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대신 예언서 읽습니다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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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하늘이 노랗다.

아니, 하늘은 사실 파랗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전혀 파랗게 보이지 않았다.


“다시 뵙습니다, 선배님.”


그림자가 졌다.

온몸이 욱신거린다. 하지만 몸보다는 마음이 더 아팠다.

툭, 무언가 그의 앞에 떨어졌다.


“파문장입니다. 팰런버그 가문의 가주가 직접 내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집어 들었다. 그 내용은 상대가 말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끝에 찍힌 인장은 분명, 팰런버그 가주의 것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아버지가 나를…!”

“당신은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습니다. 악마들의 개가 되어 악종들을 돕다니.”

“모함이다! 나는 그런 적이 없어!”

“이렇게 증거가 명백한데 모함은 무슨 모함입니까. 더 추해지기 전에 그만하세요, 선배님.”


차가운 푸른 눈동자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목에서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검이었다.


“…팰런버그 가주와의 약조이니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은 오늘 여기서 죽은 겁니다.”


하지만 곧, 상대는 검을 거두었다.


“다시는 제 눈앞에, 아니 모두의 앞에 나타나지 마시길. 그것이 제가 선배님께 해 드릴 수 있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그럼, 내 돈은…?”


그 말에 상대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 죄송합니다. 비웃을 생각은 없었어요. 음… 이걸 끝까지 선배님답다고 해야 할지, 욕심이 과하다고 해야 할지.”


상대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당연히 팰런버그의 이름으로 얻은 모든 것들 중 단 하나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이걸 굳이 인지시켜 줘야 한다는 게 우습네요.”

“그, 그건 말도…!”


* * *


“…안 된다! 차라리 날 죽여라!”


페르냔이 잠에서 깨어났다. 익숙한 천장에 안도한 그는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고 냉수를 들이켰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또 그 꿈인가.

아니, 이걸 단순히 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건 미래였다.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된 예언의 능력.


“일반적으로 예언이라면 상인으로서 더없이 반길 만한 일이 분명한데…!”


하지만 페르냔은 그럴 수 없었다.

그 미래가 그의 몰락이 예정된, 가문에서 파문당하고 모든 돈을 잃어버리는 미래이기에.


“누가 그대로 당해 줄 줄 알고….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절대, 절대로.”


페르냔이 핏발 선 눈으로 다짐하고 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똑똑-


“공자님, 일어나셨습니까?”

“…잠시만 기다려라.”


페르냔이 흐트러진 옷과 얼굴을 정리하자 곧 시종이 들어왔다.


“언제 일어나신 겁니까?”

“얼마 되지 않았다.”

“식사 먼저 하시겠습니까?”

“간단하게. 크게 입맛이 없군.”

“예.”


잠시 후, 간단한 빵과 스프가 나왔다. 식사를 마친 페르냔은 시간을 확인하고 회의실로 향했다.


“지부장님 들어오십니다.”

“오셨습니까, 지부장님?”


그가 입장하자 앉아 있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르냔은 그들의 인사를 대충 받아넘기며 상석에 앉았다.


“회의를 시작하죠.”


곧 자신의 자리에 놓인 보고서들을 펼쳤다.


“예. 2월 11일 정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보고하겠습니다. 2월 10일 어제, 예비 신입생들의 입학시험이 있었습니다.”

“종일 치러진 시험에 학생과 학부모는 물론, 그들이 대동한 호위와 사용인들까지 모두 상단의 상점을 이용했습니다. 매출이 큰 폭으로 상승했는데….”

“알톤 연금술 교수가 마법 시약들을 구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해당되는 시약들은….”

“또한 벤달 교수는 골렘의 핵을 만들 마정석을….”


보고들이 줄지어 이어졌지만 페르냔의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꿈을 꾼 날에는 언제나 이랬다. 머리가 멍하고, 집중력이 저하되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실시간으로 다가오고 있는 최악의 미래에 대한 예견인데, 그것을 보고 멀쩡할 수 있으면 그건 사람이 아니었다.


“그만. 오전 회의는 여기까지 합시다. 나머지는 내일 하고.”

“예, 알겠습니다.”

“예!”


페르냔은 회의실을 떠나 집무실에 딸린 테라스에 자리했다. 커피 한 잔을 하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무슨 일? 없다.”


있었으나 그 꿈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요즘 잡생각이 많아지신 것 같습니다.”

“그래 보이나? 언제부터?”

“대략 반년 정도 전부터?”

“그건 요즘이 아닌데.”


하지만 시기는 정확했다.


“역시 그날의 후유증이 아직도?”

“아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그때부터 멍해지시는 일도 많고,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선택들도 하시고.”


물론 그 선택들은 결과적으로는 이로웠다. 이슈들을 선점한 페르냔은 상단의 이익을 극대화시켰다.


“결과적으로는 옳은 선택이었지.”

“하지만 평소에 일하시던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항상 철저한 조사와 검증을 우선시하시던 분이 갑자기 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행동하셨으니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정보통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있다고 하면 믿을 테냐?”


그래, 있었다.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아주 귀중한 정보통이.

페르냔이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 * *


평범한 날이었다.


“마음에 드는 제안이 하나도 없군. 딱히 효과적으로 보이는 게 하나도 없다.”


평범하게 아침 회의를 하고,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을 타박하던 날들.

불행과 행운은 언제나 급작스럽게 닥친다는 말이 있다.

그날은, 페르냔에게 그런 날이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불행이 닥친 날.


“그래도 많이 나아지지 않았습니까?”

“처음에 비하면 훨씬 낫긴 하지. 하지만 그뿐….”


───!


어떠한 예고도, 징조도 없이 페르냔의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쿠르르르릉-

한발 늦게, 하늘을 찢어발기는 굉음이 들려왔다.


“크아아아악!”


뒤늦게 낙뢰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충격에 페르냔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 약해진 틈새를 무언가가 파고들었다.


- 뭐, 뭐야?


영혼이었다.

빙의?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지껄이며 페르냔의 머리를 헤집기 시작했다.


‘네놈이야말로 뭐냐…!’


고통스럽고 당황스러운 일투성이었으나 페르냔은 우선 심장의 마나를 쥐어짰다.

상대가 자신의 육신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미약하게나마 남은 마나가 침략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 뭐야!


끄르륵, 마나가 상처를 헤집고 다닌 탓에 페르냔의 입에서 피와 하얀 거품들이, 핏발 선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그 대가로 침략자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 아악! 아파! 살려줘!


기세 좋게 등장한 것과는 반대로 놈의 영혼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수십 개로 갈라져 흩어졌다.

어떤 것은 도망가고, 어떤 것은 그대로 페르냔에게 흡수되었다.


“이게 무슨…?”


그리고 그 순간, 알 수 없는 기억들이 페르냔의 머리를 강타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지식들.

그것들은 대부분 인사만 나누고 헤어지는 지인처럼 스치듯 사라졌다.

의식의 저편에 가라앉으며 언젠가 떠오를 그 날을 기다린다는 듯이.

그 때문일까,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잊혀진 기억들 속에서 남은 건 몇 개 되지 않았다.


“…악마들이 다시 준동한다고?”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강렬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불길한 종말에 대한 예언이었으며.


“…내가 돈을 다 잃고 거지가 된다고? 뭐, 이런 개 같은…!”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미래에 대한 암시였다.

그날의 기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흘 동안 기절했다 깨어난 이후에는 다소 사소한, 하지만 상단에서 써먹을 수 있을 만한 정보들을 이용해 상단의 점유율을 올렸다.


‘행운과 불행은 동시에 찾아온다더니.’


미래를 안다는 행운, 그리고 그 미래가 파멸에 가깝다는 불행.

그것이 그날 갑작스레 페르냔에게 찾아온 것들이었다.


1화.




‘그 이후로 그 영혼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백방의 노력을 다했지만 알아낸 건 없었다.’


어째서 그에게 빙의하려고 했는지.

어째서 하필 그였는지.

어떻게 그런 기억들을 가지고 있었던 건지.

아직까지도 알 수 없었다.


‘당장 답이 나오지 않는 것에 매진하는 것은 낭비다.’


결국 페르냔은 영혼과 빙의에 대한 생각을 잠시 밀어 두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어쨌든 시간은 흐르니까.


“오늘 자 신문은 어디 있지?”


상념을 마친 페르냔이 손을 내밀었다. 하이드가 그 위에 신문을 올려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페르냔이 신문을 펼쳤다.


이펍 이미지


“…….”


신문에 적힌 하나의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페르냔의 눈에 오묘한 감정이 깃들었다.


“공자님?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기이한 표정에 시종의 물었으나 가볍게 넘겼다.


‘마침내 나타났군.’


예언서는 미래의 모든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대부분이 자물쇠에 잠겨 있어, 몇 가지를 제외하면 당장 페르냔이 인지하는 것은 딱 어느 시점까지의 순간에 불과했다.

그리고 신문 속 이름은 그 짤막한 내용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자였다.


“…진짜로 놈이 입학했다.”


상단의 일에 잘 이용해 먹긴 했지만, 이 부분만큼은 진짜가 아니길 빌었는데.


“갑자기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이드.”


페르냔이 하이드의 말을 끊었다.


“예.”

“내가 가문에서 파문당하고 알거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나?”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십니까?”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으니 만에 하나의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자님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요. 하지만 제 기준으로 봤을 때, 공자님이 돈을 다 잃는다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문에서 파문당하고 알거지가 된다니, 그런 미래가 실존할 리 없지 않나. 하하하.


꾸깃-


페르냔의 악력에 신문이 구겨졌다.


“공자님?”

“그걸 이제부터 확인해 볼 참이다.”

“확인이라니요?”

“남부 습지.”

“예?”

“남부 습지에 잠깐 다녀와야겠다.”


페르냔이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걸쳤다.

낙뢰를 맞은 그 순간부터 손꼽아 기다리던 때가 마침내 왔다.


‘대부분의 예언은 제국 아르미안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예언서에서 명확하게 명시한 주인공이라는 놈을 통해서.

어째서 예언서가 소설의 형태를 보이는지,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알지 못했다.


‘그건 중요치 않다.’


페르냔은 지금까지 수많은 교차검증을 통해 예언들이 반쯤 진실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진짜 중요한 내용은 지금부터였다.

주인공이라는 놈이 입학하는 순간, 본격적인 예언서의 이야기가 시작되니까.

그 주인공에 대한 검증은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했다.


“나 혼자 갈 테니까 말을 준비해라.”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시종이 윤기가 흐르는 품종마를 내왔다. 잠시 후 페르냔을 태운 말이 대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제국 아카데미는 제국의 내해에 위치한 섬, 바르디안 위에 세워진 거대한 영역이었다.

드넓은 부지는 마법으로 조성된 인위적인 환경이었는데, 그중 남부에는 드넓은 습지가 펼쳐져 있었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은 페르냔의 머릿속에 기억의 파편들이 떠올랐다. 가장 강렬하게 남은 세 가지 이야기.

페르냔 팰런버그가 파문당하는 미래.

페르냔 팰런버그가 몰락하는 미래.

페르냔 팰런버그가 알거지가 되는 미…


“아니, 이게 아니지.”


페르냔 팰런버그가 알거지가 되는 미래.

천 년 전, 콜로모 대왕이 소환했던 72악마가 다시 준동하는 미래.

그리고 예언서의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

그중에서 지금 유의해 살펴야 할 건 세 번째,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였다.


[입학시험을 마친 아인트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남부 습지로 향했다.

그가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유, 초대 황제가 가문에 남긴 지도의 흔적을 쫓기 위해서였다.]


“아인트 아르미안. 초대 황제의 안… 크윽.”


예언서의 내용을 떠올리자마자 일어난 끔찍한 두통에 낙마할 뻔했지만, 간신히 균형을 다잡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생각을 이어 갔다.

예언서에 등장하는 둘은 제국인이라면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인물들이었다.

아르미안 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주변의 다섯 왕국과 함께 제국을 세운 위대한 건국 황제.

그 찬란했던 황가의 권위를 모두 잃고 명예만 남은 아르미안가의 후손, 아인트 아르미안.

예언서가 확실하다면 악마들로부터 이 세상을 구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놈이기는 했다.


“초대 황제의 안배가 아카데미에 숨어 있다니. 지난 천 년 동안 누구도 밝히지 못했는데….”


빌어먹을, 내가 찾아냈으면 그게 얼마지? 아르미안가의 얼마 남지 않은 기둥뿌리를 뽑아 버릴 수 있었을 텐데.

어쨌든 예언서대로라면 아인트 아르미안의 중요도는 훨씬 격상될 것이다.

그저 옛 황가의 명예만 남은 존재가 아니라, 초대 황제의 안배를 손에 넣은 다크호스니까.


[며칠 동안 먹을 식량과 무기를 챙겨 습지의 경계에 도착한 아인트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늪지의 악어, 크로커였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크로커가 외곽까지 나온 것은 흔치 않은 일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제기랄. 역시 기억에 남은 예언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일어나는 두통은 도통 익숙해지질 않는군.”


크로커는 늪지의 상위 포식자였다. 놈의 가죽은 질기고, 이빨은 튼튼하며 턱 힘은 강철을 우그러트릴 정도였다.

어지간한 기사도 상대하기 힘들어하는 괴물. 놈은 본디 3학년 이상을 위해서 준비된 몬스터였다.

일반적으로 늪지 중심부에 서식하는 놈이 어째서 외곽으로 나왔는지는 의문이었으나, 원래 세상일이라는 게 순리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그가 번개를 맞았던 것처럼.


‘예언서대로라면 운이 없는 게 아니라 운명일지도 모르지.’


언뜻 스친 예언서 내용에 따르면 놈은 언제나 사건, 사고와 마주치니.

허나, 당장은 그리 중요치 않은 사항이었다.


[아인트에게는 재능이 있었으나 대부분 소실되어 비루해진 가문의 검술은 그것을 만개시키지 못했다. 크로커는 명백히 지금의 그가 상대하기에 벅찬 적이었다.]

[부상을 감내하고 간신히 도망쳤다.]


“여기까지는 진짜군.”


페르냔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이미 예언서 덕분에 몇 번 이득을 본 터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크로커는 사라졌지만 흔적은 남아 있었다. 저 멀리 괴물의 피 냄새와 누린내가 뒤섞여 있었다.


뿌득-


다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예언이 하나둘 맞아떨어져 간다는 건, 결국 그가 알거지가 되는 미래도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아인트의 부상은 심각했다. 챙겨온 포션으로 응급처치를 했지만 피 냄새를 맡은 몬스터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인트는 달렸다. 무작정은 아니었다. 심각한 상황에서도 그는 지도를 확인했다.]

[그리고 지도에 표시된 곳에서 아주 작은 구멍이 있었다. 어떠한 마법적 느낌도 없고 결코 인간이 들어갈 수 없어 보이는 작은 구멍.]

[이게 맞나 싶었지만 뒤에는 피에 굶주린 리자드맨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의심하지 말고 몸을 던져라.’]

[지도 하단에 적힌 문구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곳에 던전이 있었다.]


페르난은 크로커에게 정신이 팔린 리자드맨들을 빙 돌아 아인트의 흔적을 쫓았다.

무작정 도망쳤는지, 적나라하게 남은 흔적들 사이로 드문드문 핏자국이 보였다.

그리고 그 끝에서 구덩이를 발견했다.

도저히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 작은 굴. 차라리 토끼 굴에 가까우나, 예언서의 말에 따르면 이것이 던전의 입구다.

그리고 그 옆에.


“…어?”

“…어?”


가슴의 상처를 부여잡은 채 힘들게 굴로 다가가는 아인트와 마주쳤다.

뭐야.

이 새끼 왜 여기 있어?


‘…제기랄, 너무 빨리 왔나?’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주인공을 확인할 날만을 기다리다 보니 너무 성급하게 온 것이었다.


* * *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페르냔의 계획은 어디까지나 아인트가 던전에 들어간 뒤를 쫓으며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으니.

신입생들에 대한 입학 신문이 발간된 날에 아인트가 초대 황제의 안배를 얻었다는 것만 알 뿐, 정확한 시간까지는 모르기에 더욱더.

그게 지금의 사태를 만들었다.

설마 아인트가 아직 던전에도 못 들어갔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잠시 고민하던 페르냔은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아인트 아르미안. 입학시험은 이미 끝났을 텐데 왜 여기 있는 거지? 이곳은 너에게 허락된 곳이 아닐 텐데.”


자고로 서로 당황했을 때는 먼저 선수를 치는 게 최고다.

그의 말에 아인트가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저를 아십니까?”

“아카데미 내에서 내가 모르는 자는 없다. 그게 재학생이든, 교수든, 입학시험에 합격한 예비 신입생이든. 그게 아니더라도 넌 너무 유명하지만.”


서늘한 시선에 아인트가 몸을 움츠렸다.


“…실례가 안 된다면 누구신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페르냔이다.”

“페르냔…? 페르…냔 팰런버그…?”

“그게 내 풀네임이긴 하지. 그런데 ‘선배님’ 자가 빠졌군.”


아인트의 눈이 커졌다. 여기서 그를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거다. 그가 아인트와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처럼.


“죄, 죄송합니다.”

“됐다. 크게 신경 쓰지 않으니.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입학시험은 이미 끝났을 텐데 왜 여기 있는 거지? 이곳은 너에게 허락된 곳이 아닐 텐데.”

“…그게.”

“부상을 입었군.”


페르냔의 시선이 아인트의 어깨로 향했다. 반쯤 부서진 갑옷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가 꽤 많았다.


“리자드맨들에게 당했나?”

“…크로커를 만났습니다.”

“초입 부분에 크로커가 있었다고? 운이 없었군. 1년에 한두 번 일어나는 일을 경험하다니.”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던 페르냔이 아공간에서 포션을 꺼냈다.


“받아라. 최상급 포션이다.”

“저는 페르냔 공자께 포션을 살 돈이 없습니다.”

“선배라고 부르라고 직접적으로 말해야 알아듣나?”

“…예, 선배님.”

“돈은 필요 없다. 하지만 공짜도 아니다. 이건 투자다, 아인트 아르미안.”

“투자라고 하시면?”


갑작스러운 말에 아인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페르냔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설명했다.


“몰락했고, ‘전’이라고 한들 황가는 황가. 적어도 볼품없는 인간이 되지는 않겠지.”

“…….”

“받을 거냐, 말 거냐. 피를 조금만 더 흘리면 땅이랑 키스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은혜는 다음에 꼭 갚겠습니다.”


아인트가 포션을 받아 상처에 부었다. 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빠르게 재생되었다.

역시 돈이 좋다. 하급이었다면 열 병쯤 부었어야 할 텐데.


“네가 왜 여기 있는지는 묻지 않겠다. 누구나 비밀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는 법이니까.”

“…….”

“하지만 날 만난 정도의 행운이 두 번이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고 돌아가라. 여긴 아직 네가 있기에 벅찬 곳이니.”

“…예. 그런데 페르냔 선배님께서는 왜 홀로 여기에?”

“약초를 구하러 왔다. 아주 비싸고 귀한 약초가 이 근방에서만 자생한다.”

“그걸 직접 말입니까?”

“마법사가 아니면 온전히 채취할 수 없으니까.”

“아….”

“다음에 또 보지. 위험하니 빨리 벗어나라.”

“예, 충고 감사합니다, 선배님.”


페르냔이 말을 타고 사라졌다.

그의 모습이 안 보이게 될 때쯤, 아인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날 뻔했네.”


하필 던전에 들어가기 직전에 누군가와 마주치다니.


“페르냔 팰런버그.”


돈을 좇는 돈 귀신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팰런버그의 장자.


“그렇게까지 돈 귀신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소문이란 게 원래 그렇다. 과장되고 악의적으로 붙어 사람을 쓰레기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다.

아르미안가가 황위를 잃어버린 뒤, 어떤 잡소문과 무시들이 떠돌았는지 아인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가문 대대로 뼈에 사무쳤으니까.


“어쨌든 이 은혜는 갚겠습니다.”


비록 그가 아닌 그의 가문을 보고 한 투자였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았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니.

무엇보다 던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부상을 치유했으니 목숨을 구함받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시 한번 주변의 기척을 살핀 아인트가 굴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가 사라졌다.


* * *


“정말로 던전이군.”


기척을 숨기고 있던 페르냔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나저나 뭐가 저렇게 어리바리하지? 꿈속에서 만난 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인데.”


그때와 지금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그렇게 역변한 거지?

쯧, 혀를 차던 페르냔이 상념을 멈추고 시선을 다시 던전의 입구로 돌렸다.


“들어가면 아래로 쭉 떨어진다.”


[낙하의 충격에 아인트는 신음을 삼켰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살기 위해 남은 포션을 모두 흡입했다. 그럼에도 상처가 심하고 포션이 워낙 질이 떨어져 완치되지는 않았다.]

[고통을 무릅쓰고 전진했다.]


이후, 아인트는 부상을 입은 채 전진했지만 페르냔을 만난 이상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것이다.


“최상급 포션….”


조금 아깝긴 하지만 예언서가 진짜라면 투자할 가치로는 충분했다.

첫인상부터가 달라졌으니, 긍정적인 미래로 바꾸는 첫 단추를 잘 꿰맨 느낌도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때쯤, 페르냔은 굴속으로 몸을 던졌다.

아무런 저항감 없이 세상이 뒤집혔다.


“클리어됐군.”


황가의 핏줄에만 반응하는 던전이 아무에게나 반응한다는 것은, 던전이 의무를 다했다는 뜻이다.

탁, 가볍게 착지한 페르냔이 전면을 응시했다.

딱히 적도, 함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쭉 뻗은 통로만이 길게 이어졌다.

은은한 마법등들이 띄엄띄엄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부는 생각보다 밝았다.


“마법등이 이렇게 많은데 마나의 흔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고?”


페르냔이 몸을 띄워 마법등을 살폈다.


“처음 보는 각인인데….”


아주 미세하게 주변의 마나를 빨아들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깨달았다. 이건 반영구적인 마법등이라는 것을.

정교하게 깎인 문양이 외형적으로도 고풍스러움을 자아냈다.

페르냔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인트 아르미안이 정말 예언서의 인물이 맞는지 의문이 드는군.”


마법등을 뽑았다. 그럼에도 등은 빛을 잃지 않았다.


“이것들을 그냥 놓고 갈 정도로 멍청한 놈한테 이 세계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어둠밖에 남지 않았다.

교과서 대신 예언서 읽습니다



지은이 : 미립
펴낸곳 : 스토리작
출판등록 : 제 2020-0000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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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 02-2101-2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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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92996-28-8(05810)
발행일 : 2023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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