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풍무영(天風無影) 01화

천풍무영
cover
천풍무영

序章

 

 

번쩍하고 섬광이 작렬하면서 순간적으로 사위를 온통 새파랗게 밝혔다.

그와 함께 고통으로 인해 참담하게 일그러진 한 사람의 얼굴이 찰나지간 드러났다.

쏴아아아!

억수 같은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

“사, 사형, 당신이… 어떻게 사부님께 이런 독수를… 으으…….”

사십여 세가량의 중년인이 뺨을 씰룩거리며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그는 청수한 용모에 온후한 기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안색은 흑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탁자에 두 손을 얹고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배은망덕한… 으으… 당신은 사부님께 그토록 큰 은혜를… 입고서도…….”

중년인은 좌측에 앉아 있는 한 명의 장한을 쏘아보며 더듬거렸다.

장한은 자의(紫衣)를 입고 있었으며 나이는 오십이삼 세가량으로 보였다.

네모진 얼굴의 윤곽, 가슴까지 자란 긴 흑염, 부리부리한 호목(虎目)과 오뚝한 콧날, 꼭 다문 두툼한 입술이 그의 기개가 강건하며 대범하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기골이 장대했고 상대로 하여금 절로 위축감을 느끼게 하는 풍모의 소유자였다.

장한이 천천히 일어섰다.

“사제,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일신에 사해팔황(四海八荒)을 뒤덮고도 남을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따위 산 구석에서 썩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오래전부터 못마땅하게 여겼다.”

“당신은… 하늘같은 사부님의 은혜를 어찌… 저버릴 수 있다는 말이오?”

“사제의 말이 맞다. 사십 년 전 나는 중상을 입고 쫓기다가 사부님께 발견되어 극적으로 살아났고 광세절학을 전수 받았다.”

“으으, 그걸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중년인은 헐떡이다가 왈칵 검붉은 핏덩이를 토했다.

핏덩이가 탁자를 뒤덮었다.

탁자에는 세 개의 찻잔이 세 방향으로 놓여 있었다.

찻잔 두 개는 중년인과 장한 앞에, 그리고 마지막 하나의 찻잔은 한 명의 백포노인 앞에 놓여 있었다.

백포노인은 마치 신선 같은 풍모에 갈대꽃처럼 희디흰 수염을 길게 기른 백여 세 이상의 고령이었다.

자비로움과 위엄을 동시에 갖춘 백포노인은 굳은 표정으로 눈을 감은 채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다.

장한은 힐끗 사부인 백포노인을 쳐다본 후 중년인에게 말했다.

“나는 사십 년간 사부의 수제자로서 이 산중에 처박혀 있었다. 오직 무공 수련과 사부의 명령에만 복종하며 과거의 은혜를 보답하려는 간절한 의도에서였다. 그리고 나는 이제 과거의 은혜를 모두 청산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터무니없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야망이다. 이런 산중에서 썩고 있기에는 나의 야망이 너무 크다.”

순간 장한의 전신에서 파도 같은 엄청난 기도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여전히 굵직하고 나직했다.

“이제 나는 천하(天下)를 제패할 것이다.”

중년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장한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만 당신은 실패할 것이오. 천하에는 당신을 능가하지는 못해도 당신에 버금가는 고수들이 더러 존재할 테니까 말이오.”

장한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사제는 사대신절(四大神絶)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소. 그들이 있는 한 당신의 야망은 물거품이 될 것이오.”

“하하핫, 염려 없다.”

장한은 고개를 젖히고 나직이 웃었다.

“나는 지난 사십 년 동안 사대신절 중 한 명인 사부의 절학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리고 같은 세월 동안 나의 형제들은 삼대신절의 절학을 이어받았지.”

“그, 그럴 리가…….”

중년인은 눈을 부릅뜨며 벌떡 일어서려다가 맥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우당탕!

그는 쓰러진 채 공포의 눈빛으로 장한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그런…….”

“후후, 모르고 있었겠지. 나에게는 사형제가 셋이 더 있고, 내가 사부에게 구함 받은 그 즈음에 그들도 삼대신절에게 각각 비슷한 경로로 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사형제가 뭉쳐 천하 제패의 위업을 달성하는 것이다.”

중년인은 눈을 부릅뜨고 전신을 덜덜 떨었다.

그것은 단지 고통 때문만은 아니었다.

너무도 엄청난 충격 때문이었다.

중년인은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섰다.

장한이 나직이 웃었다.

“음황천독(陰荒千毒)에 중독되면 반 시진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神)도 만독불침지신(萬毒不侵之神)도 음황천독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지. 헛헛, 독고천(獨孤天), 명을 재촉하지 마라.”

“비열한… 반도(反徒)!”

중년인 독고천은 으드득 이를 갈며 번개같이 쌍장을 발출했다.

휘이잉!

비록 그는 천하절독인 음황천독에 중독된 상태였지만 그의 필사일장의 위력은 무서웠다.

그러나 장한은 가볍게 소매를 떨쳤다.

순간 독고천은 처절한 비명을 터뜨리며 가랑잎처럼 날려가 구석에 처박혔다.

꽈꽝!

“으아악!”

그는 핏덩이를 마구 토해내며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마음뿐이었다.

“크으으, 천벌을 받을 놈. 네놈이 사문에 입문한 것은… 모두 계략이었구나. 네놈의 사형제는 의도적으로 사대신절의 절학을 계승하여 천하를 장악하려고 음모를 꾸민 거였어. 으으…….”

장한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백포노인에게 다가갔다.

백포노인은 여전히 질끈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장한은 사부인 백포노인을 뚫어지게 쏘아보며 한 걸음씩 전진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백포노인이 얼마나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이며 얼마나 완벽한 무도인(武道人)인지를.

그랬기에 그는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백포노인의 반 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백포노인은 석상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장한이 천천히 우장을 들어 올리자 그의 손이 투명하게 변했다.

마치 백옥(白玉)으로 만든 손 같았다.

장한의 시선이 백포노인에게 못 박혔다.

순간 장한의 장심에서 섬전 같은 백광(白光)이 눈부시게 뿜어졌다.

츠으읏!

“백천옥강(白天玉罡)!”

“안 돼!”

독고천이 절규하듯 외쳤다.

다음 순간 백포노인이 번쩍 눈을 뜨며 번개같이 일장을 밀어냈다.

그의 장심에서도 찬란한 백광이 뿜어졌다.

찰나 굉렬한 벽력 음과 함께 천장과 사방 벽이 지푸라기처럼 날려갔다.

꽈꽝!

그와 함께 답답한 신음성이 터졌다.

“우욱…….”

장한이 가슴을 움켜잡고 비틀비틀 물러났다.

그의 검은 수염을 타고 핏물이 흘러내렸다.

장한은 눈을 부릅뜨고 백포노인을 쏘아보았다.

‘음황천독에 중독되었는데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위력을 발휘하다니…….’

그의 눈빛은 역력한 불신을 담고 있었다.

그때 백포노인이 천천히 일어서자 장한은 움찔 물러섰다.

백포노인은 평소처럼 맑고 고요한 눈빛으로 장한을 직시했다.

“그랬었느냐, 종후(鍾侯)?”

“으음…….”

장한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백포노인이 담담히 말했다.

“가까이 오너라.”

그의 음성은 고요했지만 범접키 어려운 위엄이 담겨 있었다.

잠시 그대로 서 있던 장한은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크흐흐, 사부, 요행히 아직까지 버티고 있지만 당신의 오장육부가 거의 녹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소. 내가 당신에게 최후의 살수를 가하지 않는 것은 은혜의 미진한 마무리를 매듭짓기 위함이오.”

백포노인의 백미가 처음으로 꿈틀거렸다.

“종후, 노부는… 너를 용서하겠다. 돌아오너라.”

그의 음성은 너무나 고요했다.

장한은 희미한 웃음을 피워 올렸다.

“흐흐, 아무도 나를 용서할 수 없소. 설사 당신이라 해도 말이오. 당신의 검절(劍絶)이란 명호는 영원히 이곳에 묻힐 것이오.”

꽈르르릉!

바깥에서 뇌성벽력이 대지를 강타했다.

“쿠하하핫! 저승에서 나를 똑똑히 지켜보시오! 내가, 당신의 수제자가 천하를 제패하는 자랑스러운 모습을 말이오! 으하하핫!”

장한은 광소성을 터뜨리며 번쩍 신형을 날렸다.

그의 모습이 칠흑 같은 폭우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쏴아아아아!

빗줄기는 한 채의 초옥에도 퍼부어졌다.

지붕과 사방 벽이 날려간 초라한 집 안에 죽음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순간 묵묵히 서 있던 백포노인이 크게 휘청거리더니 힘없이 쓰러졌다.

“욱!”

“사부님!”

독고천이 처절히 부르짖었다.

그러나 백포노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음황천독은 이미 그의 내장과 뼈를 모조리 녹이고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찻잔에 빗물이 가득 고였다.

빗물이 고이기 전 그 찻잔에는 향기로운 백록엽향(百綠葉香)이란 차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향기로움 속에는 귀신도 모르게 음황천독이 섞여 있었다.

“천아…….”

백포노인은 천천히, 매우 천천히 독고천에게 기어갔다.

그의 안색은 방금 전과는 달리 시커멓게 변해 있고 칠공(七孔)에선 꾸역꾸역 검은 독혈(毒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황천독은 천하의 그 누구도 해독할 수 없으며, 중독되면 대라신선(大羅神仙)이라 해도 살릴 수가 없다.

백포노인도 예외는 아니다.

그때 돌연 경천동지할 어마어마한 굉음이 터졌다.

꽈꽈꽈꽝!

우르르릉!

그와 함께 야공에서 집채만 한 바위들이 우박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원래 이곳은 삼면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절곡이었다.

그런데 지금 삼면의 절벽이 붕괴하고 있는 것이다.

꽈르르릉! 와드드등!

천지창조의 혼돈처럼 절벽이 산산이 부서졌다.

“사부님!”

그 가운데서 처절한 한줄기 절규가 터져 나왔다.

쿠쿠쿠쿵! 와르르릉!

절벽은 일각에 걸쳐 붕괴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더 이상 집도, 백포노인도, 독고천도 없었다.

다만 새로이 형성된 거대한 암산(岩山)만이 배덕과 음모를 덮고 있을 뿐이다.

“크하하핫! 이제 시작이다! 아무도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크하하핫!”

장한은 암산 위에 우뚝 서서 미친 듯이 앙천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광기와 신광이 뒤범벅되어 뿜어져 나왔다.

순간 장한이 까마득한 암천으로 치솟아 올랐다.

슈우욱!

그리고 곧 섬광이 작렬하는 폭우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천풍무영

천풍무영

 

 

지은이 : 임영기

발행인 : 서경석

 

전자책 발행일 : 2019-09-01

 

출판사 : 도서출판 청어람

               이젠북

 

등록번호 : 제387-1999-000006호

 

주소 :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심곡2동 163-2 서경빌딩 3층

전화번호 : 032-656-4452 

홈페이지 : www.chungeoram.com

                    www.ezenbook.co.kr

 

이 책은 도서출판 청어람이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전자책으로 발행된 것이므로 불법복제 및 유포, 공유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