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염의 성좌 개정판
홍염의 성좌 개정판
1화. 서장 (1)
훌륭한 날이었다.
새파란 하늘 위로 흰 구름이 평화로이 흘러갔고, 쏟아지는 햇살은 금처럼 화사했다.
테이블마다 흰 테이블보가 깔리고 그 위에 고급 식기가 놓였다. 비싸고 아름다운 꽃이 곳곳을 장식해 화사함을 더했다.
행사를 준비하는 저택의 집사는 정원을 누비며 하인 하녀들을 볶아내는 중이었다.
“포크들과 나이프의 순서가 바뀌었잖아! 이 순서가 아니란 말이야! 대체 누가 한 거야! 이 꽃은 왜 이리 시들었지? 오늘은 금혼식이 아니라 약혼식이란 말이다, 약혼식! 이따위로 하면 어떻게 하나. 내년까지 망신당할 거다.”
그냥 둬도 될 만한 것도 사용인들을 볶아대며 이리저리 고쳐대게 하는 집사 탓에, 결과적으로는 고치기 전의 고치기 전 상태와 별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일주일 전부터 이리 난리 중이라 고용인들은 다들 짜증이 났다. 리본이 비뚤어졌다고 할 때는 그 리본으로 집사의 목부터 조르고 싶었다. 포크와 나이프의 위치에 대해 잔소리하면 그걸로 그 입을 쑤셔버리고 싶었고.
그뿐인가. 오늘 약혼식의 주인공은 졸부다. 좋게 말하면 신흥 갑부고. 십 년 전 이 도시에 나타난 뜨내기가 거부가 된 거다. 그전에는 뭐하던 사람인지 알 게 뭔가.
어느 집안인지도 모르고, 또 어디 사람인지도 모른다. 남자의 정체에 관한 결정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오는 사람은 없다. 소문만 분분하게 떠돌 뿐이다. 그래서 다들 저 집사의 법석이 아니꼬웠다.
대공 전하나 공작 나리들 행사도 아니고, 왜 저런담. 대충 해도 그 졸부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를 텐데.
“누가 보면 황자라도 약혼하는 줄 알겠군. 그쯤 해둬.”
결국, 이 행사의 주인공인 저택의 주인이 나타났다.
일하는 사람들 분위기가 흉흉해지고 있으니, 축하받아야 하는 사람 보기에 좋지는 않았다.
주인의 말에 집사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에드먼드 님, 오늘은 완벽해야 합니다. 주인공인 두 분 모두 귀하게 보여야 합니다.”
하인 하녀들이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다들 속으로 하는 생각은 같았다.
지들이 뭐라고 저런담.
그래, 맞아. 지들이 뭐라고.
주인만 어디서 돈을 벌어왔는지 모를 졸부인 게 아니다. 약혼녀가 될 신부도 소문 자자한 미녀이긴 해도 작은 잡화상의 딸이다.
지난달만 해도 잡화상 물건이나 진열하던 여자가 보석과 드레스에 휘감겨 으스대며 살게 된 거다.
두 사람이 만난 건 남자가 성공하기 전의 일이었다. 잘 풀려봐야 여자의 아버지 가게를 물려받아 근근이 살아갈 거로 생각했다.
몇 년 뒤 남자는 엄청난 돈을 벌며 거부가 되었다. 마그레노 사람들은 뜨내기가 굉장한 돈을 벌었으니 문명 부잣집이나 귀족 가문 딸 중에서 신부를 고를 거라며 쑥덕댔다.
그런데 이어 들려온 건 그 졸부와 잡화상 집 딸의 거창한 약혼식 소식이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이들이 제일 부들댔다. 저들보다 나을 것도 없는 사람이 주인이 된다는 말에, 다들 질투가 났다.
정오가 가까워져 오자 하객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번드르르 차려입은 자들이 저택과 연회장을 부러운 듯 본 다음 주인인 에드먼드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소년 하나가 달려와 크게 외쳤다.
“축하드려요, 주인님!”
“고마워, 발터.”
마르고 키도 별 크지 않아 또래보다 어려 보이는 소년이었다.
이 소년은 에드먼드가 처음 상회를 열었을 때부터 일해왔다. 성실하고 능력도 좋아 앞으로 상회의 중요한 자리를 맡게 될 거라 다들 기대하고 있었다.
“오늘 정말 멋져요.”
“다행이군.”
소년이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날씨도 좋고, 주인님도 정말 근사하세요.”
“내 칭찬은 그만하면 되었어. 아껴뒀다, 나중에 아자렛이 오면 해.”
“나도 축하하네, 에드먼드 군.”
퉁명스러운 인사가 툭 던져지자, 들떴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으며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하나둘 목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모인 곳에 비쩍 마르고 키가 큰 남자가 있었다. 눈은 퀭하고 안색도 나빴다. 복장 역시 축하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바지는 구겨지고 상의도 금방 옷장에서 꺼내온 듯 엉망이다.
사람들은 다들 남자를 못 본 척했다. 시선을 돌리고 부채를 부치거나,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를 흘끔댔다.
이 남자에게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남자는 지금 다른 사람 앞에 나타나서도 안 되는 존재였다. 본인 심정이 어떻든 간에, 사람들은 이 남자만 보면 불편해지고 불안해졌다.
“감사합니다.”
에드먼드는 웃는 얼굴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남자는 손을 잡지 않았다. 쑥스럽게 된 손을 내리며 에드먼드가 말했다.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노버스 씨.”
“흥, 좋아 보이는군. 뻔뻔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야. 이리 거창한 연회장이라니! 두렵지도 않나?”
“대체 뭐가 두렵다는 말인가요.”
“정말, 몰라서 그래?”
노버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네 지금 말이야…….”
보다 못한 발터가 앞으로 나섰다.
“왜 이러십니까!”
발터가 주먹을 쥐는 걸 본 에드먼드는 일단 그를 말린 다음 노버스에게 말했다.
“혹시 지난번 청을 거절한 것 때문에 화가 나 계신 겁니까? 죄송합니다만, 그건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없는 일입니다. 정말로요.”
노버스가 얼굴이 벌게지더니 달려들 듯 말했다.
“왜 못 해! 자네는 할 수 있었어.”
“정말입니다. 그리고……안타깝지만, 제 선에서 당신을 도울 근거도 없고요.”
“지금 내 동생이 억울하게 유형지로 끌려갈 판이야. 자넨 할 수 있잖아. 도와줘야 했다고!”
“아닙니다. 뭐 때문에 오해하신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로 제가 해결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난 알아. 자넨 할 수 있어! 아니, 해야 해!”
분노한 노버스가 고함을 질렀다.
“나는 자네의 비열한 정체를 모두에게 알릴 수 있어! 그때는 아무도 자네를 도와주지 않을 거야!”
다들 당혹스럽고 민망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일이 급한 건 알지만, 지금 노버스가 당한 일은 항구 뜨내기 출신 졸부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에드먼드는 노버스의 가족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다. 애써 줄 이유가 없다.
“이봐요, 노버스 씨!”
다시 발터가 나섰다. 에드먼드가 말릴 틈도 없이, 그의 주먹이 노버스를 내리찍었다. 키는 노버스가 더 컸지만, 갑작스러운 공격이라 노버스는 그대로 날아가 나동그라졌다.
다들 낮게 한숨을 내쉬거나 탄식했다. 누구든 나서서 저 남자를 치워줬으면 싶었지만, 이렇게 요란하길 바란 건 아니었다.
피를 닦아내며 노버스가 고함을 질렀다.
“이 불한당 자식 같으니라고!”
“불한당은 네놈이잖아! 당장 꺼지지 못해?”
소매를 걷어붙이며 나서는 발터의 어깨를 잡아 누른 에드먼드는 주변의 하인들에게 말했다.
“노버스 씨를 조용한 곳으로 모시도록 해라.”
그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하인들이 몰려들어 노버스를 끌고 갔다. 노버스가 버둥대며 고함을 질렀다.
“자네 후회할 거야! 후회할 거라고!”
노버스는 끌려가면서도 계속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나 아무 가능성 없는 으름장과 예고에 불과했다. 저 남자가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하객 중 하나가 눈치를 보다 말했다.
“약혼 축하합니다. 저분은…… 좋은 날이니 용서하시지요.”
“맞아요. 요즘 저분에게 좋지 않은 일들이 많아서.”
그 말이 나오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요즘 이 나라에 이런 순간이 잦았다. 갑자기 다들 할 말을 잃고 서로를 쳐다보는 그런 순간이.
수도에서 벌어지는 일들 때문이다. 수도와 거리가 있는 마그레노라도 그 영향을 받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아니, 나라 전체가 다 이렇다.
“잊으시지요.”
하객 중 하나가 한 말에, 다들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맞아요, 잊으세요. 어차피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에드먼드 란셀 씨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인 것도 사실이잖습니까. 저 사람이 괜히 억지 부리는 거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에드먼드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때 하녀가 달려와 알렸다.
“주인님, 아자렛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다들 안도하며 조금 전의 분위기를 마저 털어냈다.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이 될 약혼녀가 도착한 것이다.
에드먼드는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정문으로 향했다.
“약혼, 축하해요.”
갑자기 들린 여자 목소리에 에드먼드의 기분은 확 식었다.
“드디어 약혼하는 건가요, 에드먼드.”
멈추어 돌아보았다. 붉은색 감도는 금발의 여자가 아이를 안고 서 있었다. 모자에서 구두까지 죄다 화려했지만, 너무 제각각이라 서로 존재감을 뱉어내고 있었다.
여자가 안고 있는 아이도 사랑스럽지 않았다. 눈은 방울처럼 툭 튀어나오고 푹 꺼진 볼에 눈두덩은 해쓱해서 검댕을 칠한 듯 보였다. 표정도 뚱해서 가만히 있으면 항상 모두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목소리는 또 얼마나 큰지, 한번 울면 온 마그레노에서 다 들을 수 있었다.
“오는 길에 필립 하사를 만났어요. 가엾게도 정신이 나갔더군요. 당신보다도 오래 아자렛을 사랑했을 텐데, 어쩌나.”
“밀드레드, 아자렛이 택한 사람은 나입니다.”
“당연하죠. 어디 그 변변찮은 군인과 당신 같은 청년을 비교할 수 있을까. 당신이 낫죠. 뭐든. 그래도 에드, 내가 한 가지 부탁 좀 해도 될까요?”
“일단 말해 보십시오.”
밀드레드는 아이를 내려놓았다. 아이는 아까부터 노리던 테이블로 달려가 장식된 꽃과 장식품에 기웃대기 시작했다. 하녀들은 아이가 테이블보라도 잡아당길까 긴장하며 보았다.
“지금 나에게 굉장한 비밀이 하나 있어요.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가르쳐 줄 수도 있고요. 어떤 일인지 알게 된다면, 당신은 나에게 평생 감사하게 될 거예요.”
밀드레드의 표정은 의기양양했다.
“정말이라고요.”
대체 뭘까. 에드먼드는 약간 궁금해지긴 했다. 이 여자와 이 여자의 사이 나쁜 남편의 인맥은 마그레노에서 꽤 넓은 편이었다.
“일단 그 부탁이 뭔지 들어보지요.”
“당장 여기서 나와 나하고 도망쳐요.”
“…….”
차라리 돈을 바라지, 황당한 요구였다. 에드먼드는 여자가 말할 비밀을 기대하기보다는 정신 상태부터 의심해야 했다.
술을 부적절하게 너무 많이 마신 건지, 아니면 아직 수면 상태인지.
“내가 왜?”
홍염의 성좌 개정판
홍염의 성좌 [개정판]
지은이 : 아울
발행인 : 서경석
전자책 발행일 : 2025-05-14
출판사 : 도서출판 청어람
등록번호 : 제387-1999-000006호
본사 : 경기도 부천시 부일로 483번길 40 서경B/D 3F (우) 14640
편집부 : 서울특별시 구로구 디지털로 272 한신IT타워 404호 (우) 08389
전화번호 : 02-6956-0531
이 책은 도서출판 청어람이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전자책으로 발행된 것이므로 불법복제 및 유포, 공유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