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序
태조 사후, 가장 혼란스러웠던 건문(建文) 사 년의 무림.
강서성, 남창(南昌) 지역.
북으로 구궁산, 좌우로 용천산과 백운산, 남쪽으로 장산(章山)을 끼고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봉우리들의 사이에 무림총연맹(武林總聯盟)이 둥지를 틀고 있다.
당금 강호에서 가장 큰 위세를 가진 단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담마다 가입한 문파의 깃발들이 수십 개씩 휘날리고, 삼 층, 사 층으로 지어진 수많은 전각은 웅장한 자태를 뽐낸다.
정문은 혼자서는 열기도 힘들어 보이는 두 짝의 철문으로 만들어졌으며, 정문을 지나서도 몇 차례나 관문을 지나서야 내원으로 들어설 수 있다.
내원의 바로 앞.
족히 일만 명은 수용하고도 남을 크기의 대연무장에는 당대의 영웅호걸들이 입추(立錐)의 여지도 없이 가득 대연무장을 메웠다.
둥, 두둥!
가슴을 울리는 묵직한 북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군웅(群雄)들의 시선이 앞쪽 단상으로 향했다.
단상의 좌측으로는 백도 무림의 지주라 할 수 있는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단상 아래를 내려다보고, 단상 우측으로는 구주사해(九州四海)에 위세를 떨치고 있는 팔대무림세가의 가주들이 시립하였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장대한 체구의 중년 남자가 유독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서 있다.
머리엔 상투를 틀고 붉은 바탕에 금색 수실로 장식된 장포를 걸쳤으며 허리에는 한 자루 창연한 빛을 내는 고검을 찼다.
그가 당당한 모습으로 뭇 군웅들을 바라보는데 눈빛이 가히 한 마리 사자와도 같아 오히려 군웅들이 위압감을 느낄 정도였다.
무림총연맹의 창설 이후 최고의 고수이며 대협객(大俠客)이라 일컬어지는 무림총연맹 맹주 금강천검(金剛天劍) 백리중이었다.
백리중이 손을 들자 북소리가 그쳤다.
모두의 이목이 다시 한 번 백리중을 향해 몰렸다.
백리중은 소리 높여 군웅들을 향해 외쳤다.
“형제들이여!”
군웅들이 뜨거운 함성으로 맹주 금강천검 백리중의 개회사에 화답했다.
“와아아!”
“와아아아!”
백리중이 다시 한 번 외치며 크게 포권하였다.
“형제들이 의로운 뜻으로 이 자리에 모여 주었으니, 여기 이 백 모가 무림총연맹을 대신하여 감사 인사를 드리겠소이다!”
뭇 군웅들이 함께 포권하며 외쳤다.
“협의불원 사마멸진(俠義不遠 邪魔滅盡)!”
“강호평평 태도관청(江湖平平 太道貫靑)!”
백리중이 재차 힘껏 포권하며 외쳤다.
“오늘 우리는 강호 무림 역사상, 어쩌면 전대미문일지 모르는 단 한 명의 적을 맞이하여 이 자리에 모였소! 비록 개개의 힘은 미약하나 모두가 힘을 합한다면, 그가 설혹 고금 이래 천고의 대살성(大殺星)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반드시 처단할 수 있을 것이오!”
“와아아아!”
군웅들의 환호 속에 백리중이 포권을 거두었다.
백리중은 환호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곧 소매에서 한 뼘 길이의 삼색 깃발 세 자루를 꺼내 들었다.
“오늘 아침 형제들은 이와 같은 세 자루의 깃발을 받으셨을 것이오. 이것은 천라지망 속에서 그자를 상대하기 위하여 총군사가 고안한 것으로, 깃발마다 한 가지씩의 뜻이 담겨 있소.”
군웅들이 형형한 눈빛으로 백리중의 말을 경청했다.
백리중이 파란색의 깃발을 들었다.
“첫째, 청색기(靑色旗)는 경미한 독이 살포되어 이급 이상의 무인이 출입 가능한 지역임을 나타내는 것이오.”
백리중이 이어 녹색의 깃발을 들어 보였다.
“둘째, 이 녹색기(綠色旗)는 깃발이 회수되기 전까지 일급 이하의 무인은 십 장 이내로 접근하지 말 것을 의미하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리중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빨간색의 깃발을 들었다.
“적색기(赤色旗). 이 적색기의 의미는 제독불가(除毒不可). 이 적색기가 보이면 특급 무인이라 할지라도 백 장 이내로는 접근하지 말아야 하오.”
군웅들의 입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백리중이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설혹 형제들이 그자의 독에 한 줌 독수(毒水)가 되어 녹아 버릴지라도, 단 일말의 기운이라도 남아 있다면 다음 사람을 위해 반드시 이 깃발을 남겨 두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정의로운 강호의 내일을 기약할 수 없게 될 것이오.”
묵직한 침묵이 대연무장을 휩쓴다.
그만큼 그들이 상대하고자 하는 적은 공포스럽고 강대했던 것이다.
그때.
섬전같이 빠른 하나의 빛줄기가 단상의 백리중을 향해 날아갔다.
파악!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백리중의 발 앞에 빛줄기가 틀어박혔다.
구대문파의 장문과 팔대무림세가의 가주들이 분분히 공력을 끌어 올렸다.
하나 백리중은 과연 당대 최고의 호걸답게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노호성(怒號聲)을 질렀다.
“웬 놈이냐!”
그러나 그는 이내 자신의 발 앞에 날아와 박힌 물체를 확인하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최대한 담담하려 애썼으나 안면의 경련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에게 날아온 것, 그건 다름 아닌 한 자루의 적색기였던 것이다.
이어 들려온 한마디.
“자, 이러면 됐습니까?”
그 목소리를 들은 군웅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적색기.
적색기의 의미는 제독불가 지역.
특급 무인이라 할지라도 백 장 이내로 접근하지 못한다는 뜻이라 하지 않았는가.
군웅들의 시선은 절로 적색기가 날아온 쪽으로 돌아갔다.
대연무장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좌우로 늘어선 석 장 높이의 담.
거기에 그가 올라서 있었다.
다소 창백하여 하얀 피부.
딱히 눈에 띄는 것 없이 평범한 인상.
약관을 겨우 지난 정도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으나, 그가 방금의 한마디를 했다는 건 명확했다.
청년이 뿜어내는 음습한 분위기에 군웅들은 오싹해졌다.
팔대무림세가 중 하나인 남궁가의 가주가 소리를 쳤다.
“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고 나타난 것이냐!”
청년의 입 끝이 씰룩였다.
청년은 경멸하는 투로 남궁가의 가주를 보더니 한참이나 후에야 대답했다.
“모르고 왔겠습니까?”
“저, 저…… 악독한 놈이!”
남궁가의 가주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손가락질을 해 댔다.
그러나 이내 그는 깨달았다.
이곳 대연무장은 내원의 바로 앞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문에서부터 들어오려면 삼중, 사중의 경계를 지나쳐야 한다.
그러나 청년은 아무렇지 않게 저 담에 서 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건 아닐 터이고, 들어오는 걸 아무도 막지 못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 청년이 정문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다니!
군웅들도 곧 그 사실을 깨달았다.
저절로 침묵이 찾아왔다.
청년은 남궁가의 가주에게서 시선을 떼고 이어 단상 위의 사람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금강천검 백리중에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오랜만입니다.”
백리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자, 그럼.”
청년이 고개를 좌우로 꺾어 우득 소리를 냈다.
방금까지 대살성을 성토하며 달아올랐던 대연무장의 분위기는 이제 온데간데없다.
무겁고 차가운 공기만이 스산하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일만의 군웅들은 저마다 잔뜩 긴장하여 무기를 꼬나 쥐고 노려보았다.
청년은 자신에게 향한 일만 쌍의 시선을 피곤한 얼굴로 받아 내더니, 입에 한 줄기 풀을 물고 씹기 시작했다.
으적으적.
풀 씹는 소리 말고는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한 분위기였다.
청년이 이내 살기 띤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어차피 나 죽이려고 모인 거니까, 한 분도 살아 돌아갈 생각하지 맙시다.”
곧 청년의 눈 안쪽에서부터 은은한 청녹광(靑綠光)이 흘러나왔다.
그가 바로 당금의 강호에서 천고의 대살성으로 불리는 자.
그 단 한 명을 잡기 위해 무림총연맹으로 하여금 일만 명의 대회합을 주최하게 만든 자.
독룡(毒龍) 진자강이었다.
第一章 멸문(滅門)
첩첩산중으로 깊은 산 속.
굽이굽이 이어진 산길의 끝에 기화요초(琪花瑤草)가 만발한 계곡이 있었다.
아름다운 꽃과 풀들 사이로 띄엄띄엄 지어진 소박한 초가집들마저도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분위기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덜컥.
초가집 한 채에서 성인 남자 한 명이 문을 열고 나왔다.
한데 남자는 겉보기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양쪽 눈두덩은 시커멓게 부풀었고 입에서는 피가 흘렀다. 얼굴과 목의 피부도 얼룩덜룩했다.
“자, 장로님께 이 사실을…….”
부글거리며 끓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겨우 내뱉은 남자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곧 방문에서 한 뼘이 넘는 새까만 지네가 기어 나왔다.
지네가 나온 곳은 그 집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집에서도 굵직하고 징그럽게 생긴 지네들이 연이어 기어 나왔다.
“컥!”
“크악!”
답답하게 내뱉는 낮은 비명 소리도 간헐적으로 튀어나왔다.
소년 진자강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그마한 단칸 초옥.
이제 갓 열 살이 된 진자강은 낮잠을 자다가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다.
그런데 반쯤 졸린 눈으로 둘러본 방 안엔 전혀 상상도 못 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엄마가 시커먼 얼굴로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철이 들지 않았다 해도 변고가 생겼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엄마?”
퉁퉁 부어서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엄마가 진자강을 쳐다보았다. 눈에서 눈물인지 핏물인지 모를 시커먼 것이 흘러내렸다.
짙은 자색으로 말라붙은 엄마의 입술이 달싹였다.
달 아 나.
입 모양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자강은 달아날 수 없었다.
“엄마!”
진자강이 엄마의 품으로 달려든 순간, 진자강은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눈앞이 핑 돌면서 방 안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달려가기도 전에 바닥에 쓰러졌다.
쿵! 하고 방 안을 나뒹굴었다.
얼굴이 간지럽고 눈이 따가웠다.
“으, 으아. 으아아.”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과 흐릿한 시야 사이로 엄마가 손을 뻗는 모습이 보였다.
쓰러진 엄마의 머리 위쪽에 길이가 거의 두 뼘은 족히 되어 보이는 커다란 지네가 똬리를 틀고 뱅뱅 도는 모습도 보였다.
‘독지네!’
평소에 가끔 보이던 지네와는 달랐다. 꼬리인지 머리인지 알 수 없는 끄트머리가 오색 찬연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내 오채(五彩)로 빛나는 부분이 정확하게 진자강이 있는 방향을 향했다. 그제야 진자강은 빛나는 부분이 머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오채오공(五彩蜈蚣)이었다.
독지네 중의 독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