 보아도 없다.

“분명 이곳에 장원이 있었거늘……!”

애초에 이 마을에서 제법 큰 장원이었던 터 자체가 날아간 것이다.

마치 하늘이 백경을 조롱이라도 하듯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작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형태가 되어 있었다.

당황한 백경의 눈앞에 마침 저 멀리 지나가는 청년이 보였다.

백경이 다급히 달려가 청년 앞에 서서 질문을 던졌다.

“이보시오. 혹, 이곳에 살던 백 가문을 모르시오?”

갑자기 나타난 그의 모습에 당황한 청년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내리 저으며 답했다.

“죄송합니다만 모, 모릅니다. 어르신.”

그 옆을 지나가는 아낙네에게도, 중년의 남자에게도 물어보았으나 그들에게 돌아온 대답은 모두 한결같이 ‘모릅니다.’였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이란 말이냐?’

당황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선 안타까웠는지 때마침 곁을 지나던 젊은 아낙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 혹시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산 촌장님이라면 아실지도 모릅니다. 한번 가 보시는 게 어떠하시겠습니까?”

“고맙소. 한데 그 촌장댁은 어디로 가면 되오?”

“저쪽 돌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쭉 내려가면 지붕에 박이 세 개 얹어진 집이 바로 촌장님 댁입니다.”

“고맙소.”

타닷-!

답을 들은 백경이 정중히 고개를 숙인 후, 언제 있었느냔 듯 순식간에 몸을 날려 사라졌다.

‘내, 내가 헛것을 봤나……?’

젊은 아낙을 비롯해 그 주변에 있던 이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진 채였다.



* * *



번개처럼 달려간 백경의 눈에 왜소한 체격에 호호백발을 한 노인이 들어왔다.

“혹, 이 마을의 촌장님 되시오?”

“호, 그러하오만…… 뉘시오?”

“나는 백가의…….”

하나 그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촌장이라고 밝힌 노인이 먼저 화들짝 놀라며 그에게 답했다.

“백가? 설마 그 백면서생님의 백가를 말하는 것이오?! 허어……. 설마 예전에 집을 나갔던 그 백가의 장자?”

마침 백경을 알아본 것일까?

두 눈이 번뜩 뜨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오. 내가 바로 그 백가의 장자 백경이오.”

“세상에! 허어……! 이런 안타까운 일이 다 있나…….”

반가움에 순식간에 밝아졌다가 이내 표정이 어두워진 촌장이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사십오 년 전.

웬 무림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다짜고짜 횡포를 부렸다.

어디서 뺨이라도 제대로 얻어맞고 왔는지 작정하고 달려든 탓에 온 마을이 휩쓸려 망할 뻔했는데, 당시 완전히 박살 난 곳이 바로 백 가문의 장원이었다고 한다.

“백 어르신이 중재를 해 보시겠다며 나섰으나, 결국 무림인들의 잔혹한 손속에 모두 휩쓸려 그만…….”

촌장의 말을 전부 다 듣고 난 백경은 그야말로 충격에 휩싸였다.

사십오 년 전이라면 자신이 가출하고 난 후 고작 십 년 후다.

‘그때 이미 집이 망했다……? 그것도 무림인의 횡포로?’

당시 마을의 유지로서, 학사로서 명망이 높았던 집안인지라 다들 잘 살다 갔으리라 믿었다. 아니, 잘 살지는 못해도 평범하게나마 살다 갔길 바랐다.

한데 무림인들의 손에 죽었다고?

스스스-.

순식간에 화가 치솟은 백경의 눈빛에 차마 억누르지 못한 살기가 피어오른다.

거의 한평생 감정을 배제하고 살아온 그였으나 가족의 죽음을 전해 듣는 순간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한 것이리라.

“혹, 그들이 누군지 아시오?”

하나 아무리 최대한 억눌렀다고 한들, 화경의 경지에 이른 자에게서 흐르는 살기는 평범한 노인이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덜덜덜-.

마치 당장이라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안면이 새하얘진 촌장의 모습에 백경이 순식간에 조금씩 새어 나오던 살기를 모두 거두어들였다.

“아, 미안하오. 나도 모르게 그만.”

덕분에 간신히 한숨 고른 촌장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후욱……! 아, 아닙니다. 무림인이 되셨구려.”

그럼에도 아까와는 달리 말투가 조금 바뀐 촌장의 모습에 약간의 고소를 머금은 백경이 뒤로 슬금 물러섰다.

당신을 해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비친 것이다.

그런 그의 모습에 촌장이 침을 꼴깍 삼키며 말을 이었다.

“저 역시도 그게 누군지는 모릅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만 당시에 저 역시 살기 위해 도망치느라 바빴기 때문에…….”

정말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인 촌장의 모습에 백경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랬구려.”

아주 미세한 살기에도 반응하는 일반인 중 무림인의 횡포에 맞설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된단 말인가. 이를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백경이었다.

어쩔 수 없이 뒤돌아서려던 그때.

촌장의 말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아, 하나 당시에 백가에서도 다행히 한 사람이 살아남아 있었는데…….”

“있었는데?!”

여태와 달리 그의 엄청난 목청에 당황한 촌장이 콜록거리며 답했다.

“쿨럭……! 백가의 하진이라고 했나? 얼마 전에 명이 다해 죽었소.”

“……?!”

백가의 하진이라면 백경의 막내 여동생이었다.

“여인 혼자 평생을 가족들 무덤을 지켜 왔는데, 결국 하늘이 주신 명이 다한 게지요. 이리 안타까울 수가.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허어.”

하나 다른 말은 그의 귀에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무덤. 무덤은 있단 말이오?”

“예, 그분이 만들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평생 관리하였으니 당연히 있습니다만.”

“위치가 어디요?”

“마을 뒷산 꼭대기로 향하는 길로 가다 보면 절벽에 가기 전 돌탑이 있는데 거길 돌아 올라가면…….”

하나 촌장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백경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검신학사


지은이 : 곤우

제작일 : 2024.01.31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김레아

표지 : 나쵸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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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405-2416-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