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귀환동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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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귀환동(연재)


지은이 l 정대영


발행일 l 2024.01.29

펴낸곳 l (주)디엘미디어

출판등록 l 제 2023-000094 호

주소 l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킨텍스로 240, 오피스동 309호 (킨텍스GIFC)

전화 l 031) 924-7823  팩스 l 031) 924-7824


펴낸이 l 임귀성

기획 l 임태준

편집 l 김소현

운영 l 박찬훈


투고 및 문의 l connect@dlmedia.kr

홈페이지 l https://www.dlmedia.kr


ISBN l 9791171371013(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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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재앙곡(災殃谷) (1)




비가 내리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었던 땅이 빗물에 눈 녹듯 녹아내렸다. 그 위를 내달리던 말과 사람들은 땅을 진동시켰다. 잘 닦여 있던 산길은 어느새 진흙으로 변하고 있었고, 빗줄기는 더욱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번쩍!


별안간 내리친 번개가 굉음을 냈다.


우르르릉―


굉음에 놀란 말들은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서둘러 말들을 진정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한 번 날뛰기 시작한 말들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히이잉!


쏟아지는 비와 질펀한 진흙이 뒤엉키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흥분한 말은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말발굽에 차인 사람들은 혼비백산하기 바빴다.


“다들 정신 차려!”


대장(大將)처럼 보이는 이의 간절한 외침이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말들과 사람들이 뒤엉키면서 피해는 더욱 커질 뿐이었다.


첩첩산중(疊疊山中).

인적이 드문 산길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바랄 수도 없었다. 그저 비가 빨리 그치길 바랐고, 말들이 진정하길 바랄 뿐이었다.


그때였다.


쩌적!


마치 거목(巨木)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것 같은 소리. 그 불길한 소리가 말과 사람들 주변으로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말과 사람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

“뭐야?”


날뛰는 말과 사투를 벌이던 사람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놀랍게도 사람들이 멈춤과 동시에 말들은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몰려오는 파도를 피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다, 다들 도망쳐!”


대장의 외침과 함께 매섭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느리게 내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빗줄기는 허공에 맺혀 있었고, 사람들의 놀란 눈은 깜빡임조차 없었다.


그렇게 찰나 같은 시간이 지나고.


쩌저저적!


제자리로 돌아온 시간은 끔찍했다.


쿠궁! 쿠구구궁!


거목이 갈라지던 소리는 사실 땅이 갈라지던 것이었다. 하늘과 맞닿아 있던 산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소리. 위에 서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듯 산의 아가리가 쩍하고 벌려지고 있었다.


히이이잉―!


도망치던 말들.


“어…….”


제자리에 얼어붙은 사람들.


“정신… 차려…….”


그들을 깨우던 대장까지.


산은 자기 위에 있던 모든 것들을 집어삼켰다. 티끌조차 남김없이. 모든 것이 검고 칙칙한 산의 아가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산의 아가리는 이후 다음과 같이 불렸다.


재앙곡(災殃谷).


하루아침에 협곡이 돼버린 산길은 아무도 찾지 않는 금지(禁地)가 됐고, 금지를 드나드는 건 오로지 산의 새들과 동물 그리고 적으로부터 도망치는 무림인들뿐이었다.


그 누구도 몰랐다.


금지로 여겨지던 재앙곡 깊은 지하에 보물(寶物)이 감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보물에는 천하를 움직일 힘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  *  *


야심한 시각.


한 노인이 거친 숨을 내뱉으면서 비탈진 산길을 오르고 있다. 노인의 옷은 여기저기 찢겨 있었고, 그 안에선 붉은 선혈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헉, 헉…….”


노인의 머리 위에선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고, 얄궂은 빗물은 점점 그 덩어리를 키우더니 이내 장대비로 바뀌어갔다. 하지만 노인의 발걸음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저벅. 저벅.


마치 무언가로부터 쫓기듯이.


“헉, 헉…….”


노인의 발걸음은 오히려 빨라지고 있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노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죽지 않기 위해 노인은 산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노인의 발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문제는 노인의 의지보다.


“아이고! 검귀 어르신!”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불운이 컸다. 결국 막다른 곳에 다다른 노인은 제자리에 멈춰 서야만 했고, 그의 앞으로 산적 무리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새 멀리도 도망치셨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으실 겁니다. 왜냐하면 그 뒤가 바로 재앙곡(災殃谷)이라는 곳이거든요.”


검귀라 불린 노인이 재차 자신의 뒤를 확인했다. 그러자 재앙곡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노인의 백발이 휘날렸다. 더는 도망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뛰어내릴 수도 없었다.


재앙곡(災殃谷).


수십 년 전, 엄청난 지진과 함께 생긴 협곡이었다. 탄생과 함께 수많은 사람과 동물을 집어삼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재앙곡. 더불어 협곡의 깊이를 가늠해보겠다고 아래로 내려갔던 심마니와 무인들의 무덤이 되기도 한 곳이었다.


“낄낄낄! 천하의 검귀가 어쩌다 궁지에 몰린 생쥐 꼴이라니!”

“이거 가문의 영광입니다. 검귀 어르신. 크하하!”

“검귀를 죽이면 나도 백대고수가 되는 건가?”


산적들은 검귀를 앞에 두고 조롱했다. 그만큼 검귀는 이름난 무인이었고, 그를 죽일 수 있다는 건 무림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검귀(劍鬼) 강휘(康輝).


노인의 이름은 강휘였으며, 그는 과거 강호에서 검귀라는 별호로 활동했던 무인이었다. 그 당시 검귀의 칼날은 매서웠다. 같은 나이대에선 호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신출귀몰한 그의 행적은 검귀라는 별호를 만들었다. 그리고 검귀라는 별호가 사람들에게 오르내리기 시작할 즈음, 그는 무림 백대고수로 손꼽히게 되었다.


스릉―


검귀가 검을 뽑아 들었다.


“지금 발악이라도 하겠다는 것이오?”

“낄낄낄! 그거 재미있겠군!”

“내가 먼저 상대해주지!”

“아니! 내가 먼저!”


산적들이 앞다투어 검귀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마치 장난감을 앞에 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천하의 검귀가 어쩌다…….’


검귀는 씁쓸했다.


‘참 많이 망가졌구나…….’


검귀는 본래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살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에 벌였던 무자비한 대결과 복수, 검에 미쳤던 시기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남들보다 빠른 은퇴를 선택했고, 평범한 가정을 꾸렸다.


문제는 그 이후에 일어났다.


“내 딸, 내 손녀를 왜 죽였는지 말해줄 수 있나?”


검귀의 물음에 산적들이 일순간 침묵했다.


진실을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는 느낌. 산적들의 묵묵부답에 검귀의 표정은 더욱 싸늘해졌다. 자신의 가족이 죽은 이유에 대해서 그 누구도 대답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내 말해주지 않는 건가.”


검귀는 수년 동안 산적들을 보이는 대로 죽였다. 산적들의 씨를 말라버리겠다는 심산으로 닥치는 대로 죽여댔다. 그렇게 검귀는 원흉을 찾아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녹림십팔채(綠林十八寨).


그들은 스스로를 산의 수호신이라고 부르는 산적들이었다. 십팔채(十八寨)를 관리하는 십팔산왕(十八山王)과 그들을 하나로 통일한 일채주(一寨主).


녹림은 강호의 산을 관리했고, 그들의 땅을 밟지 않고선 강호를 다닐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거대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일채주라는 놈에게 직접 물어봐야겠군.”


녹림십팔채에서 유일하게 채주라는 호칭을 쓸 수 있는 존재이자 십팔산왕을 거느리고 있는 녹림의 우두머리. 일채주는 알고 있지 않을까. 검귀는 그렇게 자신의 딸과 손녀를 죽인 녹림과 전쟁을 벌여왔다.


스릉―


검귀가 검을 뽑았다. 그 모습은 흡사 한겨울 외로이 버티고 서 있는 사시나무와 같았다. 무림 백대고수의 위압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낄낄! 드디어 노망이 났구나.”

“끝까지 발악하는 꼴이 추하군!”

“그래! 그래야 검귀지!”


녹림의 산왕들이 검귀를 조롱했다.


쌍검을 든 만검산왕(萬劍山王).

거대한 도끼를 든 거력산왕(巨力山王).

긴 언월도를 든 창수산왕(槍秀山王).


녹림의 산왕은 수천, 수만 명의 산적들을 이끄는 수장이었으며 이름난 강호의 무인들보다 강했다. 그들은 대부분 강호 출신의 고수이거나 관군 출신의 장수(將帥)였다.


“후우…….”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검귀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저 마지막 가는 저승길에 길동무 한 명을 더 데리고 갈 심산이었다.


타앗―!


선수는 검귀였다.


무영검법(無影劍法).

―귀영보(鬼影步).


한때 검귀를 상징하던 보법. 귀영보가 펼쳐졌다.


스르르륵―


마치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검귀의 신형은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그리고 그곳엔 도끼를 든 거력산왕이 버티고 서 있었다.


‘일단 한 명……!’


검귀의 검이 거력산왕의 목을 향하던 순간이었다.


채앵!


“어딜!”


만검산왕의 쌍검이 검귀를 방해했다. 이어서 거력산왕의 커다란 도끼가 기다렸다는 듯이 큰 원을 그렸다.


부웅―!


거력산왕의 도끼가 검귀를 강하게 때렸다.


콰드득!


“커헉!”


검귀가 급하게 검집을 들어서 막아보려고 했지만 거력산왕의 도끼는 막을 수 없었다. 겨우 오른쪽 팔이 잘리는 걸 면한 수준이었다.


“낄낄! 거력의 도끼를 맞고도 서 있다니!”

“칫! 내가 노인 공경을 해줬을 뿐이야!”


만검산왕과 거력산왕의 대화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어쩌면 조금 전 검귀의 귀영보에 반응하지 못한 게 아니라 일부러 반응하지 못한 척한 것 같았다.


“장난은 그만하고 이쯤 하지.”

“왜? 한창 재미있는데? 낄낄!”

“그러게. 이제부터 재미를 보려는데 벌써 그만두기엔 아쉽지.”


창수산왕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두 산왕은 입맛을 다셨다.


“그동안 우리 식구가 당한 것도 갚아줘야지.”

“암, 그래야지! 낄낄낄!”


녹림은 검귀에 의해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그동안 검귀 혼자서 죽인 산적의 숫자만 수천 명에 달했으며, 그것은 중소 규모의 산채 몇 개가 통째로 날아간 것과 비슷했다.


‘젠장…….’


검귀가 입술을 깨물었다.


‘마지막으로 한 명만 더 죽이고 싶었는데…….’


다른 누구보다 거력산왕만큼은 죽이고 싶었다. 검귀의 딸과 손녀를 죽인 산적이 그의 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력산왕은 검귀의 딸과 손녀가 묻힌 무덤을 파헤치는 짓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상태론 힘들겠구나…….’


검귀의 상태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심각했다.


오랜 시간 동안 전투를 치르고, 밤낮으로 쫓기면서 체력이 바닥난 건 당연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상처에선 쉴 새 없이 피가 나고 있었으며, 방금 거력산왕의 공격으로 인해 오장육부가 뒤틀린 것 같았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내 죽어서도 네놈들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압도적인 수적 열세는 극복할 수 없었고, 산왕들의 무력도 검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만약 내게 다음 생이 주어진다면…….’


검귀는 그렇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더욱 철저히 준비해서 무너트려주마!’


저벅.


검귀가 처음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휘오오오―


재앙곡 아래에서 불어온 바람이 검귀의 백발을 흩날렸다. 한 걸음만 더 뒤로 가면 검귀는 재앙곡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검귀는 오히려 그걸 바라는 듯했다.


“어?!”


검귀가 재앙곡 아래로 떨어짐과 동시에.


“막아! 당장!”


창수산왕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만검산왕과 거력산왕이 검귀를 향해 뛰었고, 그제야 산적들은 검귀의 손에 쥐어진 무언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만, 만년설삼?!”

“저, 저게 왜……?”

“안 돼!”


재앙곡 아래로 떨어지는 검귀의 왼손에 작고 하얀 뿌리 식물이 쥐어져 있었다. 어린아이를 닮은 산삼(山蔘). 인형설삼(人形雪蔘)이라고도 불리는 만년설삼(萬年雪蔘)이었다.


“자알 먹고 간다. 이 개새끼들아.”


검귀의 가운뎃손가락이 산적들을 향해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재앙곡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크아아악!”

“이 미친놈이!”

“당, 당장 내려가서 찾아와!”


산왕들의 외침에 산적들이 부리나케 재앙곡 아래를 살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래로 내려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재앙곡 아래는 칠흑과 같았고,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이런 썅!”

“채주님께는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검귀와 함께 재앙곡 아래로 떨어진 만년설삼은 본래 채주를 위한 진상품이었다. 장장 수년에 걸쳐 찾아낸 만년설삼이 검귀와 함께 재앙곡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으아아아아! 젠장!”


거력산왕의 산채가 혼란스러운 틈을 노리고 훔친 것 같았다. 이후 검귀가 산왕들에게 쫓기면서 직접 섭취하지 못한 채 품에 지니고 있던 것이고 말이다.


“빨리 찾아와! 이 새끼들아!”


거력산왕의 호통에 산적들이 서둘러 밧줄을 준비했으며, 재앙곡 아래로 내려갈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으로도 재앙곡은 내려갈 수 없었다.


휘오오오―


검귀는 복수를 못 한 채 재앙곡 아래로 떨어졌고, 녹림은 만년설삼을 잃었다. 그렇게 검귀와 녹림의 작은 전쟁은 어느 한쪽도 웃지 못한 채 끝을 맺고 있었다.


툭. 투둑.


재앙곡 중턱 부근.


“흐읍!”


검귀가 죽지 않고 살아서 매달려 있기 전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