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벗은 영주님 : 델로아 전기 001화

벌써 벗은 영주님 : 델로아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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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벗은 영주님 : 델로아 전기

벌써 벗은 영주님 : 델로아 전기

 

 

지은이 : 호질

발행인 : 서경석

 

전자책 발행일 : 2019-11-01

 

출판사 : 도서출판 청어람

 

 

등록번호 : 제387-1999-000006호

 

주소 :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심곡2동 163-2 서경빌딩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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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벗은 영주님 : 델로아 전기

1. 벗은 이유

 

 

기나긴 전쟁 끝에 비렌티아 왕국이 멸망하고 그 땅은 승자인 티라누스 왕국의 새 영토가 되었다.

비록 승리하기는 했지만, 티라누스 왕국의 피해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참전한 티라누스의 영주들은 새로 분배받은 영지의 주민들을 최대한 쥐어짜 그동안 입은 손해를 벌충하는 것으로 승자의 권리를 누리려 했다.

특히 크루두스 후작은 보상 심리가 남달랐다.

어떤 싸움에서도 물러나 본 적이 없고, 다른 귀족들과 달리 자신의 병력을 아끼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모두 쏟아부었음에도 기대했던 땅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젠장, 가장 넓은 땅을 받아 부럽다고? 이 땅 너 줄 테니 네가 받은 땅하고 바꾸자!”

 

“폐하! 저를 티라누스의 기둥, 티라누스의 검이라고 말씀하신 게 불과 얼마 전입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영지 분배가 결정되던 날, 축하한다, 부럽다, 가식적인 말들을 뱉어내던 공작들 그리고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며, 더욱 충성을 다하라, 근엄하게 치하하던 국왕에게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던 말을 하지 못한 것이 억울해 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미 결정된 일, 돌이킬 수 없었기 때문에 크루두스 후작은 화를 억누르고 새로 받은 땅에서 최대한 뽑아낼 궁리를 했다.

 

“어차피 원수의 땅이다! 우리 병사들을 죽인 종자들이 사는 땅이 아니더냐! 최대한 쥐어짜라!”

 

새로 얻은 콜리스 지방의 영주 성에서 부하들에게 논공행상을 할 때 크루두스 후작은 강하게 명령했다.

 

“걱정 마십시오!”

 

그의 부하들 역시 비렌티아 인이라면 치를 떨었기 때문에 후작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준비가 돼 있었다.

주군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참석자들 가운데 가장 끄트머리에 자리한 젊은 기사 하나가 나서서 말했다.

 

“그건 아니 될 말씀입니다!”

“뭐라? 지금 나에게 하는 말이냐?”

 

성미가 불같은 크루두스 후작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네, 주군!”

“왜 안 된다는 것이냐?”

 

젊은 기사는 거친 야수처럼 으르렁대는 후작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직 비렌티아가 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새로운 지배자가 가혹하게 다스린다면 백성들의 적대감은 더욱 커질 것이고 이는 망국의 불순 세력들이 준동할 여지를 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땅의 백성들 또한 주군의 백성인데, 백성들을 쥐어짜는 것은 스스로 곳간을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오히려 너그럽게 대해 주시지요.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신다면 장기적으로 주군의 곳간이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이 땅을 분배받은 것부터 마음에 안 들던 차에 많은 부하들 앞에서 이름도 가물가물한 말단 기사에게 훈계를 듣자 크루두스 후작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당장 녀석의 목을 베려 했다.

그때 눈치 빠른 측근이 그를 말리며 속삭였다.

 

“주군, 저 녀석이 바로 네스토르 가문의 둘째 델로아입니다.”

“흐음······, 저 녀석이 그 델로아란 말인가?”

 

델로아 네스토르, 이름은 이미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다.

후작은 머리보다 주먹이 앞서는 사람이었지만, 젊은 기사를 처치할 생각을 버렸다.

네스토르 가문은 오랜 가신 가문으로 작위가 높지는 않았지만, 대대로 가문의 남자들이 후작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해 왔다.

게다가 델로아는 후작이 자랑하는 황금 코뿔소 기사단 소속으로 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젊은 기사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기사단장이 직접 상을 줄 것을 청원하여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그런 기사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나를 모욕한 녀석을 그냥 봐줄 수는 없지.’

 

후작은 델로아에게 모욕을 줄 방법을 궁리해 냈다.

 

“만약 네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콜리스 성을 한 바퀴 돈다면 이 지방의 백성들에게 수확의 4할만 세금으로 걷겠다. 그러나 못 하겠다면 8할을 걷을 것이다. 하겠느냐?”

 

참석자들은 후작의 처사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티라누스 왕국의 기사가 생면부지, 아니 원수나 다름없는 비렌티아 사람들을 위해 치욕을 감내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젊은 기사 델로아는 크게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군!”

 

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옷을 벗고 영주 성을 나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말을 타고 넓은 콜리스 성을 돌았다.

그를 본 콜리스의 주민들은 처음에는 미쳤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사연을 듣고 그의 안녕을 위해 기도했다.

한참 후 성으로 돌아온 델로아를 보고 후작이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냐?”

“주군과 백성을 위해 나서는 것이 바로 기사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크루두스 후작은 나체가 되는 치욕을 감내하면서까지 자신을 위하는 기사가 있는가 싶어 감동하면서도 그렇게까지 해서 자신의 뜻을 꺾은 델로아가 못마땅했다.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었다.

 

“앞으로 콜리스 지방의 세금은 4할이다.”

 

그리고 델로아에 대한 포상은 변경되었다.

 

“네스토르 가문의 델로아에게는 테스카 땅을 준다. 즉시 부임하라!”

 

논공행상 자리에 참석한 귀족들 대부분은 델로아 때문에 원하는 만큼 주머니를 채우기가 어렵게 되자 그에 대한 후작의 처분을 고소해했다.

 

“잘난 척하더니, 그것 참 쌤통이군.”

“오늘같이 좋은 날, 굳이 입바른 소리를 해서 잔칫상을 뒤엎을 게 뭐란 말이야!”

 

기사단장을 비롯하여 델로아를 아끼던 몇몇 참석자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그를 타박했다.

 

“괜히 오지랖을 부려 모욕을 당한 것도 모자라 원래 포상으로 받게 될 땅에 비해 형편없는 땅을 받고 작위도 얻지 못하게 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델로아는 신경 쓰지 않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의 대물을 증명했으니 그리 손해는 아니죠. 오히려 앞으로 끊이지 않을 여난이 걱정입니다.”

 

델로아는 종자 둘과 함께 말을 타고 즉시 자신의 영지 테스카로 떠났다.

 

“그러게 왜 나서세요? 축하연도 끝나기 전에 쫓겨나듯 떠나는 사람은 우리뿐일 거예요.”

“가만있었으면 차차기 기사단장이 되었을 거라고 다들 말하던데, 하여간 스스로 복을 차 버리신다니까!”

“당장 내일 일도 모르는데 차차기는 무슨······. 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지.”

 

형제처럼 지내온 종자들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델로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세 필의 말과 기수는 저무는 석양빛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북쪽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