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01
프롤로그
이계에서의 첫 번째 기록.
이곳은 초원이다.
다큐멘터리에서나 봤을 법한 그런 세렝게티 초원.
하지만 이곳은 내가 알던 그런 초원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세렝게티는 사자와 기린. 코뿔소 등이 먹고 먹히며 살아가는 그런 생태계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엔 그런 순환 따위 없다.
괴물이 나타나고, 도망치고…… 다행히 도주에 성공하고, 실패한 누군가가 나 대신 먹히는 걸 바라보는…… 그걸 보며 공포에 찌들 뿐인 이곳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었다.
나는 이곳에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
왜 왔는지도 모른다.
그냥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곳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을 뿐이다.
제발 이곳이 꿈이길 빌었지만…… 여러 오감이 말해 주고 있는 것은 이곳이 현실이라는 사실 뿐.
그래서 난 다짐해 본다.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곳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02
01. 생체리치로 귀환했다(1)
이계에서의 두 번째 기록.
생존을 다짐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죽어 버렸다.
그렇다면 난 어떻게 존재하고 있을까?
……부활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부활이라니?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눈을 감았다 뜨니 부활해 버렸다!
제자리에서의 부활은 아니다. 게임으로 따지면 랜덤 리스폰 같은 방식이랄까?
그렇다고 내가 특별한 건 아니다.
정확히는, 부활 같은 건 이곳에선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닌, 이곳에서는 그저 일상일 뿐.
그저, 견뎌야만 하는 가혹한 상황에서 영원히 도망칠 수 없을 뿐인 것이다.
어차피 다시 살아남에도, 죽는 것은 두렵다.
정확히는 죽을 때의 그 생생한 아픔이 두렵다!
괴물의 입 속은 믹서기와 같아서, 매번 발끝부터 얼굴 끝까지 갈리는 느낌을 받으며 죽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두려워 도망 다니고, 괴물들은 그런 우리를 잡아서 입에 넣고 믹서로 갈아 버린다.
그것이 반복되는 이 공간은,
그야말로 지옥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계에서의 세 번째 기록.
3미터의 거대한 체고. 전체적으로 도베르만을 닮은 외형의 괴물.
난 그 녀석에게 셀 수 없이 죽었지만, 끝끝내 그 녀석을 죽일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먹어 치울 수가 있었다.
죽기 직전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달려들어 녀석을 물어뜯어 버렸는데 그 방법이 통했던 것이다!
살점이 씹힐 줄 알았건만,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듯 녀석의 살점이 나에게로 흡수되었다.
그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물론 또 다른 녀석에게 잡아먹혀 죽었지만, 나는 되살아났다.
또다시 괴물을 만났고, 난 한 입씩 먹어 치웠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말 그대로 최후의 발악!
그런데 묘했다.
이전보다 빨라졌다.
세졌다.
피할 수 없었던 걸 피할 수 있게 되어 버렸다.
그 현상은 녀석들의 살점을 취할수록 강해져서 죽는 시간이 늦어지고, 녀석들을 물어뜯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속되었다.
죽는 것은 마찬가지.
하지만 난 이제 도망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리고 부활한다면, 그것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면 도망칠 이유보다 맞설 이유가 많다.
결국 백 번이 넘지 않은 죽음 끝에 난 이 빌어먹을 도베르만 새끼를 완전히 죽이고, 먹어 치울 수 있었다.
이곳에 도베르만 새끼는 널리고 널렸다.
어쩌면 이곳에 떨어진 인간의 수만큼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낼 것이다.
이제부터,
포식의 시간이다.
이계에서의 네 번째 기록.
한 시간이 걸려 죽일 수 있던 녀석을 30분, 20분. 5분…….
그리고 단 일격에 쳐 죽일 수 있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인간을 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 !@#!$%%%!!!!!!!”
녀석들은 아무래도 나에게 감사함을 표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난 녀석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녀석들은 똑같은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언어를 난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짧은 영어도, 일본어도, 러시아어 같은 인사말도 해 봤지만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릴 뿐 대화는 통하지 않았다.
손짓 발짓을 통해 일말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지만, 하나같이 ‘어떻게 괴물을 죽일 수 있었냐’는 식의 질문이 전부였다.
난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녀석들 역시 나와 같은 방법을 시도했지만…… 아무래도 그들은 나와 같은 방식으론 강해지지 못하는 듯했다.
내 예상일 뿐이지만 그들과 나는 언어만큼이나 뭔가가 다른 것만 같다.
이계에서의 다섯 번째 기록.
궁금한 것이 많았다.
왜 이들과 나는 다르게 생겼을까?
왜 말이 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
도대체 이곳은 어디일까!
이곳의 수문장을 죽인 후,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거대한 개들보다 더욱 거대하고, 대가리가 9개나 달려 있던 괴수!
그 괴수에게 127번을 죽고 나서야 나는 녀석을 전부 먹어 치울 수 있었다.
- 1층의 수문장이 죽었습니다.
- 수문장의 권한이 양도됩니다.
마치 잊었던 것을 떠올리듯 들어오는 1층의 규칙들.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지옥 같다고만 생각했는데, 정말 지옥이었을 줄이야?
심지어 지하 9층까지 있는 지옥의 1층이었다!
미친. 지옥이라니?
왜 내가 여기에 있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심지어 이곳에 있는 놈들은 이데로니아라는 곳의 인간들이다.
그런 나라가 있었던가?
그래, 있을 수 있다.
내가 모르는 이름의 나라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나라의 죄수만 오는 곳을 한국인인 내가 올 수는 없어야 했다.
심지어 난 죄인도 아니다.
죄가 있다면, 도대체 난 무슨 죄를 지었나?
도망간 아버지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서 여동생을 키운 죄인가?
그게 아니라면 여동생의 속도위반 결혼을 다년간 못마땅하게 여긴 죄일까?
그것마저 아니라면, 잠 줄이고 몸 축내면서 악착같이 돈을 번 것이 잘못이라도 되나?
아니, 도대체 내 잘못이 무엇이길래 지옥에 왔단 말인가!
억울했다.
너무나도 억울했다!
녀석을 섭취한 후 이데로니아의 언어를 할 수 있게 된 나는 해방이라도 된 듯 덩실덩실 춤추고 있는 녀석들에게 따져 물었다.
너희의 죄가 무엇이냐고!
그들은 무언가를 훔치고, 빼앗고, 사기 치고, 자살했다.
그것이 이들이 이 지옥에 있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난 훔치고, 빼앗고, 사기 치고, 자살했던가?
아니!
정말 결단코 그런 일은 없다!
억울하고, 분했다.
나가고 싶지만 이곳에 출구는 없다.
그저 지하 2층으로 향하는 입구만이 있을 뿐.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 해야만 하는 일은 오직 하나.
지하 9층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곳의 주인을 찾아가는 것.
따져 묻는 것.
가능하다면, 죽여 버리는 것!
할 것도 없어진 지옥 인생. 끝장을 볼 것이다.
기묘한 지옥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그렇게,
지옥에서의 1562번째 기록.
이곳은 지하 9층.
돌이켜 보면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2층 인신 공양의 사막에서 괴물 뱀을 몸속에서부터 죽였고,
3층 자살의 분화구에서는 괴물 도마뱀을 삼키고 견뎌 내야 했다.
4층 불바다에선 셀 수도 없는 괴물파리 사이에서 본체를 찾아 죽여야만 했다.
그렇게 죽어도, 죽어도 죽어도 다시 도전한다.
도전할 때마다 조금씩 강해져서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내는,
나의 지옥 여행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런 나에게 진정한 절망을 안겨 줬던 건 5층이었다.
이곳엔 대표하는 괴물이 없었다.
그저 용암으로 이루어진 바다가 있고, 셀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을 뿐.
나를 포함한 이곳의 녀석들은 비명을 지르며 가라앉았다.
용암을 이기지 못해 몸이 전부 녹아내리고, 죽으면 다시금 천장 위에서 부활해서 떨어지고…… 그것을 반복할 뿐이다.
용암 바깥에선 비명 소리밖에 들리지 않고, 용암 안에선 끔찍한 고통과 함께 녹아 가는 몸이 뱉어 내는 고통의 신호들 뿐이다.
이곳엔 그 어떤 괴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견딜 뿐.
견디다가 죽어도…… 또다시 견딜 뿐이었다.
혹시라도 옆에 있는 사람과 몸이 닿을 때면, 녀석들의 기억을 읽을 수 있었다.
사람을 죽여 불에 구워 먹은 년, 하나의 마법 폭발로 천 단위의 사람을 죽인 놈, 단란한 가정으로 들어가 임산부를 죽이고 그 안에서 아이를 꺼내 목 졸라 죽인 개X끼까지…… 그런 자들의 아픔이, 절망이, 억울함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감정이 느껴질 때마다 토악질이 나왔다.
그때 느꼈다.
아! 지금까지의 지옥은 지옥이 아니구나.
이곳부터가 진정한 지옥이구나!
그렇다면 이 아래의 지옥은 얼마나 끔찍한 곳이란 말인가?
하지만 꾸역꾸역 참았다.
억울했기 때문이다.
너무나 분했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지었다면 무슨 큰 죄를 지었는지 이곳의 주인에게 물어보고, 알아내고, 반드시 죽여 버릴 생각에 악에 받쳤기 때문이었다.
용암의 바닷물을 삼키고, 삼키고…… 또 삼키고!
장기가 타 버려 죽기를 반복했다.
그럴수록 용암의 바다가 견딜 만해졌고, 숨을 쉬지 않아도 죽지 않게 되었으며, 어느 정도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의 바다를 전부 삼키지는 못했다.
닿을 것 같지 않던 바다의 밑바닥에 발끝이 닿은 순간, 난 6층의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5층을 통과하고 6층에 도착한 나는, 그 어떤 불에도 견딜 수 있는 몸이 되어 있었다.
죄수들의 영혼을 다룰 수 있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곳에 있는 이들을 난 다룰 수 있었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무기로 만들어 싸울 수도 있었다.
그들을 동정하진 않았다.
정확히는 가질 수가 없었다.
이곳의 죄수들은 하나같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녀석들 뿐인데, 이런 녀석들에게까지 내어 줄 만큼 나의 동정심은 싸구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하나의 구슬로 집약시켰다.
검사로 따지면 검. 마법사로 따지면 지팡이와도 같은 옥빛 구슬.
그것을 이용해, 난 앞으로 나아갔다.
수많은 군대와, 그런 군대를 전부 취한 개인의 싸움의 시작이었다.
좀비처럼 피부를 잃은 나와, 그것을 저지하려는 6층의 군대.
나는 6층을 격퇴하고, 전부 뭉쳐서 구슬에 덧대었다.
그렇게 7층을 격퇴하여 흡수하고, 8층을 격퇴하고 흡수했다.
9층의 전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곳의 괴물 하나하나가 나를 죽일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고동락을 함께 한 옥구슬이 아니었다면 난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고, 지옥의 주인이 살고 있는 성의 바로 앞까지 도달하지도 못했겠지.
9층의 밤은 짧기 그지없다.
모든 것이 회복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밤.
적들도 모두 회복되겠지만…… 나와 구슬 역시 회복될 것이다.
이제 내일이면, 어떻게든 상황이 끝날 것이다.
내일이면, 지옥의 주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알 수 있…….
* * *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니, 눈을 떴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을 것이다.
해골은 눈을 뜰 수가 없다.
그저 눈두덩 속 음침한 야광 빛이 3배 정도 진해졌을 뿐이다.
그 눈두덩이 주시하고 있는 곳엔 5미터 남짓의 거대하고 붉은 해골이 있었다.
그 해골의 눈두덩 역시 붉은 빛을 뿜어낸다.
서로의 빛이 마주친 순간, 그는 눈앞의 이 해골 새끼가 지옥의 주인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강하다.’
하지만 도망갈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그 역시 강하기 때문이요, 언제나 그보다 강한 녀석들을 죽이고 성장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수억의 군대를 죽이고, 그 영혼들을 모아 놓은 옥구슬이 그와 함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격해야 하는가?
까득.
까드드득!
해골 이빨을 악물며 고민하고 있을 때, 지옥의 왕이 오히려 물어 오기 시작했다.
[넌,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어떻게 내가 배치한 수문장들을 전부 죽이고 이곳까지 올 수가 있었던 거지?]
[…….]
그는 어이가 없었다.
[나를…… 모른다고?]
[이곳의 주인이라고 이곳의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다.]
[…….]
1층부터 지금까지 해치우고 지나온 많은 일들이 스치고 지나간 후 떠오르는 감정은 분노였다.
[질문을 바꾸지. 이곳엔 왜 온 것이냐? 그 자리를 박차고 여기까지 온 이유가 궁금하군.]
1층의 수문장을 죽인 그는 새로운 수문장이 되었을 것이다.
지옥에서 그곳만큼 편한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곳을 지배하며 안주하는 것이 가장 편한 길이었으리라.
그런데, 이 녀석은 9층까지 꾸역꾸역 내려오는 사이코 같은 짓거리를 해 버렸다.
지옥의 왕은 그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널 만나기 위해…… 만나서, 따져 묻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물어봐라.]
지옥의 왕은 근엄하지 않았다.
관점에 따라선 가벼워 보이기까지 했다.
도저히 지옥이라는 곳을 다스리는…… 자신을 이 지경 이 꼴로 만든 놈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도대체 왜 내가 지옥에 떨어진 거지? 무슨 죄로? 어째서…… 나는. 난 어째서 이 꼴이 되어야만 했던 거냐!]
지하 1층에서 9층까지.
그는 인지하지도 못하는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이곳까지 왔다.
무사히 올 순 없었다.
6층으로 내려왔을 때 그의 육체는 좀비의 그것처럼 누더기로 변해 있었고, 7층에서는 완전한 백골이 되었으며, 9층까지 내려온 지금에 와서는 불타오를 대로 불타올라 흑요석 같은 흑골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날 어째서 이곳에 처박았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몸이지만, 만약 육신이 있다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그만두었다.
이 몸으로 어딜 간단 말인가!
악에 받쳤다.
그의 질문은 하나만 남았다.
자신을 왜 이 무저갱에 처박았는지!
도대체 무슨 권리로!
[…….]
지옥의 왕은 그런 그를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오히려 조금은 해답이 생겼다는 듯이.
[너의 죄목의 말해 주면 되는 건가?]
[……일단은 그렇다.]
[확답은 아니지만, 어려운 것은 아니니 일단 들어주도록 하지. 이름이 무엇인가?]
[…….]
그는 말문이 막혔다.
내 이름이 뭐더라? 그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
[이름을 모르면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잠깐. 기다려 봐.]
[얼마든지.]
지옥의 왕은 그를 기다려 주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뇌조차 없는 텅 빈 머리를 쥐어짜야만 했다.
그리고 기쁘게 말할 수 있었다.
[정시혁.]
[그것은 희한한 이름이군.]
[…….]
일단 지옥의 왕은 아공간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문짝과도 비슷한 크기의 책. 그 책이 자동으로 펼쳐지더니 파라라락 넘어간다.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넘어간 순간, 지옥의 왕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봐라.]
촤라라라락!
다시 한번.
[흠…….]
촤라락!
또 한 번 다시…….
그렇게 다섯 번을 넘겼건만 지옥의 왕은 지옥 기록부에서 정시혁이라는 이름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이름이 잘못된 건 아닌가?]
[……그럴지도……?]
[그렇다면 넌 나를 믿어야 한다. 가만있어라.]
뭘 믿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마왕의 왼쪽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그의 흑골을 감싸기 시작했던 것이다.
공격 같지는 않다. 그저 자신을 탐색하는 듯했다. 곧 마왕의 오른쪽 눈에서 뿜어진 빛이 허공에 맺히더니 무언가의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검은 머리카락, 갈색의 눈. 약간은 까무잡잡한 피부의 28세의 훤칠하고 잘생긴 동양 청년.
정시혁의 턱뼈가 쩍 벌어졌다.
‘내…… 살아생전 모습이다!’
놀라웠다. 감동까지 받았다.
하지만 지옥의 왕은 다른 관점에서 감정이 동하고 있었다.
오히려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을 정도다.
[어우 씨 뭐야. 이렇게 생긴 종족도 있었나? 머리는 왜 검고 눈동자가 갈색이지? 눈은 왜 이렇게 작고 찢어진 거지?]
[…….]
[너, 이데로니아 출신이 맞기는 한 건가?]
[……난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
정시혁은 답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답답한 건 지옥의 왕 역시 못지않았다.
‘진짜 이상한 놈이네?’
1층이 붕괴되었을 때, 그는 의문을 품었다.
각 층의 수문장이 바뀌는 것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죄수가 수문장을 죽이고 새로운 수문장이 되는 건 길고 긴 이곳의 역사 속에서도 전무했다.
‘버근가……?’
처음 녀석을 인식했을 땐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은 2층이 함락되었을 때도, 3층이 함락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8층까지 함락되었을 땐 지옥의 왕도 궁금증이 많아졌다.
물론, 그 궁금증을 해소할 생각은 없다.
호기심은 독과 같아서 편안한 지옥의 삶을 해칠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초기화가 답이다.’
아무리 견고한 시스템도 세월 앞에선 장사 없다.
그렇다면 초기화를 하면 그뿐.
그리고 시도했다.
도대체 얼마 만에 시도하는 것인지도 모를 초기화 스펠을 말했다.
하지만.
- 초기화에 실패했습니다.
- 시스템에 결함이 존재합니다.
초기화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녀석 때문인 듯했다.
때문에 오랜 시간 기다렸다.
초기화에 실패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
드디어 녀석이 9층으로 내려왔고, 자신의 영역 앞까지 녀석이 도달했다.
그 즉시, 지옥의 왕은 움직여 이곳으로 온 것이다.
녀석을 직접 처리하기 위해서 말이다.
처리 방법은 간단했다.
그저 스펠을 말할 뿐.
윤회.
혹은 완전 소멸!
하지만…….
- 대상의 윤회에 실패합니다.
- 시스템 바깥의 존재입니다.
- 대상의 삭제에 실패합니다.
- 시스템 바깥의 존재입니다.
[너에게는 윤회도 통하지 않고, 완전 소멸도 시킬 수 없더군.]
지옥의 왕은 많은 일을 겪었지만, 지옥 명령어가 통하지 않는 지옥 죄수를 본 적은 처음이었다.
왜 이런 상황이 일어났는지 그 원인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시스템을 근거로 유추할 수 있었다.
왜냐면 명령어로 녀석을 윤회. 혹은 소멸시키려 할 때마다 시스템이 그 답을 가르쳐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스템 바깥의 존재라…….]
지옥의 왕은 머리를 짜내어, 어느 한 스펠을 찾아 헤맸다.
죽은 자를 그때의 상태 그대로, 다시금 있던 곳으로 보내 버리는…… 지옥과는 어울리지 않는 착하디착한 명령어.
바로 ‘현생으로 되돌려 보내기’다.
훠엉!
정시혁의 등 뒤로 공간이 열렸다.
그리고 정시혁을 미친 듯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건 되는군.]
[이, 이게 뭐지?]
[놀라지 마라. 너에게도 좋은 것이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넌…… 이곳으로 잘못 빨려 들어온 것 같다. 아마 저곳으로 들어가면 다시 네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이제 됐지?]
[…….]
집으로 보내 준다는 말에 정신이 멍해졌다.
이렇게 쉽게 집으로 돌려보내 준다고?
수많은 시간이 흐른 상태로…… 해골이 된 상태에서 집으로 돌려보내 준다고……?
가족이 죽었을, 인류가 존재할지도 의문인 곳에 흑골이 된 채 돌아가고 싶진 않다.
[그런 건 벌써 포기한 지 오래란 말이다!]
그간의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1층에서부터 9층까지의 고통의 연속.
과연 사악한 지옥의 왕이라는 것일까?
정시혁의 모든 것을 명령어 하나로 없는 일로 만들어 버린 채 앙상한 손을 작별하듯 흔들고 있는 저 거대한 녀석에게 시혁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정시혁은 손을 뻗었다.
그의 주변을 맴돌던 옥빛 구체가 거대한 손아귀로 변해 지옥의 왕의 왼쪽 정강이뼈를 꽉 움켜쥐었다.
[어잇…… 이게 무슨 짓……!]
[혼자 가진 않는다. 네놈을…… 어떻게든 끌고 갈 것이다!]
[놔. 이런 씨…… 뭔 놈의 힘이……!]
순수하고 강력한 악의.
지옥의 왕은 공포라는 감정을 느꼈다.
어떻게든 이 물귀신 같은 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애썼다.
지금 이 몸이 가지고 있는 힘으론 뿌리치기가 힘들었다.
지옥의 왕의 눈동자가 붉게 빛난다.
곧 성안에 있는 라이프 포스 베슬에서 막대한 힘이 뿜어져 나와 지옥의 왕의 해골에 막대한 지옥투기를 불어넣었다.
덕분에 그의 몸은 구출되었지만, 영혼 한 조각이 뜯겨 나가는 소실이 있었다.
시혁은 지옥의 왕의 기운을 한껏 움켜쥔 채 비명을 질렀다.
[반드시…… 반드시 되돌아올 것이다. 반드시 되돌아와서…… 네놈을 뼈째 씹어 먹어 소멸시켜 주마아아아아아아아아아……!]
스으으읏.
아공간이 닫혔다.
지옥의 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로…… 소름 끼치는 놈이로다.]
미지의 존재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듣도 보도 못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1층에서 굳이 9층까지 기어 내려온 저 녀석은 지옥의 왕이라 할지라도 공포를 집어먹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떠나간 녀석이었다.
녀석을 뿌리치면서 소실된 10%의 힘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 초기화 한 번이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지옥의 왕은 지옥 초기화를 시도했다.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는 긴 세월 만에 말해 보는 초기화 스펠.
……!
그것은 정상으로 작동되었고,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1층의 케르베로스도, 2층의 레비아탄도 다시금 부활했다.
그런데,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있었다.
지옥의 총량!
지옥이 간직했던 에너지의 총량이,
30% 이상 줄어들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힘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힘을 시스템 복구에 사용했다는 듯, 라이프 포스 베슬에 저장되어 있던 자신의 지옥투기가 초기화 이전보다 한없이 약해져 있었다.
덕분에 쓸 수 있던 명령어가 많이 막혔다.
이를테면 소멸이나 윤회 같은 편한 명령어 말이다.
곧 생각하기 싫어도 알게 되는 사실이 지옥의 왕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힘을 되찾기 전까진 많은 명령어를 쓸 수 없다.
반면, 자신이 약해진 만큼 힘에 굴복했던 온갖 잡놈들이 그를 노릴 것이다.
즉, 굉장히 피곤해질 거라는 이야기.
지옥의 왕은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졌네. 이거.]
지옥에서 돌아온 리치삼촌
지은이 : 은남
제작일 : 2024.01.10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심지은
표지 : HO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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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405-2345-0(1)