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따라 흐르는 칼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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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따라 흐르는 칼 (연재)


지은이 l 취설


발행일 l 2024.03.14

펴낸곳 l (주)디엘미디어

출판등록 l 제 2023-000094 호

주소 l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킨텍스로 240, 오피스동 309호 (킨텍스GIFC)

전화 l 031) 924-7823  팩스 l 031) 924-7824


펴낸이 l 임귀성

기획 l 임태준

편집 l 김소현

운영 l 박찬훈


투고 및 문의 l connect@dlmedia.kr

홈페이지 l https://www.dlmedia.kr


ISBN l 9791171371198(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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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영겁회귀술(永劫回歸術)




‘절풍삼도(折風三刀) 설무한(偰無限)’은 양손에 들린 도를 움켜잡았다.

동시에 자신을 향해 귀두도를 내리치는 흑의인 두 명에게 거리를 좁혀 파고들었다.

“타압!”

짧은 기합과 함께 설무한의 도가 한 명의 목줄기를 그어버렸다.

예상을 뛰어넘는, 쾌속하고 긴 사정거리의 도풍을 인지하지 못한 대가.

“쿨럭. 컥.”

쓰러지는 상대 옆으로 한 차례 회전 후.

왼손의 대도로 나머지 녀석의 복부를 냅다 찔렀다.

푸우욱.

깊이 들어갔지만 설무한은 방심하지 않았다.

이놈들은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발악을 멈추지 않는 족속들이었으니.

대도를 흔들어 거기에 꽂혀 있는 놈을 멀리 던져버리고 나서야 안심하며 신형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수아아악!

아차, 한 놈이 더 있었다.

지근거리 그림자 속에서 흑의인이 살쾡이처럼 튀어나와 면도를 휘둘렀다.

동료들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기회를 포착한 걸 보면, 보통 독한 놈이 아니었다.

“윽!”

피한다고 피했지만, 허벅지를 베이고 말았다.

불로 지지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

틀림없이 날에다 독을 덕지덕지 처발라 놓았겠지.

걱정이 뇌리를 때렸지만 당장은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했다.

“이~놈!”

도의 방향을 바꿔 잡은 설무한.

습격자의 자세가 낮아 상대의 등이 훤히 드러났고.

그대로 꽂아 거침없이 반으로 갈라버렸다.

뿌아아악.

분수처럼 솟구치는 핏물과 얼굴에 튀는 파편.

그걸 닦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설무한은 쌍도를 휘두르며 방어 자세를 취하고, 기감을 끌어올려 주변을 검색했다.

기척은 없고, 어두운 동굴은 묵직하기만 했다.

다행히 놈들의 공세가 잠깐이나마 중지되었는가.

“헉헉… 지겨운 새끼들…….”

그제야 혈도를 찍어 지혈하고 해독약을 상처에 뿌린다.

제대로 운기하고 치료받아야겠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설 대협!”

자신을 부르면서 무인들이 달려왔다.

피투성이에 엉망이 된 꼴을 보아하니, 그쪽도 악전고투를 치른 모양이었다.

“어? 나머지는 어딨소?”

세어보니 겨우 일곱 명만 남았다.

일각 전에만 해도 서른여섯이 동행했는데.

“전부 전사했습니다.”

“벌써?”

“송구합니다.”

무당, 화산, 무림맹 고수들이 이렇게 순식간에 궤멸적 타격을 입다니.

설무한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지독한 마교 놈들.”

핏물로 범벅이 된 설무한이 이를 갈았다.

지금까지 상대한 자들은 천마신교(天魔神敎), 즉 마교인들.

그중에서도 최정예 살수귀였다.


*  *  *


마(魔)를 숭배하는 소위 천마교(天魔敎).

본래 그들의 근거지는 신강, 운남을 비롯한 중원 남부 지방이었다.

오랜 세월 끈질기고 심한 박해를 받아왔기에 관부의 손길이 닿지 않는 음지에서 활동했고, 중원 전체에 파급력은 미미했다.

강호는 무림맹과 구파일방을 비롯한 백도가 흑도를 압박하는 자세를 취하며 지배해왔는데.

이십일대 교주 ‘조예(曹豫)’가 등극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기연을 얻은 그는 마공이 ‘초마경 아수라(超魔境 阿修羅)’의 경지에 이르러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인간보다 강력해졌으며.

조직을 정비하고 단련시켜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마인(魔人)의 집단으로 교단을 성장시켰다.

“천하를 지배하리라!”

중원을 향한 그의 손아귀.

이윽고 벌어진 끔찍한 혈전.

결전의 결과는 예상외였다.

무림맹은 불타서 사라졌으며 구파일방은 차례차례 무너져갔다.

천하제일 무림십존이라 불리던 예전 절대 고수들은 조예, 이젠 천마가 된 그에게 패해 무려 네 명이나 전사하고 두 명이 도망치는 창피를 당한다.

휘몰아치는 마교의 깃발.

천마를 따르지 않으면 흑백을 가리지 않고 몰살시켜버리는 잔인한 정책에 의해 평화롭던 산하는 피로 물들었고.

강호 무림 십팔만 리의 수많은 문파와 명문세가는 그의 발밑에 잔인하게 밟히기 일보 직전까지 이끌리고 말았다.

그렇게 군웅 협걸이 피바다에 빠져 씨가 말라버리기 직전이었는데.

이곳의 어두운 동굴에서 무림의 생사를 건 건곤일척(乾坤一擲)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  *  *


설무한은 부상을 대충 매만지고 몸을 털었다.

말라서 덕지덕지 붙은 피딱지와 흘러내리는 생생한 핏물.

내 상처에서 흐른 것인지, 적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포기할 놈들이 아니야. 곧 불개미 떼처럼 몰려올 테니, 정돈하고 다시 붙어 봅시다잉.”

포위한 마교의 살수대는 적어도 일천이고 남은 아군은 본인까지 포함해 겨우 여덟이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아니라 메추리알로 암석 치기.

그걸 아는데도 설무한은 눈곱만큼도 망설이는 눈치가 아니었다.

불굴의 눈동자에는 쇠심줄 같은 질긴 고집만이 담겨 있었다.

“설 대협은 안으로 들어가세요. 우리가 막겠습니다.”

“농담하쇼? 일곱으로 뭘 막는다는 거요!”

“일곱이나 여덟이나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

생존 아군의 수장인 화산파 제자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마 설 대협은 진법 적응 훈련을 받았잖아요? 대협이라도 도달해야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생깁니다.”

설무한이 눈꼬리를 씰룩대며 그를 뚫어져라 뻔히 쳐다봤다.

“정녕 가능할까?”

“여긴 힘들지만, 저기 좁은 통로는 가능합니다.”

진법이 형성된 장소로 빠지는 길.

그곳은 장정 서너 명이 겨우 서 있을 수 있을 정도로 좁았으니.

일곱이 번갈아가면서 촘촘하게 방어 검진을 구사하면 십만 대군이라도 발길을 잡을 수 있어 보였다.

결사대가 자신들의 병기를 치켜올렸다.

“무인의 명예를 걸고 대협이 법술에 입진(入陣)하는 시간을 벌겠소이다.”

사나이들의 눈동자가 뜨거워졌다.

그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바깥에서 싸운다 한들, 약간 일찍 갈 뿐이지.

안으로 들어가도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어차피 이 동굴은 외길이다.

입구가 적에게 봉쇄되었으니, 빠져나갈 방도라고는 삼도천(三途川)을 건너 저승으로 가는 수밖에 없으리라.

“후우…….”

한숨을 쉰 설무한은 길게 생각지 않았다.

현재 입은 부상만으로도 언제 혀를 내밀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언제나 칼날 위에서, 생사를 내놓고 지내왔던 풍찬 도객의 인생이었다.

어차피 여한은 없었다.

“그럼 나는 안으로 가겠소.”

“제발… 천마 놈의 엉덩짝을 제대로 차버리시길.”

“엉덩짝만? 놈의 똥구녕까지 찢어버리겠소.”

“하핫. 대협만 믿겠소.”

“너무 믿진 말고.”

이런 처참한 경황에서도 태연하게 농담을 지껄이다니.

화산파 제자가 어이가 없어 비로소 설무한의 외모를 자세히 살펴봤다.

사자의 갈기를 묶은 것 같은 장발, 짙은 눈썹, 날카로운 턱선에 뚜렷한 이목구비.

미남자는 아니었으나 신용이 담긴, 진짜 대장부다운 얼굴이랄까.

게다가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탄탄해 보이는 어깨는 어떻고.

사십 대 중반이지만 수염과 주름만 가리면 이십 대 같았으니.

저승으로 떠난 무림맹주보다 훨씬 많은 마교도들을 해치웠다는 속설이 진짜로 믿길 만큼.

독기와 살기가 번뜩이면서 여유와 신용도 동시에 품고 있었다.

“무운을 빌겠소.”

“나도 무운을 빌지.”

좁은 혈굴 입구를 막아서는 일곱의 결사대를 놔두고.

등을 돌리자마자 굳은 표정으로 변한 설무한.

고개를 숙인 채 종유석을 제치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  *  *


좁은 토굴 안을 지나자.

넓은 동공이 드러났고, 유등에 횃불이 밝게 빛나는 공간이 나왔다.

“절풍삼도! 그대가 왔구려!”

설무한이 들어가자 반가워하는 음성이 귀를 때렸다.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향해 달려오는 도사, 스님, 술법사가 스물이 넘었다.

“반가워 마시오. 온몸이 쑤셔 곧 돌아가실 것 같으니까.”

“나머지는? 나머지는 어찌 되었소?”

“진법 적응자는 모조리 전사했소.”

“뭐, 뭐라고? 전부?”

“나는 운이 좋았지. 급습당할 때 후방에 있었으니까.”

일행 선두에 선 ‘태행진인(太行眞人)’이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화려한 도사복을 차려입은 그가 동공 내 인물들의 대표였다.

“적응자가 겨우 하나 남았다니…….”

설무한은 실망하는 그들의 표정을 보고 끓어오른 가마솥처럼 열이 올랐다.

“정보가 샜어! 마교 놈들이 눈치를 까고 습격했다니까? 그 독한 새끼들이 거품 물고 미친개 떼처럼 밀려들고 있으니, 견딜 재간이 있냐고!”

밖에서는 여기를 지키려고 목숨을 내놓고, 피똥 흘려가며 미친 듯이 싸우고 있는데.

겨우 이런 미지근한 호응이라니.

당장 도를 뽑아 들어 영감탱이들을 베어버리고 싶은,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안전한 내부에서 부적이나 붙이고, 꼬부랑 글자나 그리고 자빠졌으면서 잔소리는 마쇼. 나 진짜로 빡치니까.”

삿대질하며 고함을 치는 설무한.

같이 흥분하지 않고, 태행진인이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소림의 정명대사는 어찌 되었소?”

“두 팔이 잘린 채로 초입 부근에서 침을 흘리며 서성대는 게 마지막이었소. 그 꼴로 살아봤자 마교의 실험물밖에 더 되겠소이까?”

“이런…….”

진법 적응자 중에 소림사의 정명을 제일 적격자로 생각했는데.

‘설무한, 그는 후보였다. 그것도 말석. 순서가 돌아올 줄은 예상치 못했는데…….’

태행진인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백도도 흑도도 아닌 중도의 인물. 화경에 이른 절세고수는 아니지만, 초절정의 수위급… 진법 적응자 중에 가장 거칠면서도 자유분방했어…….’

무엇보다 설무한은 명문세가, 구파일방의 정파 인물이 아니란 점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방금 보여줬듯이 예의가 없고, 언행이 거셌다.

마교가 발호하기 전부터 그들과 싸워왔고, 협의가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긴 했지만.

출신이 미천한 그가 과연 무림을 구할 희망이 될 수 있을는지.

“마음에 안 들면 다 때려치웁시다! 돌아가서 마교 놈을 하나라도 더 해치울 테니! 그렇게 친구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게 낫겠어!”

태행진인의 탐탁지 않아 하는 눈빛을 눈치챈 설무한이 신경질 내려는 찰나.

“꺼져라! 죽어! 여기는 못 지나간다!”

깡! 깡! 차차차창!

동공 바깥에서 치열한 기합 소리와 병기음이 들려왔다.

적들이 가까이 몰려왔고, 결사대의 최후가 다가왔다는 신호였다.

마음에 들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 어서 가운데 원형진 안으로 들어가시오.”

“쳇. 엎드려 절 받기군.”

“부디… 성공하기를 빌겠소이다.”


*  *  *


절대자 천마에 대한 강호인들의 대응책.

중원에 존재하는 실력 있는 도사, 주술사, 술법가들이 모여 과거로 회귀할 수 있는 진법을 구축했던 것.

진법에 적응할 수 있는 고수들을 선발하여 천마가 아직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시절의 과거로 보내 암살하자는 계획이었다.

참으로 구차하기 짝이 없는 구상이지만.

이런 불확실한 주술 따위에 의지할 정도로 천하의 정세가 위급했다.


*  *  *


“제길… 삭신이 쑤시네.”

불평을 연신 내뱉는 설무한이었다.

그래도 이미 몇 차례 예행연습을 했는지라, 능숙하게 진법 가운데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그가 경락을 열면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영겁회귀술(永劫回歸術)을 발동합시다!”

태행진인을 위시한 스물두 명의 도사, 주술사, 술법가가 일제히 부적을 던지며 주문을 외웠다.

파파팟.

동공 벽에 새겨진 고대 주술 문자, 이백팔십만 자가 일제히 반딧불처럼 빛났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글자들이 허공 위로 솟구쳤고.

이윽고 은하수가 되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으…….”

설무한은 정수리에 번개가 내리꽂혀 전신 혈맥이 골고루 감전되는 듯한 극한의 고통을 느꼈다.

악다문 입에서는 핏물이 흐르고.

단전에 모여 있는 진기 모두가 신체 바깥으로 발산되었다.

부아아아악! 부아아아악!

시간과 공간이 머리 위로 흐트러지기 시작.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섬광에 눈은 멀고, 신경은 터져 나갔고, 전신은 불탔다.

설무한은 그 자세 그대로 사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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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는 과거로 회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